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엄마 역할의 확장”
《전업주부로 5남매를 키우다 마흔을 훌쩍 넘겨 정계에 입문, 미국 선출직 중 최고위직인 하원의장에 오른 낸시 펠로시. 공화당의 대반격으로 3년 만에 물러났으나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으로서 그가 미국 정치사에 새긴 흔적은 남다르다. ‘진보적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선입관과는 딴판으로, 그에게 가장 든든한 지지기반은 가정이었고 남성은 적이 아니라 우군이었다.》
지난 11월2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의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민주당 소속의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70)가 물러났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면서 미국 정치사에서 첫 여성 하원의장이 된 지 4년 만이다.
‘표’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의 운명도 연예인의 운명처럼 부침이 심하다. 화려하게 주목받던 펠로시의 퇴장을 뒤로하고 새 하원의장이 된 공화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60)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니 말이다. 미국 하원의장은 선출직으로선 최고위직이며, 정·부통령 유고시 미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서열 3위의 막강한 자리다.
4년 전 ‘또 하나의 유리천장을 깼다’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펠로시가 이번에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어 새삼 권력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존 베이너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언론매체들은 ‘베이너가 오하이오 주 벽촌에서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웨이터 일을 하며 플라스틱 제품 회사 판매사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근로계층’의 대표적 인물인 데 비해 펠로시는 명품 의상과 보톡스 시술로 요약되는 캘리포니아 부유층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며 조롱에 가까운 비교를 했다. 그러면서 ‘부잣집 마나님이 미국의 근로계층·소수계가 주요 지지기반인 민주당 하원을 지휘하던 시절이 지나고, 벽촌·근로자 출신이 부자와 친(親)기업적 성향의 공화당 하원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펠로시는 선택받은 특권층의 삶을 살았다. 시장(市長)을 12년이나 지낸 하원의원 출신의 정치인 아버지와 엘리트 어머니, 그리고 부동산 재벌로 알려진 사업가 남편을 두고 이렇다 할 어려움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다. 남편 폴 펠로시는 샌프란시스코 등 캘리포니아 지역에 부동산을 갖고 있으며, 나파밸리(캘리포니아에 있는 고급 포도주 생산지역)에 500만~2500만달러 상당의 와이너리 및 리조트 호텔, 이탈리안 레스토랑 체인, 골프장 등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UFL(미식축구 리그)의 ‘캘리포니아 레드우즈’팀 구단주를 맡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펠로시는 아버지나 남편의 도움으로 정치가가 된 것이 아니다. 물론 거물 정치인 집안에서 자란 유전자적 소양과 부모, 남편이 떠받쳐주는 상류층 네트워크가 성공을 가져다준 요인이긴 해도 그가 정치에 뛰어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 과정은 본질적으로 스스로의 노력과 열정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그의 진정성을 동료의원들도 잘 알기에 그에게 민주당의 수장 자리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그것도 평상시도 아닌 연방의회 상·하원의 주도권을 모두 잃어버린 비상상황에서 당을 구할 지도자로 펠로시 의원을 하원의장으로 뽑은 이유는 그가 자타가 인정하는 ‘조직의 귀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특출한 솜씨가 있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1987년 그가 처음 의회에 진출한 것도, 원내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것도 자금력 덕분이었다. 2002년 11월 중간선거 때는 다른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100만달러가 넘는 거금을 선뜻 당에 내놓기도 했다. 1995년부터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맡은 게파트 의원은 “펠로시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그리고 자기 지도력 덕분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자가 주목한 것은 정치인으로서 펠로시의 성취보다는, 그가 결혼해 5남매를 두고 전업주부로 지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정계에 입문했다는 점이다. 펠로시의 꿈에 정치인이 되겠다는 것은 없었다. 다만 살림을 하면서도 신문을 정독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면서 사회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이런 열정이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전업주부의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며 지내고 있을지 모를 여성들에게 그의 도전적인 삶은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준다. 펠로시는 2007년 하원의장 취임선서에서 “개인적인 승리라기보다 모든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고 느꼈다”고 말해 여성 멘토로서 많은 생각을 해왔음을 내비쳤다.
펠로시의 아버지는 볼티모어 시장을 12년 동안 역임한 토머스 달레산드로 2세로 메릴랜드 주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 뉴딜(New Deal)주의자이자 민주당원이었다. 펠로시의 친·외조부모는 모두 이탈리아 베니스와 제노아, 시칠리아에서 이민을 왔다. 그의 부모는 볼티모어의 ‘작은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자랐다. 우리로 치면 미국의 ‘한인 타운’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펠로시 가족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애국심이 강하고,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는 혈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확고한 민주당 지지자들이었다. 그는 “‘작은 이탈리아’에서 자라는 동안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져다주는 활력에 감명 받았다. 그들은 용기와 낙천성, 가족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 이민자들이 미국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것은 미국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됐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라고 회상했다.
