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로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 중 하나가 결혼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당대 최고 인텔리이자 극작가이던 아서 밀러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두 번 다 불행한 이혼으로 끝났지만 드라마틱한 두 번의 결혼은 당대 매스컴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1941년 ‘56경기 연속안타’로 미국 메이저리그 120년 역사의 ‘3대 기록’ 중 하나를 낸 조 디마지오(1914~1999)는 양키스에 10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긴 선수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는 등 남다른 애국심으로 미국인의 사랑을 받은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경기장 밖에서는 단정한 정장 차림에 뒤로 빗어 넘긴 머리를 한, 조용한 성품을 지닌 신사였다.
먼로가 디마지오와 결혼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강’ 촬영이 끝난 1954년 초다. 이들 커플의 사진과 기사는 전세계 잡지 표지와 신문의 헤드라인, 가십란을 장식했다. 조 디마지오는 서른아홉이었고 먼로는 열두 살 연하였다. 디마지오는 이미 은퇴한 후였고 먼로는 인기가 절정에 달한 시점이었다. 섹스 심벌로 우뚝 서게 한 ‘나이애가라’(1953)가 대성공을 거두고 1953년 봄 ‘가장 인기 있는 배우에게 주는 상’ ‘1952년에 가장 급부상한 배우에게 주는 상’을 연이어 수상한 뒤였다.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으로 먼로는 한국과도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녀는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차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바로 한국으로 달려갔다. 영하의 기온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먼로의 모습은 전세계 잡지와 신문을 도배했다. (지난 7월30일 연합뉴스에는 먼로가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 속 먼로는 대구 K-2 비행장에서 팔공산을 배경으로 갈색 바지와 검은색 항공점퍼를 입고 ‘F-84G’ 전투기 왼쪽 날개 위에 서서 왼팔을 하늘 높이 쫙 편 채 활짝 웃고 있다. 소장자는 미국 한인 교포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와의 관계는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남자들의 눈요깃감이 되는 아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남편은 몇 없을 것이다. 먼로의 인기가 높아갈수록 조 디마지오는 불안했다. 그녀가 자신의 대표작 ‘ 7년 만의 외출’을 찍을 때였다. 지하철 통풍구 위에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 유명한 장면은 1954년 9월10일 새벽 2시 반 뉴욕에서 촬영되었다. 리허설을 하는 동안 무려 열다섯 번이나 치마가 올라가는 걸 직접 보기 위해 1000~4000명의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이틀 먼저 뉴욕에 도착한 디마지오는 바람이 나오는 기계 위에 서 있던 먼로의 치맛자락이 사정없이 휘날릴 때마다 사람들이 “더 높이, 더 높이! ”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분노를 참고 있다가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 호텔이 떠나갈 정도로 난투극을 벌였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이혼을 발표했다.
디마지오와 먼로의 법적 결혼일수는 287일에 불과했다. 비록 결혼기간은 짧았지만, 디마지오의 사랑은 길었다. 먼로는 이혼 후 작가 아서 밀러와 재혼, 이혼을 반복하고 여러 사람과 염문을 뿌렸지만 디마지오는 더 이상 여자를 만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먼로의 장례식도 직접 주관했다. 먼로가 죽은 후에는 2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무덤에 장미꽃을 보냈다. 디마지오는 1999년 3월8일 미 플로리다 주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유언은 “이제 마릴린 곁으로 갈 수 있겠군”이었다고 한다.
디마지오와의 이혼은 먼로의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먼로가 정신적으로 의지한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슨 박사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먼로는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제와 진정제에 의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궁내막증까지 앓고 있었다.
할리우드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먼로는 뉴욕으로 향한다. 심신이 지쳐 있었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고 배우의 연기력을 날카롭게 평하기로 유명했던 스트래스버그를 찾아갔다. 스트래스버그는 먼로가 할리우드의 정체된 작업풍토에 길들어 감각이 많이 무뎌졌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먼로는 연기를 알아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매사 초심자의 마음으로 임했다. 그리고 그녀는 2년여 공백을 비웃듯 1955년 12월, 감독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조건으로 20세기 폭스사와 7년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로 돌아간다.
먼로의 세 번째 남편 아서 밀러는 우리에게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당대 최고의 극작가다. 여러 공식 모임에서 먼로와 교분을 쌓아오던 그는 먼로의 지친 영혼을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로 그들을 사로잡으세요. 그러나 이 게임에서 당신이 상처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심지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먼로는 밀러의 자상함에 강하게 끌렸다. 그는 먼로를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지적 수준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고 섹스 심벌의 이미지가 그녀의 삶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을지도 잘 아는 듯했다. 먼로는 내향적이고 과묵한 밀러를 깊이 사랑했다. 그는 연극계에서 존경받는 극작가였지만 동시에 소년 같은 사람이었다. 잘난 체하지 않고 솔직담백했다. 밀러 역시 정직하고 천진난만한 먼로를 사랑했다.
