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들은 제인만 보면 도망쳤다. 90m 정도까지 접근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제인은 우선 침팬지들이 내는 소리에 주목했다. 소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지 식별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잠자기 전에 어디에 잠자리를 만드는지, 어떻게 만드는지도 관찰했다. 잠자리에 직접 들어가 누워보기도 했다.
그리고 쉬는 자세, 이동 방식, 털 고르기, 교미, 먹이 먹는 법 전부를 적었다. 한 군집과 또 다른 군집 사이의 거리를 재느라고 몇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일단 각각의 침팬지들을 구분할 줄 알게 된 뒤로는 일일이 이름을 붙여줬다. 제인은 그들 각각을 연극의 등장인물을 외우듯 마음속에 기억해두고 각각의 행동과 상호반응, 동작을 기록해뒀다. 제인은 점점 침팬지들에 익숙해져갔다. 당시 제인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젠 이곳 침팬지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어디로 가야 녀석들을 만날 수 있는지도 알게 됐고, 어떤 녀석은 딱 보면 누가 누군지도 알아요. 진짜 못생긴 어미 침팬지 소피랑 그 아들 소포클레스도 알아볼 수 있고요, 털이 희끗희끗한 늙은 노부인도 알아볼 수 있어요. 이젠 그 녀석들도 제가 익숙한가 봐요.”
제인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침팬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캠프에서는 이따금씩 침팬지들이 머뭇거리며 하나 둘 제 발로 찾아드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제인은 잘 익은 바나나를 바닥에 놓아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덩치 큰 침팬지가 바나나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껍질까지 전부 먹어치웠다. 아프리카에서 침팬지 연구를 시작한 이후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곰베에 도착한 지 4년 만인 1964년, 마침내 제인 구달을 명실상부 과학계의 스타로 만든 역사적 관찰을 하게 된다. 침팬지도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 결정적 순간을 제인은 이렇게 기록했다.
“흰개미 둔덕에서 한 침팬지가 물체를 집어 주둥이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뭔가를 먹고 있었다. 어느새 뒤로 돌아앉아 나를 마주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 후 다분히 의도적으로 굵은 풀줄기 하나를 뽑아 약 1.3m 길이로 잘랐다. (…) 그러고는 다시 둔덕 아래로 내려와 한동안 내 쪽을 응시하다 비탈 아래로 사라졌다. 5분 남짓 지났을까. 나를 발견하고 사라진 게 아닐까 싶던 찰나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태연히 내 앞을 지나쳐 다시 멀어졌다.
잠시 후 걸음을 멈추더니 왼손을 뻗어 아래 가지를 잡고 일어서서 주위를 살폈다. 뒤돌아서서 곧장 이쪽으로 온 것으로 보아 마음이 바뀐 게 분명했다. 걸어오는 동안 좌우로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는데 걸음걸이가 활기차 보였다. 침팬지는 나를 보더니 얼어붙은 듯 돌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화들짝 놀란 표정이 확연했다.”
며칠 뒤 제인은 같은 곳에서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어 흰개미를 먹는 모습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침팬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둔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잠시 후 자리를 잡고 앉더니 계속 흰개미를 먹었다. 줄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조금이나마 더 잘 볼 수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줄기를 땅속으로 밀어 넣었고 잠시 후 흰개미가 잔뜩 달라붙은 줄기를 빼냈다. 줄기를 주둥이로 가져가 가운데 지점부터 입술로 훑자, 줄기 길이만큼 흰개미가 떨어져 나왔다. 한 번씩 둔덕 입구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매번 한 입씩 가득 채워 우물우물 씹었으며, 다시 꼬챙이를 빼낼 때에 맞춰 입을 미리 벌리고 앉아 있기도 했다.”
곰베에서 만난 침팬지들은 제인에게 더는 ‘짐승’이 아니었다. 분별력과 사고력은 물론, 인간 못지않게 흥미롭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생명체였다. 침팬지가 육식을 하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이 엄청난 사건은 곧 무선 전보를 통해 내셔널지오그래픽협회 워싱턴 본부로 타전됐다.
‘제인 구달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침팬지가 단지 육식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때로 격렬한 춤을 춘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업적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침팬지가 각기 개성을 지닌 능동적이고 의지력이 있는 존재이며, 그들 역시 우리 인간과 비슷한 지적(知的) 세계에서 살며, 인간처럼 자아, 애정, 고통, 죽음의 신비로 가득 찬 강렬한 정서적, 정신적 세계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제인이 이룬 관찰 결과물들은 각종 학회에 발표됐다. 여자라서, 비전공자라서, 그리고 이전에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방법이기에 무시됐던 제인의 관찰법은 바야흐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대중도 열광했다. 침팬지들의 매력이 미디어로 공개되면서 스릴 만점의 오락, 교육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제인은 미모인 데다 솔직하고 거침이 없는 성격이라 주변에 남자가 많았다. 결혼 전 제인은 어린 남자보다는 연배가 있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곤 했다. 대화거리도 풍부하고 생각에도 깊이가 있어 연륜과 진중함이 느껴졌기 때문. 부성 결핍에 따른 심리적 동경이기도 했다.
