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은 충격을 받았다. 수지 마음이 왜 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마흔일곱 살이던 워런은 자신이 상상하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재산은 7200만달러나 되었고, 자산가치 1억3500만달러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가 가진 신문사 ‘오마하 선’은 언론계 최고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현재의 삶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계속 돈을 버는 게 그가 원하는 전부였다. 비록 돈에 사로잡혀 있다고 아내가 생각할지언정 자신은 아내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함께 ‘팀’으로 무리 없이 25년간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워런은 수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혼도 아니고 잠시 따로 사는 것뿐이었다. 이제 아이들도 제 갈 길을 가는 상황에서 아내도 하고 싶은 걸 할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내가 단지 변화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별거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워런의 삶을 흔들었다.
워런에게 수지 없이 살아가기란 고통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했다. 날마다 맹렬한 두통에 시달렸다. 참다 못해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들고 수지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미 자신이 원하는 걸 워런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워런 버핏이 털어놓은 회고다.
“(수지가 내 곁을 떠나버리게 만든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95% 아니 99%가 내 잘못이다. 수지는 언제나 나에게 주파수를 맞췄는데 나는 수지에게 맞추지 않았다. 오랜 세월 아내는 내가 사람 노릇을 하도록 붙잡아줬다. 아이들을 키운 것도 95%가 수지였다. 수지는 내로라하는 남편을 둔 여느 부인들처럼 누구 부인입네 거들먹거리며 살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이 수지를 사랑했다.…(별거는)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남편의 흔들림을 보고 수지가 선택한 것은 남편을 도와줄 또 다른 ‘여자’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수지의 남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수지가 택한 여자 애스트리드 멩크스는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카페의 지배인이었다. 1946년 서독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라트비아 사람이었다. 부모는 애스트리드가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오마하로 이사했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던 아버지는 운동장 보수 일을 했고, 애스트리드를 비롯한 형제들은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죽자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녀는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대신 여러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성품이 착해 예술가들, 방황하는 독신자들, 동성애자들이 축제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주면서 수지와도 인연을 맺었다. 골격이 작고 피부가 맑으며 금발과 세련된 자태를 가진 전형적인 북유럽 미인형이었다.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는 수지와 애스트리드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음식솜씨가 뛰어났던 애스트리드는 워런 부부 집에 손님이 올 때 일을 돕기도 했다. 특히 워런이 좋아하는 탄수화물이 가득 든 프라이드치킨과 으깬 감자, 고기 국물, 알을 뜯어내지 않은 상태의 옥수수 같은 음식을 잘 만들어 워런을 즐겁게 했다.
수지는 애스트리드에게 워런을 보살펴줄 것을 부탁했다. 애스트리드는 이따금씩 워런이 혼자 있는 집으로 가서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이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리라고는 수지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애스트리드는 어느 날 자신의 아파트를 버리고 워런의 집으로 들어갔다. 워런, 수지, 애스트리드 사이의 묘한 삼각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때로 불안했다. 워런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수지에게 여전히 잘하려고 노력했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애스트리드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워런이 결코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지와 애스트리드는 각자 맡은 역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애스트리드는 공식적인 ‘워런 버핏의 아내’ 자리를 전적으로 수지에게 양보했다. 두 사람의 혼인 관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그저 자신은 집에서 워런을 돌보는 집사나 가정부 역할에 충실하고 만족했다.
그녀는 버핏보다 16살이나 어렸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여자였지만, 고급 프랑스요리와 좋은 포도주를 잘 알았다.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요리를 하고 정원을 꾸미고 싼 물건을 찾아다니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펩시콜라를 사고 빨래를 하고 집을 돌보고 워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음식을 만들고 전화를 받고 필요할 때 동행해주는, 그야말로 워런이 원하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워런과 함께 있는 것말고는 자신의 헌신에 대한 어떤 보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자기를 내세우는 성격도 아니었고 말도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에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대화를 듣는 성격이었다. 버핏의 명성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녀의 생활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집 부근에 얼쩡거리는 얼뜨기들에게 붙들려 가끔씩 질문세례를 받는 게 고작이었다.
이에 비해 수지는 ‘워런 버핏의 부인’이라는 후광을 누리면서 그 역할과 관련 없는 영역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버핏 재단도 운영했고 워런의 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사 역할도 했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버핏 그룹의 정기모임, 연말연시 가족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물질과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 ‘샌프란시스코의 테레사 수녀’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녀의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워런의 재력 덕분이었다. 관대하고 손이 크다는 수지의 명성은 모두 워런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수지에게 인색했던 워런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그는 수지를 실망시켰던 것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수지가 청구하는 모든 영수증에 사인했다.
