683년 12월4일 고종 사망부터 이듬해 684년 8월11일 장례까지는 9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 당나라는 정치적 격동을 겪는데, 이는 ‘중종의 폐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었다.
중종은 부인인 황후를 총애했다. 문제는 중종이 사사로운 인연에 끌려 다녔다는 것. 황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위현정에게 고위관직을 주려 하면서 사단이 벌어졌다. 나아가 자신의 유모 아들에게도 고위관직을 주려 했다. 이를 안 재상들이 “불가하다”고 간하자 중종은 크게 노하며 “나는 장인에게 천하라도 줄 수 있는데 무슨 간섭이냐”고 했다. 두려워진 신하들은 이를 무측천에게 알렸다.
무측천은 중종이 황제가 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침내 신하들과 함께 중종을 폐위시킬 계획을 꾸며 684년 2월6일 조정백관을 소집해 폐위조서를 발표한다. 중종이 승복하지 않고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따지자 무측천은 “네가 천하를 장인에게 주려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도 죄가 없단 말이냐”라고 맞받아쳤다. 중종은 폐위되었고 왕으로 강등되어 별채에 유폐된다.
홧김에 내뱉은 말을 가지고 아들을 폐위시킨 것은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한 구실을 삼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주장이 있다. 반면 무엇보다 당시 불안했던 국내외 정세를 노심초사하던 무측천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평가도 만만찮다.
고종이 통치했던 기간은 당나라의 중흥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병고와 말년의 지병 악화로 정사를 거의 돌보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무측천이 대신했다 해도 에너지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변 소수민족들의 반란과 소요가 골칫거리였다. 고종과 무측천은 군대를 연이어 파견해 승리를 거뒀지만 인력과 물자의 소모가 컸고 변방을 완전히 안정시키지 못했다.
자연재해도 극심했다. 680년 9월 하남과 하북 지역 여러 마을에서 홍수가 났고 이듬해 8월에는 수해가 들었다. 자연재해가 몇 년간 이어지자 이민족 침략으로 야기된 재정난이 더욱 심해졌다. 장안과 낙양 사이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 비극까지 초래되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고종이 죽으면서 정국은 매우 불안해졌다. 어느 때보다 남다른 수완과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황위를 계승한 중종은 기대 이하였다. 무측천은 일찍이 중종의 자질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된 후 중종의 행동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다.
684년 2월 중종이 폐위된 후 고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무측천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인 이단이 계승하니 예종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형 중종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정치적인 두뇌와 정사처리 능력은 없었다. 예종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무측천이 정사를 주관하고 예종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국면이 이렇게 해서 형성된다.
중종을 폐위하는 과정에서 무측천은 혹여 중종의 측근들이 정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종이 돌연 거처에서 죽는다. 일부 학자들은 무측천 명에 따라 살해됐거나 자살했다는 주장을 내놓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어떻든 당나라는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활기를 띠었다. 무측천 집권 시기 국력은 강성해져 영토가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남쪽으로는 임읍, 북쪽으로는 대사막에 이르렀다. 당 태종 때보다 더 넓었다.
무측천은 태후 신분이었지만 권세는 황제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정식 황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지 알려주는 역사 기록은 없다고 전한다. 워낙 오랜 기간 남편과 아들을 대신해 집권해온지라 황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서경업의 반란도 있었고 “여자가 어찌 황제를…”이라고 생각하는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여성이 황제가 되는 것도 순리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까.
그녀는 신중하고 치밀했다. 우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밀고제’를 법제화해 밀고를 장려했다. 잔인하고 포악하며 형벌을 남용하는 ‘혹리(酷吏)’도 장려했다. 혹리가 발호하면서 무고 고문 멸족 등 각종 형벌이 남용되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어떻든 정적(政敵) 제거에 이만한 무기는 없었다.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한 황제들은 그전에도 있었다. 당시는 군주의 권한이 막대한 봉건시대였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대파를 없애는 일 못지않게 지지 세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했다. 불규칙하게 시행되던 과거제를 상설하고 선발과목을 조정하는 등 관료 선발 개혁에 앞장서는 방식으로 인재양성에 몰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사를 올리는 명당 같은 건축물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방식으로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에 적절한 이벤트를 시시때때로 벌인 것이다.
이론적 근거도 마련했다. 중국에서는 여성이 황제는커녕 관료가 되어 직책을 갖고 권리를 행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측천은 역사에 없는 전례를 만들기 위해 경전을 파고들었다. 불행히도 유가의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 도가의 도덕경은 남존여비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불교경전에는 여성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있었다. ‘대방등무상대운경(大方等無想大雲經)’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정광(淨光)이라는 천녀(天女)가 있다.…부처님이 이르기를…중생을 위해 여자의 몸으로 나타날 것이다…그때 신하들은 이 여인을 받들어 왕위를 이어갈 것이고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인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받들 것이고 저항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당 태종이 “백성들 대부분이 불교를 믿는 것 같다”고 말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중국은 사대부에서 여성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불교를 숭배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왕이 될 것이라는 불경의 논리에서 새 왕조를 세울 근거를 찾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무측천은 이 경전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누구 하나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국 어디서나 무측천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그래도 무측천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급기야 지지자들이 “무측천을 황제로 모시자”는 청원에 나섰다.
