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로마인 이야기’ 15년 투혼의 女帝 시오노 나나미 ②

발행일: 2010-09-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시오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그가 대단한 멋쟁이라고 전한다. 늘 고급 정장 차림에 화려한 액세서리로 단장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좋은 향수 냄새를 풍긴다. 한마디로 대단히 여성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관심의 대부분은 ‘남자’다. 그는 아예 “나는 여자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내가 여자니까. 나의 관심은 남자다. 남자의 세계에서도 특히 가장 남성적이라 할 전쟁에 관심을 쏟은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로마의 역사도 멋진 남자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이야기로 읽어낸다.


그는 영화광이기도 한데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영화 에세이집에서 자신의 남성관을 이렇게 적고 있다.


“30년 전 대학 여자 동급생들이 생각하는 결혼상대란 오너의 아들이거나 도쿄대 법학부 아니면 게이오대 경제학부, 사법고시나 외무고시, 행정고시 합격자였다. … 나는 그녀들보다 내가 훨씬 더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폭이 넓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민이라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훨씬 더 좁았다. 일류대학 일류학부에 입학하는 것이나 외교관이나 변호사나 관료가 되기 위한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두뇌가 있고 공부하는 방법만 알고 있으면 대부분 남자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품위 있는 행동이라든지, 유머 감각이라든지, 절묘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모든 일에 대처하는 능력은 시험으로 측정될 수 없는 자질이다.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다는 말이다. 대학 시절 나는 동급생들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것을 남자에게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남성관을 피력한 ‘남자들에게’란 책에서 이른바 인텔리 남자들이 섹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보강 정도밖에 안 되는 것(즉 본질이 아닌 것들)’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인텔리 남자들)에겐 하찮은 것을 하찮은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없다. 무슨 일이 터졌을 때 그럴듯한 이유를 얼마나 잘 생각해내느냐에 전력을 집중한다. 또 욕망은 있으나 그것이 콩알만하다. 정치가가 뭐라 부추기면 창피할 정도로 홀랑 넘어가고, 재계의 어느 위인이 접대해준다고 하면 기생보다 먼저 뛰어간다. 기생은 화대라도 받지만 인텔리는 하루 저녁 얻어먹을 뿐인 것을. 이런 궁상이 어디 있을까. 그들이 무언가 자기 맘의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 권력이 필요하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이용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건 봐주기 힘든 꼴불견이다.”


그러면서 지식인들은 지금 세상의 어디가 잘못돼 있는지에 대해 비판을 하라고 하면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는 구체적인 제안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와 지식인의 차이다.



그가 좋아하는 남자란 한마디로 ‘스타일이 있는 남자’다. 스타일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다. 강한 신념을 가리킨다. 깊이 있는 인격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남자다.


그는 ‘남자들에게’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나이, 성별, 사회적 지위, 경제상태 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윤리, 상식 등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독자적이고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참된 용기를 가진 자라고 해도 좋다 ▲궁상스럽지 않은 사람. 육체적으로 멋있지 않아도 비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면 곤란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인간성에 부드러운 눈을 돌릴 수 있는 사람. 속된 말로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라, 진짜 휴머니스트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남자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시오노는 자신의 ‘이상향’을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남자라고 말한다. 미국의 영화배우 게리 쿠퍼와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300년 후에 나타나 로마제국의 설계도를 만든 인물이다. 시오노는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란 책에서 자신이 아들에게 들려준 말을 그대로 소개한다.


“게리 쿠퍼와 카이사르에겐 많은 공통점이 있어. 비쩍 마른 몸에 키가 크고 볼에는 세로로 주름이 잡히고 꼿꼿한 자세에 몸놀림이 우아하고 유머도 있고 광신적인 점이 하나도 없어. 하지만 근본적인 점에서 달라. 쿠퍼는 ‘위대한 평범’을 가진 사람이지만 카이사르는 ‘위대한 비범’을 지닌 사람이야. 그런데 만약 이 두 사람이 엄마에게 프러포즈를 하면 어떻게 할까. 쿠퍼는 성실한 사람이니까 그의 프러포즈는 결혼을 의미하고 평생 평온과 행복한 생활을 약속해줄 거야. 그런데 카이사르는 결혼을 정치적 계산으로 하고 게다가 플레이보이로도 유명한 사람이야. 그와는 두 달 정도가 고작일 거야.”


하지만 시오노는 “설령 두 달이라 해도 카이사르를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카이사르는 지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지속하는 의지, 자기제어라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다섯 가지를 다 갖췄다. 경제와 외교 등 여러 분야에 정통했고 귀족 출신이기에 오히려 혁신적일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한 엘리트였기에 오히려 현 체제를 부수는 데 저항감이 없었다. 배경이 좋은 사람은 거기서 나오는 여유로 창조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가 바람둥이에 낭비벽이 있다는 점도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는 타인에게 자극을 준다, 내 개인적 의견으로는 권력은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힘이다.”


시오노는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제어 능력, 지속하는 의지를 지도자의 다섯 가지 덕목이라고 열거하면서 저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 이를 적시했다.


“민주정체에서 지도자로 산다는 것은 가느다란 로프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변하기 쉬운 민중의 마음을 능숙하게 지배하기 위해 ‘지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스스로를 제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관철하는 강한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지도자의 지적 능력이란 학문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는 별개다.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의 문제해결 능력이다. 선견지명도 거기에 포함된다.”


