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美 첫 여성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②

발행일: 2010-12-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펠로시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여자대학이던 워싱턴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한다. 전공으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지만 트리니티 대학에서 정치학을 택하려면 역사를 전공으로 택해야 했다. ‘정치학이 없는 역사는 열매가 없는 것이고, 역사가 없는 정치학은 뿌리가 없는 것’이라는 게 그 학교 학풍이었다. 펠로시는 트리니티 대학 학풍이 자신의 정치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미국의 건국 헌법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리더십의 특징에 대해 배웠다. (…) 비전, 판단력, 추진력, 국민에 대한 존경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지적으로 설득력 있는 호소를 한다 해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이 필수적이다. 대통령이 비전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으면 직관적으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다. 리더십의 이런 면에 대해 배우는 동안 나는 여성들이 뭔가를 결정하고 누군가에게 충고할 때 강한 직감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펠로시 자서전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 중)


그는 당초 대학을 졸업하면 로스쿨에 가려 했다. 어머니의 말처럼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가정에 정착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인생에선 늘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나는 법. 그는 동급생 폴 펠로시와 사랑에 빠져 나이 스물셋이던 1963년 9월7일 결혼하면서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자의식이 강한 젊은 여성 펠로시의 삶은 이내 남편과 아이들 위주로 움직였다. 자신을 위한 시간은 오직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뿐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잠들면 세탁기 앞에 주저앉아 ‘뉴욕타임스’를 정독하는 것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이사를 갈 때마다 펠로시가 남편에게 유일하게 고집을 피운 일이 ‘뉴욕타임스 구독’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로스쿨에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의 하루는 여느 전업주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침대와 방 정리를 시키고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기 전에 신발과 교복, 치아를 검사한다. 아이들 머리를 땋을 것인지 하나로 묶을 것인지가 늘 고민이어서 어느 날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딸아이 머리 한 쪽은 땋은 채로, 다른 한쪽은 그냥 묶은 채로 보낸 날도 있다. 저녁을 먹은 뒤엔 도시락과 다음날 아침을 준비하고 그 다음에는 불을 끄기 전까지 아이들 숙제를 도와준다.”


그러나 펠로시는 육아 경험이 자신을 단련한 가장 강한 무기였다고 떠올린다.


“아이 키우기는 힘든 일이다. 정치에서도 많은 위기 상황이 펼쳐지고 그런 시간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만, 나의 경험으로 볼 때 가장 어려운 일은 가족을 보살피는 일이다. 그것은 물론 기쁨이기도 하고 좋은 기억이 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압도당하는 일이다. 그리고 쉼 없이 지속되는 일이기도 하다. (…) (그러나)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런 훈련을 거치면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게 된다.”


“가끔 젊은 여성들은 내게 인생에서 무엇이 옳은 길이고 최고의 경로인지 묻는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것인지, 경력을 쌓기 위해 결혼이나 육아를 미루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들이 옳은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옳은 길’이나 ‘최고의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단지 ‘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비록 몸은 아이와 남편, 가정에 묶였다 해도 펠로시는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단지 생각만 하는 데에서 벗어나 1966년 중간선거 때는 유모차를 밀면서 자기 지역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를 위해 전단지를 뿌리는 자원봉사를 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첫 ‘공직’이 주어진다. 시 도서관 운영위원이었다. 이웃사촌이던 샌프란시스코의 시장 부부로부터 받은 제의였다.

 

 

펠로시가 정치인생을 남을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 번도 민주당 대표가 되겠다거나 하원의장이 되겠다거나 하는 꿈이나 목표를 가진 적이 없다.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기여한 노력과 열정을 높이 산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제안을 받으면서 정치 인생을 걸어왔다.


취미로 하던 정치활동의 터닝포인트라고 한다면 197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이자 남편의 친구인 제리 브라운(지난 11월 중간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해 공화당의 강력한 후보인 이베이 CEO 멕 휘트먼을 제치고 72세 고령에 다시 주지사에 당선됐다)을 도운 일이다. 당시 브라운은 뒤늦게 대통령 출마를 준비 중이었는데 펠로시는 그의 선거 캠프에 참가해 그를 열심히 도왔다.


