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방에 틀어박혀 돈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
《단지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기만 했다면 사람들은 워런 버핏에게 그처럼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일 수 있었던 이유,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남다른 가르침을 전해주는 ‘현인’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않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워런 버핏의 영혼의 반려자이자 ‘샌프란시스코의 테레사 수녀’로 불렸던 수지 버핏이 그 주인공이다.》
세계 금융의 중심 월스트리트에서 무려 50년 이상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2008년과 2009년 연속 포브스지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된 워런 버핏. 그는 2006년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의 85%를 기부해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회고록을 펴낸 적이 없는 그가 한 여성 애널리스트에게 털어놓은 ‘스노볼(snowball·랜덤하우스)’에는 그의 역정이 상세히 담겨 있다. 저자 앨리스 슈뢰더는 워런 버핏으로부터 받은 자료와 본인은 물론 가족, 친구, 사업 파트너들에 대한 무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5년간 버핏에 매달렸다. 직장에 사표까지 쓰고 써 내려간 역작이었다.
저자는 버핏이 당부한 대로 “평이 엇갈릴 때는 아첨이 덜한 쪽으로 해달라”는 주문을 충실히 따랐다. 따라서 칭찬 일색이 아니다. 실수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는 평범한 인간, 그러나 평생 돈을 향해 집요하면서도 정직하게 살아온 한 인간의 여러 면모를 ‘팩트’를 바탕으로 빼곡히 담았다.
그중에서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워런의 사생활이 눈길을 끈다.
워런 버핏 곁에는 두 여자가 있었다. 조강지처 수지와 그의 말년을 돌보고 있는 애스트리드다. 그중에서 수지 버핏은 오늘의 워런 버핏을 만든 ‘내조의 여왕’이자 그에게 끊임없이 영혼의 목소리를 들려준 ‘솔 메이트’였다. 일 중독자 남편 때문에 심한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자의식을 버리지 않고 뒤늦게 가수로 데뷔했으며, 별거를 선언하면서도 여자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남편을 위해 또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정도로 관대했다. 이번 호 주인공은 워런의 또 다른 자아, 수지 버핏 여사다.
워런은 10대 시절에도 여자보다 숫자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여덟 살 때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며 병뚜껑을 모아 종류별로 분류해 어떤 상품이 인기가 좋은지 알아내는 일을 즐겼을 정도로 사업가적 호기심을 타고난 그는, 고교시절 신문배달을 할 때에는 독특한 배달방식으로 고참 어른들보다 돈을 더 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늘 서툰 일이 있었으니 바로 ‘여자친구를 사귀는 일’이었다. 여자 앞에 서면 벌벌 떠는 부끄러움 때문에 데이트 신청하기를 끔찍이 싫어하던 그에게 첫눈에 반한 여자가 나타났다.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 입학 1년 전인 1950년 여름 여동생 버티가 소개해준 수전 톰슨이었다(‘수지’는 그녀의 애칭). 버티는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인 수지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수줍음 많은 오빠에게 소개한 것이었다.
워런은 수지를 보자마자 자기보다 내면적으로 훨씬 성숙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따뜻하고 상냥한 그녀에게 금방 호감을 느꼈다.
수지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그녀가 특히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릴 적 병치레가 잦았던 그녀는 각종 알레르기를 달고 살았고 만성 중이염 때문에 생후 18개월까지 고름제거를 위한 절개수술을 열두 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병약했다. 류머티스로 고생해 유치원 생일 때는 다섯 달이나 집안에 갇혀 살기도 했다. 한창 뛰어놀 때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수지는 사람이 늘 그리웠다. 나중에 종교나 인종을 뛰어넘어 많은 친구를 사귀는 포용력을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수지는 끼가 많은 여자였다. 고교 때는 연극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미스 센트럴(고등학교)’로 뽑히기도 했다.
워런을 만났을 당시 수지에게는 이미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친구는 아버지가 대학교수인 중산층 가정의 수지와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처졌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러시아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유대인이었다. 당시 수지의 고향 오마하는 종교가 다른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면 세금을 물어야 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편견이 많은 곳이었다. 소수자에 대한 연민이 깊었던 수지는 ‘말도 안 되는’ 전통에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개신교도였던 부모는 수지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지가 선(禪)불교를 공부하며 마음을 달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러는 사이 워런의 구애가 시작됐다. 워런은 수지의 부모를 공략하는 전술을 폈다. 마침 수지의 아버지는 네브래스카 주 하원의원이던 워런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을 위해 한때 선거본부장을 맡을 정도로 잘 아는 사이였다. 수지의 부모는 똑똑하고 개신교도이며 공화당원인 워런을 최고의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누가 봐도 최고 신랑감이었다. 4선 하원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둔 좋은 집안에 미국에서도 대졸자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1940~50년대에 최고경영대학인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입학을 앞둔 수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지는 워런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데이트 때마다 온통 주식 이야기뿐인 재미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워런을 점점 알게 될수록 수지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류층이지만 특권의식이 없었고 겸손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수지를 흔들리게 한 것은 자신감 뒤에 가려진 허약한 내면이었다.