‘설득력’의 미덕 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강한 사람이었다. 위험한 지역에 스스로 나아가서 싸웠고, 물이 없어 병사가 괴로울 때는 자신도 물을 마시지 않고 함께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은 멀리 인도까지 함께 갔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심취하는 것은 그의 행동을 가까이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된다. 행동도 물론 중요하지만 역시 수많은 인간을 움직이려면 말로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육체적 내구력’이란 것도 체력이 강하다거나 운동능력이 높다는 얘기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통치하느냐는 것이라는 게 시오노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병약했으나 자신의 육체가 약하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결코 무리하지 않아 77세까지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시오노는 작가 이전에 어머니다. 그의 저작들에는 간간이 교육 문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어머니의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은 이탈리아인과 일본인의 혼혈이지만, 이탈리아인으로 자랐다. 그는 아들을 세계 어디에서나 살아갈 수 있는 남자로 키우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일이 외국어 습득능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우선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철저히 배우게 했다. 그 다음에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를 배우게 했다.


“아무리 외국어를 공부해도 모국어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외국어는 하나의 도구다. 실제로 외국인이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나라 말을 줄줄 지껄이는 사람이 아니라, 말은 서툴러도 무언가 전달할 것이 있는 사람 쪽이다.”


중요한 것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전달하는가, 즉 메시지라는 것이다.



자녀교육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매사를 철저히 ‘자기 머리’로 생각하도록 하는 훈련이다. 그는 아들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마음을 썼다고 한다. 자식과 무조건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행동을 같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한테는 너의 관심사가 있을 테고, 엄마한테는 엄마의 관심사가 있으니까” 하는 식으로 늘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표현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녀교육과 관련된 그의 몇 가지 언급을 살펴보자.


“나는 다시 태어나면 전업주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싶을 정도로 여자가 프로로 살아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우량기업에 들어갔다고 걱정할 게 없는 시대가 아니다. 자신을 억제하는 것, 즉 자제하는 게 필요하고, 그것을 인생의 출발점에서 배우는 게 어머니와의 관계다. 난폭한 말대꾸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한테 버릇없이 말대꾸를 하면 다른 사람한테도 거리낌이 없어진다. 어머니라면 아들의 폭언을 참아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참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들의 버릇없는 짓을 절대로 참아주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다.”


“우리가 교육 논의를 할 때 빠뜨리곤 하는 것이 가정교육이다. 한참 전 일이지만 모 총리가 일본에 와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대답은 ‘이탈리아에 있는 아들이 고교생이라 혼자 둘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아들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살 수 있게 키우겠다고 늘 다짐했다. 혼혈이니까 더욱 그랬다. 그래서 방학 때면 한 달씩 영국에 보내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에 갈 때는 미국 대학으로 갈지, 유럽 대학으로 갈지 스스로 선택하게 했더니 본인이 유럽을 택했다. 아들을 독립시키는 조건은 매주 한 번 반드시 식사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응석도 허락한다. 세탁물은 가져와도 좋다고(웃음). 아이들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고, 자식은 어머니의 밥상머리에서도 자란다.”


“교육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름이 붙은 위원회 등에서 자문해 올 때마다 나는 ‘교육에 대해 배우려거든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말한다. 어떤 동물이든 부모는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는 성심성의껏 돌보고 키워주지만, 목표는 자식의 홀로서기다.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다. 부모건 학교건 빨리 잘 키워서 떠나보낼 생각을 해야 한다. 연인이나 부부, 기업은 어떻게 잘 잡아놓을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지만(웃음)…. 요즘은 이런 각자의 역할을 마구 헷갈리는 듯하다. 학교나 부모가 학생을 잡아놓으려 하고 기업이 인재를 떠나보내려 하니 이건 기본이 잘못된 것이다.”



諸行無常 盛者必衰

 

 


역사를 안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인지 모른다. 차가운 현실인식을 무기로 냉정한 글쓰기를 해온 그이지만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란 책 말미에는 혼자 사는 그의 쓸쓸함과 치열한 작가정신이 함께 보인다.


“요즘 나는 오후가 되면 조깅 슈즈를 신고 로마 거리로 나선다. 조깅이 목적이 아니라 지도를 한 손에 들고 현대의 로마를 걸으면서 고대의 로마 거리를 머릿속에 재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인 노부부를 만났다. … 내가 가르쳐준 길을 찾아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부러웠다. 저런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생각하니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버려두고 온 듯한 슬픈 기분이 들었다. 다만 멀어지는 노부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뒤를 따라가다가 내 눈의 초점은 점점 넓어져갔다. 노부부도 다른 관광객도 현대 로마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그 대신에 하얀 장의(長衣) 또는 형형색색의 단의를 걸치고 회당과 신전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2000년 전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명(天命)을 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불가능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 권에서 ‘제행무상 성자필쇠(諸行無常 盛者必衰)’, 즉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흥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쇠한다는 말을 썼다. 한때 국가나 조직, 개인을 흥하게 만든 요소가 언젠가는 실패의 원인이 된다는 그의 말은 사는 일의 엄정함을 느끼게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의 성공요소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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