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발행일: 2011-01-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피는 속일 수가 없었던지 그 역시 고교생 때부터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는다.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하면서 사립학교를 나와 공립학교로 전학했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여학생에 대한 차별과 권위주의에 심한 반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무렵 브라질을 지배하던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단체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20세이던 1967년 브라질 사회당의 급진분파인 노동자당(POLOP)에 가입했다가 얼마 후 무장투쟁 노선을 지향하는 ‘전국해방지휘본부’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 다섯 살 연상의 동료이자 기자인 클라우디오 갈레노를 만나 결혼에 이른다.


대학 시절 전국해방지휘본부(COLINA) 게릴라 요원으로도 활동한 호세프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의식화 교육을 하는가 하면 동료 대원들의 무기를 숨겨주거나 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다 1970년 체포돼 3년 동안 수감됐다. 호세프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테러리스트 활동을 했다”며 트집을 잡는 상대 후보에게 “보다 나은 브라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위해 싸웠다”고 맞받아쳤다.


그에게 감옥은 또 하나의 학교였다. 수감돼 있는 동안 경제학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경제학에 빠져들었고, 이는 급진좌파에서 복잡한 현실을 인정하는 중도좌파로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된다. 출소 후에는 포르토 알레그레 연방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가 졸업한다.


석방 후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변호사이자 게릴라 요원이던 카를로스 아라조와 재혼해 딸을 낳았다. 하지만 1994년 남편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잠시 별거에 들어갔다가 2000년 다시 이혼한다.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0년 민주노동당(PDT)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 처음에는 경제자문역을 맡았으나 1985년 포르토 알레그레 시 재무장관에 기용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이어 주 정부 에너지 장관에 발탁된다. 당시 전력난에 허덕이던 지역에 “절약하라”고 하는 대신 민간기업을 끌어들여 1000㎞에 달하는 전력선을 깔고 댐과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력난을 해소했다.


중앙정치 무대로 나간 것은 2001년. 룰라가 창당한 노동자당(PT)에 입당하면서 이듬해 대선 때 룰라 캠프에서 에너지 관련 자문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룰라 정부가 출범하면서 광산 및 에너지부 장관에 기용된 후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의 성공적인 기업공개로 룰라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2005년에는 집권당의 부패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처한 룰라를 전면에 나서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의 총리직에 해당하는 수석장관에 임명돼 2010년 3월 노동자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에 이른다.


브라질 언론매체 ‘이코노미인사이트(Economyinsight)’는 지난 10월1일자에 당시 대선후보 신분이던 호세프와 한 인터뷰를 장문의 기사로 실었다. ‘남미로닷컴’은 인터뷰 전문을 번역해 올렸는데, 여성으로서 호세프의 정체성과 정치철학을 짐작게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다음은 필자가 이 인터뷰를 임의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 브라질 역사상 최초로 여자 대통령이 탄생할 경우 예상되는 변화는.


“브라질에서는 여권(女權)의 역사가 거의 없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00년도 채 안 되는 최근의 일이다. 여전히 심각한 성(性)불평등이 존재한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음에도 여성은 남성 임금의 3분의 2를 받는다. 가정폭력도 여전하다.”


▼ 정치에 여성적인 방식이 존재하나.


“여성은 누군가를 보살피고, 음식을 제공하고, 격려해준다. 이것을 공적인 생활에 적용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여성은 인구의 52%다. 나머지 48%는 여성들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면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할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정반대가 아니다.”


▼ 예전에 당신은 페미니스트였다.


“초기(젊은 시절)에는 그랬다. 어떤 사실을 주장하게 되면 강한 영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깨닫게 하려면 이런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어떤 여성 정책도 남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역설적이게도 당신에 대한 여성 유권자의 지지율이 낮다.


“정치학자 마르쿠스 코임브라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여성이 남성만큼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없다고 했다. 많은 여성이 아직 나를 모른다. 나를 아는 여성 그룹과 모르는 그룹을 따로 나눠 지지율을 조사해보면 다른 후보보다 앞설 것이다.”


▼ 룰라 정부의 특징은 포용정책이었다. 호세프 정부의 특징은.


“이전과 같이 포용정책이 핵심이다. 브라질은 아직 심각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신흥개발국이다. 따라서 GDP 성장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내 목표는 가난을 뿌리 뽑아 극빈층을 더 많이 중산층으로 이끄는 것이다. 또 교육이 중요하다. 우선 교육의 중심에 있는 교사가 최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게 문제다. 높은 수준의 교육이 없다면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없다. 기술자, 과학자, 수학자 등 인재를 키우지 않으면 충분히 성장할 수 없다.”



(실제로 브라질의 교육 문제는 난제다.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OECD의 2006년 국가별 학력평가보고서(PISA)에 따르면 브라질 학생들은 전체 57개국 중 과학 52등, 수학 53등으로 거의 꼴찌다. 브라질 사람들의 평균 교육기간은 6.2년(한국은 11년)에 불과하고 초중등학생의 30%가 유급을 당하며 학생들이 실제 참여하는 평균 수업시간은 하루 3시간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15세 학생의 60%가 문맹이며 중학교 졸업자의 60%가 기본적인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한다. 교사들의 봉급 수준은 2007년 기준 다른 직업의 평균 61%에 불과하다. 초등학교 교사의 20%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으며 교사들의 결근율도 높아 북부지방의 경우 교원의 40% 정도가 평균 일주일에 한 번은 결근한다고 한다).

 

 

▼ 가난을 뿌리 뽑겠다고 했는데, 응용경제연구소(IPEA)에 따르면 브라질의 극빈층 근절은 2016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극빈층은 소득이 최저임금의 4분의 1이 못 되는 사람들이며, 빈곤층은 최저임금의 절반 정도를 받는 사람들이다. 2003년에 빈곤층은 7780만명이었으며, 룰라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5300만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에 극빈자 역시 3740만명에서 1960만명으로 줄었다. 이들 극빈층을 없애야 한다. 물론 빈곤층 2400만명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꼭 내 재임기간 안에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며 2014년까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긴장감이 없다. 빈곤 퇴치는 룰라 정부에 이은 지속적인 정책 의제다.”


▼ 당신은 현존하는 여성 리더인 미첼 바첼레트(전 칠레 대통령)와 마거릿 대처(전 영국 총리) 중 누구에 가까울까.


“두말할 나위 없이 바첼레트다. 내겐 대처와 같은 보수주의적 성향이 없다.”


▼ 하지만 ‘철의 여인’(마거릿 대처)처럼 보인다.


“그건 고정관념이다. 모든 여자가 철의 여인이지 않나? 나는 한번도 ‘철의 남자’를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혹시 보았나?”


▼ 당신은 삶의 고난 때문에 갑옷을 입게 된 여성처럼 보인다.


“역시 터무니없는 고정관념이다. 껍데기 없이 살아남은 곤충이 있다면 내게 보여달라.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무척 비슷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거나 분리하고 또 그들에게 마음을 열기도 한다. 수석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감동에 북받쳐 울었지만 하루 종일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운다. 나는 지금 아주 멋지게 살고 있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자식도 있다. 전 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낸다. 난 내 인생을 사랑한다.”


 

 


<> 참고도서


● 일요신문 2010년 11월8일자 ‘호세프의 삶’(김미영 해외작가)


● 남미로닷컴


●‘신이 내린 땅, 인간이 만든 나라’(김건화 지음)


● 브라질 역사 정치 문화(이성형 편집)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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