1차 때는 관중지역 노인 수백여 명이 자발적으로 낙양 황궁에 와서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할 수 없다’고 외쳤다. 예종을 황태자로 강등하고 무측천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무측천은 사양했다. 그러자 청원인구는 갈수록 늘었다.
2차 때는 노인, 변방지역 수장들, 승려와 도사 1만2000여 명이 황궁에 와 청원을 했다. 3차 때는 문무백관, 황실 종친, 황제인 예종까지 청원에 참가해 무려 5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장하고 이내 돌아가는 식이 아니라 아예 황궁 앞에 머물며 버텼다.
무측천이 꿈꿔왔던 새로운 왕조 건립은 이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무측천은 결국 “하늘의 뜻이 이러하고 백성들의 정성이 이와 같으니 어찌 민의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청원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기쁘도다!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하고 신하들에게 새로운 왕조 건립에 관한 의례를 준비시켰다.
마침내 690년 9월9일 무측천은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꾸고 낙양을 수도로 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7일간 술을 내리고 사면령을 선포했다. 닷새 후 신하들은 무측천에게 ‘성신황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예종은 황태자로 강등되어 무씨 성을 받고 예전처럼 동궁에 거처하게 된다.
무측천이 국호를 당에서 ‘주’로 바꾼 이유는 무씨라는 자신의 성이 옛 주나라 성씨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주나라 평왕의 작은아들이 손바닥에 무(武)자를 새기고 태어나 그것을 성씨로 했다고 전한다.
무측천은 무엇보다 천하의 근본은 농사이며, 그 근본이 탄탄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판단해 농업을 장려하고 수리시설 개선에 주력했다. 통치기간 중 개설하고 보수한 수리시설만 44개에 달하고 내륙 운송망도 본격적으로 구축된다. 진정으로 백성의 어려움에 다가가려고 노력해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입은 지역에 양식과 물품을 보내 구제하며 걱정했다.
무측천은 무엇보다 관용과 포용의 정치인이었다. 세 번이나 반역죄 혐의를 받은 사람도 주변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추천하자 과감하게 재상으로 썼고, 반대파의 딸도 기용했다. 목숨을 내놓고 간언하는 사람들을 중용했다. 개인의 가문이나 배경, 사사로운 은원(恩怨)관계를 탈피해 인재를 등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도 강해 모친상 때도 부친상과 마찬가지로 3년간 상복을 입도록 했다. 여성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하지도 못하게 했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아들의 성 이씨를 자신의 성인 무씨로 바꾸게도 했다.
무측천의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측천’이란 칭호는 그녀가 죽기 직전 대를 이은 황제 예종이 올린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와 죽은 후 나라에서 내린 시호 ‘측천대성황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전통시대 중국 역사가들은 그녀를 ‘측천황후’ ‘무후’ 또는 비하하는 의미로 ‘무씨’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모두 황제였음을 인정하지 않는 호칭으로 봐야 한다. ‘무측천 평전’의 번역자들은 ‘무측천이란 말이 황제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호칭’이라고 소개한다.
그녀는 무엇보다 남존여비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기존 체제와 통념에 일침을 가했고 실제로 이를 성취한 사람이었다. 가히 대단한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무측천은 집권하는 동안 태종 이래 모든 성과를 끌어안으면서 제국의 강대함을 유지했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이후 현종의 태평성대를 위한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측천은 말년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사를 돌본다. 704년 결국 병석에 눕게 되자 오로지 몇몇 측근에게만 수발을 들게 했다. 죽기 며칠 전 “내가 죽으면 황제 칭호를 없애고 황후로 부르도록 하라. 고종 옆에 묻어달라”는 유시를 내린다. 삶의 동반자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남편의 계승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아내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705년 11월26일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이른 새벽, 무측천은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였다. 비문에는 생전 그녀의 바람대로 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질곡의 인생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결국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라는 것을 보여준 장엄한 퍼포먼스라고나 할까.
‘역사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 인물의 모든 언행 및 사상의 여러 측면을 고찰해야 하지만, 금에 순금이 없듯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인물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가 이전 사람과 동시대 사람에 비해 조국의 부강과 통일에 대해, 민족의 흥성과 발전에 대해, 생산력의 회복과 발전에 대해, 과학기술문화의 혁신과 번영에 대해 공헌했는지를 따져본다면, 무측천은 의심의 여지없이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역사적 인물이며 걸출한 여성정치가였다.’ (‘무측천 평전’ 중에서)
<> 참고도서
‘무측천 평전’-1985년 10월 중국 당사학회가 건릉박물관에서 무측천연구회를 만들고 저자 자오원룬(趙文潤)과 왕솽화이(王雙懷)가 집필에 들어가 8년 만에 완성한 책이다. 무측천이 일개 미관말직인 후궁에서 황후, 황태후,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 집권기간 실시했던 여러 정책 등 전 생애에 걸쳐 방대한 1차 사료와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객관적 입장에서 소상하게 정리, 분석했다. 무측천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책이다.
‘심리공략의 기술’-‘사람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는 주제 아래 무측천이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전략론으로 접근했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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