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②

발행일: 2010-08-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그녀의 예술세계가 오랜 기간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던진 용서와 화해, 그리고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애정과 감사 때문이었다. 그때껏 억압으로만 여겨오던 여성의 삶을 남자와 비교해 열등하거나 주눅 든 존재가 아니라고 깨달으면서 그녀의 작품에는 새로운 재료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게 ‘바늘’이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가족 중 여자들은 모두 바늘을 사용했다. 나는 항상 바늘의 매력과 마술적 힘에 끌려 있었다. 바늘은 손상을 치유하는 데 쓰인다. 그것은 관대하다. 결코 호전적이지 않다. 그것은 핀이 아니다.’(작가의 말 중에서)


‘슈와지 I’이란 제목이 붙은 그녀의 작품엔 커다란 단두대에 목을 자르는 칼이 아니라 대형 바늘이 매달려 있다. 슈와지는 그녀가 어릴 때 살던 곳의 지명이다.

 

 

 


작가는 바늘이야말로 쓸모없는 물건을 유용한 것으로 변모시키고 파괴된 것을 다시 이어 새롭게 만들어주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태피스트리를 수선하면서 늘 가까이하던 물건인 ‘바늘’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분노, 증오와 같은 과거의 심리상태를 극복하고 용서와 포용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작품을 단지 남이 보기 좋아하는 형태로 만든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며 그것을 마치 이야기처럼 남에게 풀어내는 인문학적 방식을 취했다. 이는 워낙 난해해서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여겨지던 현대미술이 ‘삶과 분리되지 않은 것’임을 보여줬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마망(Maman·거미)’(1996)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서울의 신세계백화점과 한남동 리움미술관에도 설치된 이 작품은 높이 3.7m에 달하는 대형 브론즈다. 거미의 형상이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이지만 알을 품은 암컷의 모성(母性)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아버지의 파괴’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면 ‘거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담은 작품이다. 부르주아에게 아버지는 상처와 억압을 주는 존재였으나, 어머니는 참을성 있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정신적인 친구였다. 이러한 어머니를 자신의 몸에서 실을 직접 자아내 보호구역을 만들어가는 거미에 비유해낸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마망’에 대해 “태피스트리를 수선하던 나의 어머니를 그린 것”이라면서 “어머니는 거미처럼 태피스트리를 실로 짜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병이 든 뒤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면서 “마망은 (어머니의) 연약함과 강인함을 같이 보여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 ‘마망’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걱정하는 작가 자신, 나아가 모든 어머니의 자화상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폐기종을 앓던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사용한 의학기구를 이용한 작품 ‘부항’이나 많은 유방으로 자식에게 자애로운 어머니를 상징한 ‘유방’ 같은 작품에선 그녀가 억압으로 생각하던 여성적 정체성을 모성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면서 성적 콤플렉스를 이겨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또 1990년 중반부터 천을 꿰매는 작업도 했다. 꿰매는 작업 역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작가에게 매우 긍정적인 작업 방식이었다.

 

 

말년의 부르주아가 꽃 그림에 치중한 것 역시 따뜻한 마음에 충만한 에너지를 그대로 표현한다. 그녀는 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꽃은 보내지 못한 편지와도 같다. 아버지의 부정, 어머니의 무심을 용서해준다. 꽃은 내게 사과의 편지이자 부활과 보상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그린 붉은색 꽃을 들여다보면 5개의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을 표현한 것이다. 뿌리는 하나지만 거리를 두고 각자 존재하는 모습을 통해 핏줄의 애잔함과 관계에서 빚어지는 잔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또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어!!! ’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칡덩굴 같은 거친 가지를 통해 생명의 강인함과 무한함을 나타냈다.


그녀의 작품세계는 남자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됐지만, 훗날 그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연민의 존재라는 자각으로 발전한다. 여성은 연약하며 상처를 받기 쉬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 반대로 강한 남성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보는 작가의 눈은 나아가 여성은 남성성을, 남성은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남녀는 적이 아니라 상생의 관계’임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다. 남녀의 생식기가 적나라하게 병치된 ‘개화(開花)하는 야누스(Janus fleuri)’ 같은 작품은 페니스와 질이 절묘하게 결합된 조각이다.


그러나 제목인 ‘야누스’에서 암시하듯이 양면성 혹은 이중성은 부르주아의 예술세계에서 발견되는 주요한 특성이다. 즉 남성과 여성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폭력과 에로틱함, 가학대증과 피학대증, 그리고 내부와 외부라는 이원적 카테고리는 그녀의 조각에서 자주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작가가 죽기 5개월 전인 지난 1월 ‘조선일보’ 손정미 기자는 그녀의 뉴욕 작업실을 찾았다. 겨울 해가 기울어 어둑해질 무렵, 좁은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가자 휠체어에 앉은 부르주아가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니 앙상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작가는 기자의 손을 잡고 “오, (손이) 차다”며 테이블에 놓인 코냑을 가리키며 권했다고 한다(아래는 손 기자의 기사 인용).


낡은 소파에는 부르주아가 막 끝낸 수채화가 물기를 머금고 올려져 있었다. 부르주아는 올해 한국 나이로 100세를 맞았지만 오전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2시간씩 작업을 하고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 스튜디오 디렉터인 제리 고로보이씨는 “루이즈는 아직도 건강한 편”이라면서 “불면증 때문에 매일 컨디션이 다르지만 오전에는 대부분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부르주아가 불어와 영어를 섞어서 하는 말은 비교적 또렷하게 들렸다. 작업 테이블에는 물감이 묻어 있고 드로잉에 쓰는 지우개와 연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벽에는 영국 작가인 데미언 허스트와 U2의 보노가 부르주아를 찾아와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건강 때문에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점심을 먹으면서 CNN을 본다”며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한 것이고, 이것들을 작품에 반영한다”고 말했다.


부르주아의 응접실은 ‘살롱(salon)’으로 불리며 미술계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각가를 꿈꾸는 젊은 학생이 작품을 들고 와서 대가에게 보이기 위해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의 살롱을 찾은 사람으로는 젊은 예술가뿐 아니라 명성을 얻은 앤터니 곰리를 비롯해 사진가 낸 골딘, 전위미술가 리처드 롱,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시 등이 있다.


부르주아는 “살롱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면서 “살롱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들은 고립돼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서로 어려운 점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중략) 부르주아는 “예술가가 된 것은 축복이었다”면서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기억이 내 작품 속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가 표현하는 것은 진실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원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도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제작과정에서 사용하는 재료나 테크닉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결국 예술은 인간의 감정에 관한 것이고, 이 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몇 개월 뒤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부르주아는 “아직도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고 말해야 할 것이 많다”면서 “작품은 나를 편하게 해주고 나 자신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 참고도서


●‘기억의 공간’ (삶과꿈)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세계 연구: <밀실(Cells)> 연작을 중심으로(2002·임현숙·홍익대학교 석사눈문)’ 등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목록

댓글 0개 / 답변글 0

댓글쓰기

‘ 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의 다른 글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2011-01-01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2011-01-01
[세기의 철녀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② 2010-08-01
[세기의 철녀들] 세계적 패션모델이자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 ① 2010-07-01
[세기의 철녀들] 세계적 패션모델이자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 ② 201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