그의 멘토이던 루이스 관장도 한때 제인을 여자로서 갈구해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다행히 루이스는 아버지 같은 사랑을 하기로 하고 실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둘의 관계를 사제관계로 이어갈 수 있었다. 숱한 연애와 한 차례의 파혼을 겪은 뒤 그가 첫 결혼(1963년)을 한 남자는 자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휴고였다.
휴고는 미남이고 매력적이며 재담꾼이었고, 제인과는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야말로 제인과 꼭 맞는 솔메이트였다. 하지만 몇 년 뒤 제인이 점점 명성을 얻어가고 휴고는 그에 비해 이렇다 할 성취를 얻지 못하자 결혼생활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제인은 곰베 연구소장으로 1년이면 8~9개월을 곰베에 머물렀다. 제인의 평판은 미국에서는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해외명예위원 선임을 알리는 위촉장까지 받은 터였다. 그럴수록 휴고의 좌절이 커졌다. 제인이 펴낸 ‘인간의 그늘에서’는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가 4주 연속으로 소개하는 기염을 토한 데 비해 휴고가 낸 사진집 ‘무고한 살육자’는 통 주목을 받지 못했다. 휴고는 남자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에게 제인은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여자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두 사람이 함께한 데는 동물과 동물행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세월을 지나오며 점차 서로의 삶에서 함께 기뻐하고 의견을 나누는 부분이 없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예를 들면 제인은 클래식 음악이나 시를 좋아했지만 휴고는 이런 데 전혀 흥미가 없었다. 제인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흥미에 대해서도 휴고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두 사람은 결국 1972년 별거에 들어갔다. 아들 에릭을 키우는 것은 제인이 맡았다. 제인은 두 번째 결혼도 행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남편은 매사에 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답답하게 그를 짓눌렀다. 심지어 제인이 친구를 사귀고 자신이 관여되지 않은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결혼생활 몇 년 만에 암으로 훌쩍 세상을 떠났다.
제인 구달은 고졸 학력으로 침팬지 관찰을 시작해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에 들어가 학위를 딴 집념의 소유자다. 물론 그 과정에서 루이스 리키 관장의 추천과 그녀의 성취에 대한 학계의 인정이 밑바탕이 되긴 했지만, 학력을 단지 자격조건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진정한 공부라는 데 의미를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학력이란 게 ‘스펙’(취업을 위한 자격조건)을 따기 위한 공부에 지나지 않는 요즘 시대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면서 공부를 병행한 제인의 삶은 여러모로 울림이 크다.
그의 침팬지 연구는 역설적으로 돌아보면 인간에 대한 탐구였다. 그의 평전 부제처럼 ‘인간에 대한 재정의’였다. “침팬지도 사람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나눠주고 분노하고 질투한다. 그러니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 운운하며 자연을 그저 이용과 도구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오만을 버리자”는 게 그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은 그를 투사로 변신시켰다.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유인원을 무차별로 남획하는 밀렵꾼들과의 투쟁이 시작되면서 환경운동가라는 제2의 삶을 살게 된 것.
“태양이 지평선 위로 사라지기 바로 직전, 데이비드(침팬지)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혼에 비친 내 그림자가 그와 만났다. 훗날 나는 가장 뛰어난 지능을 지녔다는 인간만이 침팬지 위로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즉 총을 소유하고 주거지와 경작지를 확장함으로써 오직 인간만이 야생 침팬지의 자유로운 모습 위로 운명의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이다.”(제인 구달 ‘인간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제 그는 은백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초로의 할머니가 됐다. 그러나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나이를 초월한 사람 같다고 말한다. 사석에서 말할 때의 목소리와 강단에서 말할 때 목소리 크기가 다르지 않고, 어느 자리에서나 조용하고 도드라지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늘 자애롭고 평화로운 미소와 말투가 만나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고 한다.
어떤 땐 동물이 사람보다 더 순수한 영혼을 가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 파렴치와 무례, 사기와 거짓말이 범람하는 사회다. 한때 제인 구달 역시 인간에 대한 절망 때문에 괴로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내가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고 한마디씩 한다. 명상을 하는지, 기도를 하는지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환경 파괴와 인간 고통에 직면해서도 낙관적일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희망의 근거는 열렬히 간청하고 기도하면 개입해주는 신(神)에게 있지 않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일에 개입해야만 한다. 진정한 희망의 이유는 인간의 잠재력과 행동 속에서 찾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희망의 이유는 구체적이다. 첫째, 인간의 두뇌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이며 둘째, 자연의 놀라운 회복력이며 셋째, 젊은이들의 위대한 창조적 에너지, 그리고 마지막은 불굴의 인간 정신이다.”
그는 9월29일 피터 크레인 미국 예일대 산림생태대학원장,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와 가진 특별대담에서 “50년 전 탄자니아행을 택한 모험에 후회는 없나”라는 질문에 “선택이라기보다 운명이었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어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걸어 가겠느냐”고 묻자 “물론 예스(Yes)”라고 했다.
<> 참고도서
●‘제인 구달 평전’(지호)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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