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일본 방문 하이라이트를 해상자위대 소속 호위함 ‘가가’에 오른 것으로 장식했다. 가가는 원래 일본 제국주의 시절 항공모함 이름이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미군 기지를 공습할 때 선봉에 섰다가 이듬해 미군에 격침됐다.
지난해 6월 정상회담에서 아베에게 “나는 진주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었던 트럼프가 미국을 2차대전의 화염으로 몰아놓은 군함 갑판에, 그것도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선 것 자체가 현재 동북아 외교 안보지형도의 변화를 한눈에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가장 기분 나빴을 나라는 중국일 것이다. 가가는 1932년 상하이를 폭격하는 등 중국 침략에도 동원돼 중국인들에게 ‘악마의 배’로 불렸다. 때문에 중국은 2015년 자위대가 새 호위함에 ‘가가’라는 이름을 쓰자 격렬히 반발했었다. 이걸 모를 리 없는 트럼프의 이날 시찰은 중국과의 양보할 수 없는 패권전쟁의 와중에 군사대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동시에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일 군사 동맹이 무서운 속도로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가 28일 찾은 요코스카 기지는 동북아 최고 해군력을 자랑하는 미군 7함대 주둔지이자 미국이 태평양 사령부를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개편하면서 중국의 ‘해양 굴기’에 맞설 핵심 기지로 부상한 곳이다.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증원 전력은 물론 유엔군 병력과 물자까지 집결한다.
일본 방위성은 지난해 말 호위함인 ‘가가’와 '이즈모' 2척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고 F-35B 등 최신예 전투기를 탑재할 계획이라고 했다. 일본이 항모를 갖게 되면 2차 대전 패전 후 처음이다. 트럼프의 가가함 시찰은 일본의 항모보유를 미국이 승인했음을 국내외에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그동안 어느 나라에도 제공하지 않았던 F-35 설계와 관련한 기밀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기로 했으며 일본은 미군 항공모함 함재기의 이착륙 훈련 장소를 미군에 제공하기 위해 가고시마(鹿兒島)현 무인도를 160억 엔에 사들이기로 결정했을 정도다.
미일 양국은 이런 하드웨어 전력(戰力)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의 사이버 공간 및 우주공간 무기화를 두고 보지 않겠다며 일본이 사이버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이 응징해주는 사이버 우주 안보협력도 강화하기로 지난달 양국 외교 국방장관이 합의했다.
일본은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미국과의 밀월 관계를 만드는데 승부수를 던진 모양새다. 미군의 태평양 전력 자산의 주둔지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과 동시에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군비 확충과 훈련에도 열을 올리면서 자체 군사력도 무서운 기세로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 전문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에 따르면, 일본의 올해 군사력은 세계 6위로, 지난해 8위에서 두 계단 뛰어올랐다.
미중 무역 분쟁, 80년대 일본 죽이기 데자뷔
2차 대전 후 세계 군사 역사를 다시 쓸 정도로 미일간의 안보밀착이 강화되고 있지만 80년대만 해도 미국은 현재 중국과의 무역 분쟁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일본과 대대적인 경제전쟁을 벌였었다.
1980년대 중반 미쓰비시 전기,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 반도체 회사 제품들이 미국 시장을 석권하자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일본 반도체에 대한 덤핑 조사를 명령했고 손해 배상액을 3억 달러로 상정한 뒤 일본산 컴퓨터, TV, 전동 공구에까지 무려 100% 보복 관세를 때렸다. 미 국방부는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를 방해하는 보복전을 이어갔다.
가장 압권은 환율 개입이었다.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선진 5개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엔화 가치를 대폭 올린 ‘플라자 합의’는 말이 ‘합의’였지 일본의 처절한 굴욕이었다. 합의 불과 1주일 만에 엔화는 달러당 240엔에서 150엔으로, 1년 여 만인 1987년 말120엔까지 폭등했다. 진공청소기처럼 달러를 빨아들이고 있던 일본은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2년 새 30% 이상의 부(富)가 공중으로 날아간 셈이 되어 버렸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으로서는 태평양 전쟁 패전에 버금가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망령이다. 모든 수출 수입 물품에 적용되는 환율 개입은 특정 물품에만 적용되는 관세보복과는 비교가 안 된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환율 문제를 꺼내들자 일본, 유럽연합(EU), 캐나다 등 미국과 무역규모가 크거나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국가들이 '플라자의 악몽'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미중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 트럼프의 행동이 돌발적이고 충동적이라고 하지만 80년대 일본을 무참하게 깔아뭉개 일본에게 ‘잃어버린 20년’의 밑자락을 깔아주었던 미국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패권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행동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미일 무역 분쟁은 1996년에야 종결됐다. 승자는 당연히 미국이었다. 1992년 인텔(Intel)을 필두로 1993년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3.1, 1995년 Windows95가 전 세계에 보급되어 전자업계 패권을 탈환했다. 가전 및 오디오 장비에 강했던 일본은 서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 고도성장의 정점이었던 1989년 상위 50개 기업 중 32개가 일본 기업이었지만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의 주력 산업이던 가전과 반도체는 대부분 철수했거나 매각을 통해 사라졌다.
하지만 현재 미중 전쟁이 과거 미일 분쟁과 가장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은 경제적으론 미국과 경쟁했지만, 안보에선 미국의 우산 아래 있는 동맹국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중 무역 전쟁은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일 경제 전쟁이 자유민주적 시장 경제 질서 안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념과 체제가 다르고 세계 패권을 다투겠다는 중국과 미국의 경제 전쟁은 훨씬 더 장기적이고 무자비하며 전면전 양상을 띌 것으로 보인다. 인민일보가 지난해 8월9일자에서 ‘트럼프의 의도는 미국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단순한 목적이 아니라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했듯이 미중 전쟁의 본질은 4차 산업혁명의 패권을 누가 쥘 것인가를 가르는 기술 전쟁이다.
4차 산업혁명 영역은 기존 제조업과는 달리 다른 나라, 다른 기업과의 분업이 허용되는 구조가 아니다. 표준을 잡는 자가 독식한다. 한 번 뒤지면 따라잡기도 힘들다. 혁신에서 뒤질 때, 기존 패권 국가나 선도 기업도 순식간에 추락한다. 중국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첨단기술 육성정책인 ‘중국제조 2025’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반격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외톨이 한국 외교
트럼프는 일본에 나흘 머물면서 한국에는 오지 않았다. “김정은과도 직접 만나겠다”고 한 아베는 ‘지극정성’ 외교로 한반도 비핵화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등장하려 하고 있다. 미일은 밀월인데 한국은 외톨이 신세다. 한미간 한반도 비핵화 로드맵 논의는 진전된 것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김정은은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고 우리를 향해서는 ‘오지랖넓은 중재행세 말라’며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런 상황이면 6월말 오사카 G20정상회의에서도 한국의 존재감은 미미할 것이라는 우려가 잇따른다.
북핵 위협에 대비한 한미일 안보 공조는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일본과의 관계는 역대 최악이다. 미중 화웨이 전쟁이 제2의 사드 사태가 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데 정부는 사기업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며 수수방관하는 모습이다. 북한에만 올인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비해 한미일, 국제 사회와 공동 대응하며 협력을 얻어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