알고 보면 워런은 우울증과 신경질 때문에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쓸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반복했던 어머니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하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주식에 관한 한 거침없는 달변, 비범한 천재의 분위기 밑에는 부서지기 쉽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속마음이 있었다.
당시 수지는 오마하대학교 학생이었고 워런은 직장생활을 시작한 성인이었지만, 워런은 수지 앞에서 세 살짜리 아이 같았다. 그는 수지에게 점점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수지는 워런의 내면을 치유해주고 싶었고 워런은 수지를 통해 보다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보살핌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워런은 훗날 회고를 통해 아내 수지가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나한테는 온갖 방어기제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지만이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설명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수지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수지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52년 4월19일 결혼한다. 워런의 나이 스물한 살, 수지는 열아홉 살이었다. 수지는 결혼 여섯 달 만에 임신을 해 대학을 자퇴했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맡는 게 당연한 시대였지만 두 사람의 역할은 극단적이었다는 게 ‘스노볼’의 저자 앨리스의 말이다. 수지는 “남편의 야망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꺼이 그를 감싸주는 고치의 껍데기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극정성으로 워런을 내조한 것이다.
남편 워런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일 중독자였다. 아이들과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서도 벤치에 앉아 투자 관련 자료를 읽을 정도였다. 일을 뺀 나머지 일상에서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아침 출근 옷을 고르고 입을 때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이발소에 가는 것도 싫어해 수지가 이발을 해줘야 할 정도였다.
워런은 퇴근하면 “나 왔어요” 고함을 친 뒤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로 바로 가 신문을 읽었다. 아침 식탁에서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집에 오면 말이 별로 없었다. 일에 관련한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유일한 취미였던 브리지 게임도 금방 시들해졌다. 워런에 따르면 “수지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상대방이 이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는 것. 수지가 소화 장애로 구토할 때 대야를 갖다달라고 하자 물 거르는 여과기를 가져다줄 정도로 무심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지는 이런 남편에게 실망하는 대신 “아예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포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그를 고치는 일’을 끈기 있게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는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니까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다짐하곤 했다.
‘스노볼’의 저자 앨리스에 따르면 수지는 1960년대 미국 중상류층 주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두 손으로 세 개의 공을 다루는 저글링을 하듯 능숙하게 해냈다. 시댁 식구를 돌보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시아버지가 결장암에 걸렸을 때는 최대한 남편이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하며 시아버지의 회복을 돕고 시어머니를 위로했다. 이혼 문제로 삶의 나락에 빠진 시누이를 구원한 것도 그녀였다.
나아가 그녀는 가족 돌보기를 넘어 흑인 빈민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역사회 해결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나쁜 감정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워런은 돈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많은 돈을 모으고 싶어했고, 돈을 모으는 과정을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돈을 포기하라고 하면 뼈다귀를 지키려는 개처럼 사납게 짖어댔다. 구독료를 아끼기 위해 지난 잡지만 볼 정도로 적은 돈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분투했던 그를 두고 이웃들 사이에서는 인색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차를 빌려 쓴 뒤에도 기름을 채워 넣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날 수지가 집안청소를 하다가 남편 책상에 있던 수표뭉치를 무심코 버린 적이 있었다. 뒤늦게 안 수지는 기겁을 하고 쓰레기 소각장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수표뭉치는 태워지기 직전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수지는 수표뭉치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기껏해야 장당 25달러나 10달러일 거라고 생각했던 수표들은 수천달러짜리였다. 20대 중반의 남편이 이미 큰 부자라는 것을 수지는 그때서야 알았다.
수지는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생활비만 받으면 만족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데 익숙했다. 마침내 집을 갖게 되었을 때 수지는 남편으로부터 수리비를 타내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워런은 벽 색깔이나 벽지를 바꾸는 데에 왜 돈을 써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수지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워런에게서 돈을 더 빼내려고 갖은 수를 썼다. 몸무게를 53kg으로 유지할 테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달라고도 했다.