그는 수지를 위해 비서를 고용했고 집도 한 채 더 사주었다. 세 자녀에게 5년마다 한 번씩 생일날 100만달러를 주자는 의견도 받아들였다.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난 대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엄청나게 많았던 수지는 마법사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롭고 활기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 사람 모두 각자 처한 자리에서 만족하는 최선의 위치를 고른 셈이었다.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답게 워런은 애스트리드와의 동거를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기자들의 질문에 딱 한 차례 공식적인 해명을 했다.
“만일 관련된 사람들을 (질문하는) 당신이 안다면, 이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겁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절묘한 삼각관계에 금이 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수지의 병 때문이었다. 수지는 비장과 췌장 사이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고 자궁절제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일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워런과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기로 한 날짜를 며칠 앞두고 장 폐색증으로 입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정밀검사 끝에 구강암 3기라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수지는 처음엔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부했으나 워런의 집요한 설득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워런은 수지가 자기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자기가 죽고 나면 수지가 가족을 평화롭게 이끌 것이고 재단도 알아서 운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스트리드도 잘 돌볼 것이고 어떤 반목과 불화도 다 매끄럽고 따뜻하게 녹일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자기 장례식도 잘 치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수지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워런은 수지를 지극정성으로 찾았다. 주말마다 그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언제나 남이 주는 걸 받기만 했던 이 남자는 남에게 베푸는 걸 배우고 있었다. 비로소 아내를 보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지도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워런과 함께 지냈다.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수지는 2004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워런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졌다.
수지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식이 운영하는 ‘수전 톰슨 버핏 재단’에 기부했다. 이제 빈 자리는 애스트리드가 메울 차례였다. 그녀는 워런의 어엿한 공식적인 동반자가 되었다. 빌 게이츠 부부와도 정기적으로 어울렸다.
수지가 죽고 난 2년 뒤, 워런은 자신의 일흔여섯 번째 생일에 딸의 집에서 애스트리드와 결혼했다. 가족만이 함께한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워런이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는 순간 애스트리드는 눈물을 쏟았다.
워런 버핏의 사생활은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혹자는 그가 현대판 1부2처제를 살았다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워런의 인간적인 매력이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모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그 매력에는 그의 엄청난 재력도 포함될 것이다. 아내 수지조차 비록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에게 상처를 받고 별거까지 단행하지만 그에 대한 존경심만은 버리지 않았다. 이는 ‘아내’라는 법적 제도적 지위는 하나도 누리지 못하면서도 그림자 삶을 자처했던 애스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워런을 찾은 이유는 그가 통이 크고 담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보고 욕심을 내야지 코앞의 욕심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다. 본질을 볼 줄 알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감각도 훌륭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조언을 듣기 원했다. 워런은 기꺼이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는 돈을 추구했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았다. 어릴 때 꾸었던 꿈보다 훨씬 더 거대한 부를 이뤘지만, 거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흘려보냈다. 원칙과 정도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렸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주변엔 사람들이 몰렸다. ‘워런 버핏’이라는 이름에는 흔히 재계의 거물이 주는 위압감 대신 존경심이 먼저 일었던 것이다.
버핏은 삶의 지혜를 많이 얘기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말 중에 압권은 거의 전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면서 한 발표 연설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50년하고 한 달 전에 나는 작은 투자회사를 세우고 기꺼이 동업자가 되어서 나에게 15만달러를 투자한 사람 일곱 명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돈을 맡긴 이유는 자기들보다 돈을 더 잘, 많이 불려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50년 뒤 나는 나보다 돈을 더 잘 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만,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생각은 보통 잘 하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내 돈을 잘 불려줄까’라는 분야에서는 기꺼이 전문가에게 맡기지만 자선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자선과 관련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은 투자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자선은 투자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1930년대에 태어났으니까요. (그것은)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은 훌륭한 분들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 특수한 사회 속에서 (나는) 균형이 치우친 혜택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보다 오래전에 태어났거나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혜택의 양상은 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의 배분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시장경제체제 덕분에 나는 다른 어떤 시공간에서 살 때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나는 재산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하는 보관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왕조시대에서처럼 대를 이어 재산을 물려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삶을 사는 60억 인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아내 수지도 동의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올바른 목표와 훌륭한 철학을 바탕으로 성별과 종교 피부색 지역을 따지지 않고 전세계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자 온 열정을 다해 집중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이 결정을 내리기란 너무도 쉬웠습니다.”
<> 참고도서
‘스노볼’-이 책의 국내 번역서는 1권 1028쪽, 2권 812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원저자의 공력도 공력이지만 번역자의 공력도 대단하다. 분량에 압도되지만 번역이 물 흐르듯 되어있어 읽기가 쉽다. 원고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이 책에서 재인용했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오마하 현인(賢人)’의 솔 메이트 수지 버핏 ② | 2009-10-01 |
[세기의 철녀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① | 2009-09-01 |
[세기의 철녀들] 마릴린 먼로 20세기를 뒤흔든 섹스 심벌 ② | 200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