밀러는 먼로를 만나기 전부터 첫 부인과 파경 직전이었으며 먼로와 가까워지기 전 이미 이혼 상태였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사랑을 불태운 시기는 먼로가 디마지오와 이혼하고 1년여 뒤인 1955년 12월이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 7월 결혼한다.
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이 넘쳤다. 새 인생을 꾸려나갈 것처럼 활기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잠시였다. 먼로가 밀러에게 집착할수록 둘의 관계는 순탄치 못했다. 밀러는 먼로의 연이은 불면증과 수면제 과용, 무기력증에 점점 지쳐갔다.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임신한 지 석 달 만에 유산한 1958년 11월 초부터였다. 먼로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잃자 극도로 절망했고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무너진 자신에 대한 자학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저녁마다 진정제를 지나치게 복용하는 바람에 아침이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에는 이성을 잃고 밀러에게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날이 잦아졌다.
급기야 1959년 8월 발작을 일으킨 먼로는 촬영장에 나오지 못했고 한 달 동안 촬영도 중단된다. 1960년 후반부터 61년 1월까지 먼로는 매우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감정 기복도 심했고 “자살은 인간의 특권”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댔다. “아무래도 우울증으로 죽은 어머니에게 허약한 마음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으며 세상과 담을 쌓았다.
몸의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담낭제거술로 오른쪽 배에 흉터가 생기자 충격을 받았고 가슴도 빈약해지고 엉덩이와 얼굴 살이 처지며 손에 갈색 반점이 생기고 있다며 괴로워했다. 이 와중에 의사는 그녀에게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선고했다. 불면증은 더 깊어져서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밀러는 먼로의 그런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약물과다복용으로 위세척을 하고 누워 있는 일이 잦았던 먼로는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향해 “잔인한 것들이야. 개자식들. 오, 맙소사! ” 같은 비난과 탄식이 섞인 혼잣말을 해댔다. 당시 먼로가 지은 시에는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불안하지만 완강하게 매달려 있는 자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삶.
나는 두 갈래로 나뉜 곳에 서 있다.
강추위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거미집만큼
강하다.
불안하게 매달려 있지만
어쨌든 견뎌내는 거미줄.
언젠가 그림에서 본 색깔을 띤
구슬 같은 빛-아아 삶이여
그들은 너를 속여왔다.
당시 그녀가 그린 그림도 사후 공개되었는데 하나는 교활하면서 관능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초라한 옷에 발목께로 흘러내린 양말을 신은 조그만 흑인소녀를 그린 그림이다. 전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자아이고 후자는 그녀의 어두운 자아다.
먼로는 1962년 8월5일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집 거실에서 벌거벗은 시체로 발견됐다. 당시 부검을 했던 의사는 약물과다복용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했다.
책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에는 리처드 메리먼 기자가 ‘라이프’지에 실은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가 실려 있다. 기사에는 구구절절 그녀가 겪었던 삶의 피로가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우선 먼로는 스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로했다.
“유명해지는 순간, 성숙하지 못한 인간본성들과 마주하게 된다. 인기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유발한다. 그들은 내가 유명하니까 나한테 다가와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사람들의 무의식과 마주친다. 몇몇 배우 혹은 감독들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신문기자에게 한다. 나와 키스하는 것이 히틀러와 키스하는 것 같다는 어떤 배우의 말을 적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 바닥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시기하는 것 같다. …나는 진실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사람들의 환상 속에 머무는 건 기쁜 일이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상품으로 여기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여긴다. …때때로 사람들은 저녁모임에서 내가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하며 나를 초대한다. 나는 순수한 목적으로 초대받지 못한다. 단지 장식품이다.”
그녀가 은둔생활을 할 즈음 이뤄진 이 인터뷰에서 먼로는 인기의 허망함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남들에게 매혹적으로 보이거나 섹시하게 보이는 게 스트레스는 아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스트레스다. …인기라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행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하고는 다르다. 인기로 허기를 채울 수는 없다. 조금 따뜻하게는 해주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지금껏 받은 인기는 언젠가 시들해질 것이다. 인기는 변덕스럽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그래서 그것에 연연하며 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혹자는 먼로를 남성중심주의 사회가 낳은 희생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먼로는 자신의 성공과 야망을 위해 자신의 몸과 성적 코드가 먹혀들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철저히 이용해 마침내 모든 것을 가졌다. 하지만 성취가 주는 것에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있다. 세상과의 접속이 쉬울수록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도 쉽다는 것,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스타’를 꿈꾸는 모든 사람이 져야 할 숙명임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 참고도서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이미지와 환상’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
‘마이 스토리’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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