이러다보니 워런의 아이들은 아빠가 부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다른 집 애들처럼 용돈을 받기 위해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해야 했다. 물론 남보다 모자라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한번도 아빠로부터 당연한 듯 용돈을 받지 못했다. 극장에 가도 팝콘조차 사주지 않는 아빠였다. 워런은 결혼한 딸이 집수리에 돈이 필요하다며 빌려달라고 하자 “돈을 빌릴 거면 은행으로 가야지”하며 거절했다. 아이들을 검소하게 키우는 데에는 수지도 동의했다. 이들 부부가 가르치고 싶어했던 것은 “돈은 중요하다”는 교훈이었다.
‘벌자’(워런)와 ‘베풀자’(수지)로 돈에 관한 가치관이 달랐던 두 사람은 때로는 이혼도 불사하는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믿었기에 원만한 부부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행복하길 바랐고 아내는 남편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결국은 스타일의 차이였다고 할까. 워런은 산 정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스타일이었고 수지는 천천히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스타일이었다.
워런에게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사업가의 본능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박애적인 선한 시민의 본능이 있었다. 무엇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피부색깔과 재산의 유무에 신경 쓰지 않고 이웃을 돌보는 아내를 좋아했다.
가정부가 들어와 집안일에 여유가 생기자 수지는 점점 바깥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잠시 화랑 일을 하기도 했다. 워런은 아내가 관심을 기울일 대상을 집 바깥에서 점점 더 많이 찾아나가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지역사회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워런이 점점 부자가 되면서 시작됐다. 수지가 남편을 향해 “이제 돈 버는 일에 그만 집착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966년 기준 미국 내 최고 부자가 된 남편을 향해 수지는 “인생에는 방에 틀어박혀 돈 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고 다그치곤 했다. 하지만 워런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수지는 변하고 있었지만 워런은 변하지 않았다.
수지가 밖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미술이나 여행, 박물관, 극장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남편 대신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반면 남편은 새로 벌였거나 이미 벌인 사업들 때문에 오마하를 떠나 있는 일이 갈수록 잦았다. 집보다는 사무실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많았다.
수지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우울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대학시절 마음을 주었던 남자친구나 테니스 코치와 각각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포착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수지에게 워런과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비록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해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워런을 향해 고지식하고 돈에 얽매여 산다고 놀리긴 했어도 남편은 기본적으로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것은 캐서린 그레이엄이라는 여자가 등장한 이후였다. 어릴 적 신문배달을 한 이래 유달리 신문에 관심이 많았던 워런은 공식석상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이던 캐서린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함께 뉴욕이나 워싱턴의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심지어 캐서린 집에 머물면서 파티에 참석했다. ‘워싱턴포스트’ 이사를 맡기도 했던 워런은 캐서린을 통해 당시 미국 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유명인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반면 경영에 문외한이었던 캐서린으로서는 워런이 구루(스승)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죽자 갑자기 ‘워싱턴포스트’를 물려받은 캐서린은 자잘한 것들을 끊임없이 워런에게 물었다.
쉰아홉 살의 그레이엄이 마흔여섯 살 버핏에게 애교 섞인 몸짓으로 자기 집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이 한 자선 행사장에서 포착된 것을 비롯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더 자주 목격됐다. 바야흐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가십성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워런과 수지 사이의 미묘한 균형은 깨졌다. 남편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에 변함은 없었지만, 수지는 더 이상 남자에게 매달리는 불쌍한 여자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행동에 분노한다는 말도 친구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이들도 속을 많이 썩였다. 큰아들은 학교와 룸메이트에 적응하지 못해 대학을 여러 군데 옮겨 다녔고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딸은 록밴드에 심취했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빠진 수지가 기댄 것은 뜻밖에도 음악이었다. 그녀는 작곡가인 조카가 만들어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마침내 가수가 되었다. 비록 무대는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수지는 충만함을 느꼈다. 아내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에서 벗어나 한 여성으로 자기 인생의 무대에 새롭게 선 느낌이었다.
수지는 마침내 홀로서기를 선언한다. 언니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집을 마련한 것이다.(물론 남편 돈으로) 수지는 워런에게 “당신을 떠날 생각은 없다. 갈라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전과 다름없는 부부다. 샌프란시스코에 나만의 공간을 만든다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미술품과 음악과 극장이 가득한 도시에 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②편 계속 ...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오마하 현인(賢人)’의 솔 메이트 수지 버핏 ① | 2009-10-01 |
[세기의 철녀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① | 2009-09-01 |
[세기의 철녀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② | 200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