펠로시는 위로 오빠만 여섯이다. 부모가 내리 아들만 낳은 뒤 막내이자 외동딸로 펠로시를 낳은 것이다. 남자들 틈에서 귀여움도 많이 받았겠지만 막내인데다 여자가 하나뿐이다보니 무시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펠로시는 자기주장이 강해 여간해선 오빠들한테 지지 않았다고 한다. 연설에도 능하고 핸섬한 용모를 지닌 아버지는 정치에서 여성의 역할이 커지고 있음을 높게 평가한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였지만, 가족에 대해서만은 보수적이어서 펠로시가 10대 시절 긴 머리를 자르는 것마저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한다.
펠로시의 어머니는 결혼 후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로스쿨을 다닐 정도로 ‘깨인 여성’이었으나, 세 자녀가 동시에 백일해에 걸리자 공부를 중단했다. 집안 살림을 하면서도 ‘벨 벡스(Velvex)’라는, 얼굴에 수증기를 쐬게 해 모공을 넓힌 뒤 화장품 흡수가 잘되게 하는 미용기구를 개발해 특허를 내기도 했다. 결혼생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일을 통한 자아실현에 대해 늘 아쉬움을 품었던 어머니는 어린 딸 펠로시에게 “재능과 능력을 갖춘 여자들은 일찍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펠로시가 여성과 일에 대해 일찌감치 자각하게 해준 동력이 됐을 것이다.
어머니는 한때 펠로시가 수녀가 되기를 바랐다. 똑똑한 딸이 세상에서 받을 마음의 상처와 실망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모정의 발로였으리라고 펠로시는 회고한다. 펠로시는 어머니가 ‘수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제 인생은 저의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식으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막상 자신이 엄마가 돼 “일이 바빠 너희들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게 돼 미안하다”고 했을 때 아이들로부터 “엄마, 우리는 친구들과 지내는 게 좋아요. 우리는 대학에 다니고, 엄마는 의회에 다니세요”라는 말을 들었다며 서운해했다.
어릴 적 그가 정치를 통해 배운 것은 ‘연민’이었다고 한다. 펠로시의 집은 늘 ‘울타리가 없는 집, 언제나 열려 있는 집’이었다. 아버지가 시장이 된 후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원했고, 또 어떤 이들은 시립병원에 입원하기를 원했으며, 주택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단지 먹을 것을 달라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을 대하는 어머니 역시 공직자나 다름없었다. 보수를 받거나 선거에서 뽑혀 일정한 직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남편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청탁 거리를 갖고 방문하면 어머니는 그것을 노란 종이에 써서 서류철에 넣어두고, 훗날 그 사람이 잘되면 누군가 비슷한 요청을 하는 사람이 왔을 때 그 종이를 꺼내 잘된 사람에게 연락, 새로운 사람을 돕게 했다고 한다.
펠로시는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친구의 어머니가 남은 음식을 다시 그릇에 모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식탁에서 이런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볼티모어시 노트르담 여학교(the institute of notre dame)에서 공부했다. 이곳은 독실한 가톨릭 학교로 ‘봉사를 신앙생활의 일부’로 교육했다. 모두 수녀였던 선생님들은 ‘궁핍하고 아프고 상처 받기 쉬운 이들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가르쳤다. 학교 현관에는 ‘학교는 감옥이나 운동장이 아니다. 시간이고 기회다’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펠로시는 이처럼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뒷날 그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치무대에서 유난히 반전이나 인권 문제에 관심을 쏟은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 스스로 “일찍이 종교적 세례를 받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들이 인생의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어떻게 종교에 의지하는지 알게 된 것은 삶과 정치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던 펠로시 가정에도 불행이 있었으니, 펠로시의 오빠 중 하나가 세 살 때 폐렴으로 죽고만 것이 그 하나다. 어머니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기도의 힘으로 이겨나갔다. 어머니는 종교적인 믿음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것으로 확장했다. 이를테면 당시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감옥에 갇혀 있던 헝가리의 요제프 민첸티 추기경 석방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펠로시는 하원의장 취임식장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가 하원의장이 되길 바라며 키우지 않았다. 내가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부모의 최고 양육 기준은 ‘성스러움’이었다고 한다.
②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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