덕분에 1976년 가을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의장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캘리포니아 주의 민주당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주의 정당이다. 펠로시는 당시 당에서 인정받는 2명의 쟁쟁한 인물을 제치고 이듬해 캘리포니아 주 북부지역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2년의 임기를 2번 마치고 주 의장직 선거에 출마해 역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데 이어 민주당 연방위원회 의장에 올라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는 하원의원에 출마해 본격적으로 워싱턴 무대에 뛰어들게 되는데 그 계기는 뜻밖에도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1987년 1월 캘리포니아 주 출신 여성 하원의원이자 절친한 친구인 살라 버튼이 “병이 너무 심각해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면서 펠로시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면서 출마를 권유한 것. 펠로시는 유언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청에 따라 하원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펠로시가 하원의원직에 나설 때 가장 큰 걱정은 막내딸이었다고 한다.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펠로시가 딸에게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했더니 딸은 “엄마 인생을 사세요”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6주일 만에 조직을 만들고 추천서를 정리하고 100만달러를 모았다.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자 경쟁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중에는 평소 친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선거에 뛰어든다는 것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개인과 가족에게 큰 희생을 의미한다. 펠로시 역시 험한 선거판에서 비방에 시달릴 때마다 ‘과연 정치가 나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를 자문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힘을 준 것은 ‘내게도 가치 있는 일이고 국가에도 필요한 일’이라는 확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원의원이 되는 첫 선거에서 4000표 차이로 승리했다. 아버지에 이어 부녀 하원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의회에 입문한 초기, 그는 에이즈 소위원회를 시작으로 주로 인권 문제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건분과위에서 일하면서 유방암과 에이즈 예방·치료를 위한 기금을 늘리고 국립보건원 예산을 2배로 늘렸다. 이밖에 윤리위, 정보위에서도 일했다.


민주당은 1996년과 1998년 중간선거에서 계속 패했다. 펠로시는 그 고비 고비마다 위기의 민주당을 구할 리더로 떠올랐다. 2000년 선거 때 첫 여성 원내부대표가 됐으며 2004년엔 대표가 된다.


그동안 미국 여성들의 정치 참여도 빠르게 성장했다. 펠로시가 하원의원이 됐을 때 전체 하원의원 435명 중 여성은 20명에 불과했지만, 그가 의장이 됐을 때는 민주당 54명과 공화당 20명 등 74명으로 늘었다.


“나는 더 많은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길 바란다. 투표를 하는 것이든, 후보자를 위한 선거 운동이든, 직접 출마하든 상관없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관료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세계적으로 22%다. 미국도 17%밖에 안 된다. 국방, 경제, 교육, 의료보험, 에너지, 환경보호 등 오늘날 모든 쟁점은 여성과 관계되는 문제들이다.”


펠로시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을 법률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원의장이 됐을 때 처음 제정한 법 중 하나가 의회 의사당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펠로시라고 소수자인 여성으로서 겪는 외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의원이 됐을 때 의회 경비원조차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몇 번이나 출입을 거절당했다. 그나마 나는 예전보다 나았다. 한 여성 의원은 처음 위원회에 임명되어 들어가던 날 위원장으로부터 ‘더 이상 여자(broad)는 필요 없는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1973년 패트 쉬레더가 군사위원회에 임명됐을 때 의장은 아예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펠로시는 남자들을 적이 아닌 우군으로 대했다. 여성을 대하는 진보적 변화는 여성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깨인’ 남자들 도움 덕분이기도 하다는 것이 펠로시의 철학이다. 하원의장이 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자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의회에 온 것이 아니다. 국가의 정책을 바꾸러 왔다. 몇몇 남성 의원이 여성 의원들을 존경해 태도를 바꾼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내 목표는 아니다. 나는 동료 의원들에게 많은 것을 묻고 상의하겠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남성 의원들에게 ‘출산’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성인) 내가 잘 안다. 나는 남녀를 떠나 동료 의원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이 여성 하원의장을 선출함으로써 미국의 유산이자 희망인, 평등이라는 이상이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펠로시는 자신이 정치에 몸담게 된 것 자체가 ‘어머니 역할의 확장’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내이고 엄마이며 할머니다. 내가 다섯 아이의 엄마이고 지금은 할머니가 된 것 이외에 아무 일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내 인생을 행복한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족을 보살피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엄마와 주부로서 얻은 지혜가 얼마나 귀중한 경험인지를 여성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펠로시는 “집안에서 살림만 한다고 스스로를 낮출 게 아니라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 엄마, 이모, 고모, 숙모로서, 조언자로서, 다음 세대에게 시간과 사랑을 투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여성들의 힘과 자신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전업주부일 때, 사회가 주부들을 ‘가정의 엔지니어(domestic engineer)’라고 불러준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리라는 농담이 있었다. 여성들이 ‘직업이 뭔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그냥 가정주부예요’라고 답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너무 슬펐다. 그냥 가정주부? 내가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엄마가 되는 것과 집안일에 대한 경험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한 명당 한 번씩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 참고도서


●낸시 펠로시 자서전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 외 신문기사 다수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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