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침팬지들의 代母 제인 구달 ①

발행일: 2010-11-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인간의 눈으로 동물의 가슴을 읽다

 

 

《여자, 고졸, 비전문가. 제인 구달은 자신의 배경을 놓고 쏟아지는 냉소를 의지와 집념으로 되받아쳤다. 동물행동학의 새 지평을 연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는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 ‘인간에 대한 재정의’였다. “침팬지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나눠주고 분노하고 질투한다.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 운운하며 자연을 이용과 도구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을 버리자”는 그의 메시지는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침팬지 연구가이자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76) 박사가 지난 9월27일 세 번째로 방한했다. 신간 ‘희망의 자연’(사이언스북스) 출간 에 맞춘 이번 방한은 특히 구달 박사가 침팬지 연구를 위해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홀로 탄자니아 열대우림으로 들어간 지 50주년 되는 해에 이루어져 각별했다. 구달 박사는 경희대와 카이스트 강연, 국립수목원 방문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는 26년간에 걸친 아프리카 현장 연구를 뒤로하고, 이후 환경운동가의 삶을 살며 세계 곳곳에서 멸종 위기의 종(種)들을 구하려 애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번에 펴낸 ‘희망의 자연’은 때로는 직접 그들을 돕고, 때로는 강연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도운 방대한 기록을 담은 것이다. 환경운동가로서의 인생 2막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달 박사는 기자간담회에서 “1년에 300일 이상 세계를 여행하면서 침팬지 이외의 다른 동물도 고생하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계에 있는 모든 동물을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어두운 전망을 내놨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것이 이 책을 집필한 이유”라고 밝혔다.


그는 121개국의 단체가 참여하는 세계적인 환경운동 ‘뿌리와 새싹’을 이끌고 있다. ‘뿌리와 새싹’은 1991년 탄자니아 젊은이 16명이 시작한 소박한 운동이지만, 지금은 전세계 90여 개국에서 활동하는 모임이 9000여 개에 달한다.


종의 보존과 청소년 동물보호운동을 지원해온 구달 박사는 그간 여러 개의 작위를 받았으며 2002년에는 유엔 평화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거짓없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룩한 연구 결과를 청소년에게 널리 알리고 아프리카 야생동물 보호와 개발 간의 조화를 위해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아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상(과학연구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동물행동학자 제인 구달의 삶은 침팬지라는 동물도 인간처럼 마음과 감정을 가진 종이라는 것을 치밀한 관찰을 통해 밝혀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어릴 적 품은 꿈을 한 번도 놓지 않고 온갖 편견 속에서도 집요하게 실현시킨 도전의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도 할 수 없었던 이 평범한 여성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프리카 오지에서의 삶을 자원했고, 그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두려워서 행하지 못했던 동물 관찰을 감행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경제적 궁핍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컸다. 제인 구달은 1934년 4월3일 런던의 북쪽 마을 햄프스테드 히스에서 태어났다. 직업이 카레이서였던 아버지 모티머는 가족을 부양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즐기는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밖으로만 나돌던 그는 맏딸 제인이 태어났을 때에도 심드렁했다.


다만 그는 제인에게 좋은 시력과 왕성한 체력, 천성적으로 경쟁을 즐기는 성격, 긴장감을 견뎌내면서 남보다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능력, 강한 모험심, 참을성을 물려줬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군에 자원입대하면서 제인과 영원히 멀어진다. 제인의 어머니, 즉 자신의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제인 양육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든 늘 즐겁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성격을 지닌 어머니 밴은 인격적으로도 안정되고 성숙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제인에게 ‘외출할 때는 목적지를 분명히 밝힌다’ ‘허락받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늘 사려 깊게 행동한다’ ‘식사 때는 바르게 앉고 예절을 지켜 공손하게 행동한다’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며 정해진 시간에 불을 끈다’ 같은 원칙들을 지키도록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제인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자산은 무엇보다 자신감이었다. 제인은 어머니-외할머니로 이어지는 모계 집안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여자아이니까 안돼” 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는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라. 찾았다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 무엇보다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외할머니 대니 역시 의지와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제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하숙을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은 그에게 딱 들어맞는다. 제인은 첫돌 때 아버지가 사준 아이만한 크기의 침팬지 봉제인형에 푹 빠진다. 또 어린 시절부터 시골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묻혀 살다보니 새와 동물, 꽃과 나무와 친근해졌다.


제인이 다섯 살 때 3시간 동안이나 행방불명이 되어 가족을 놀라게 했는데 알고 보니 닭장 속에 있었다. 닭이 어떻게 알을 낳는지 알고 싶어 닭장 안에 들어가 알 낳는 것을 볼 때까지 나오지 않은 것. 제인은 1988년에 출간한 아동용 전기 ‘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인생’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닭장 안은 몹시 후텁지근했다. 지푸라기가 다리를 간질였다. 어두컴컴했지만 짚으로 만든 둥지 위에 앉아 있는 닭을 볼 수 있었다. 닭은 닭장 건너편, 나에게서 1.5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암탉이 짚더미 속 둥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에게 등을 보인 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잠시 후 닭의 다리 사이에서 둥글고 하얀 물체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커졌다. 갑자기 닭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고, 흰 물체가 ‘퐁’ 하고 짚 위에 떨어졌다. 닭은 기쁜 듯 큰소리로 꼭꼭거리며, 깃털을 털고 부리로 달걀을 움직인 후 자랑스럽게 닭장에서 걸어 나갔다.”


다섯 살 때 닭장 안에서 한 이 관찰이야말로 생애 첫 번째 동물 연구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제인의 동물 사랑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썼고 지렁이, 지네 같은 징그러운 것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신기한 관찰대상으로 삼았다. 다음은 ‘제인 구달 평전’에 소개된 어머니의 회상이다.


“딸은 여느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차분했고 생각이 깊고 관찰력도 좋았다. 밖에 나가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처음에는 걱정을 했는데 나중엔 그러려니 하게 됐다. 그러면 한참이 지나서야 발가락을 다친 개구리 같은 걸 들고 나타나곤 했다.”


큰 성취를 한 사람들은 학교라는 제도 안에 들어가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지만, 제인 구달은 반대였다. 이후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동물행동연구가로 제도권에서 인정받기까지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제인은 어릴 적부터 학교와는 잘 맞지 않았다.


제인은 초등학교 시절 일기에 학교를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는 끔찍한 곳’이라고 적었다. 그에게 학교는 규격화된 이성과 감성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느껴졌다. 학교는 어린 제인의 끓어오르는 감성, 환상의 세계와 완전히 유리돼 있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수록 학교에서 하는 공부란 게 일자리를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제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은 당시 여학생 대부분이 선호하던 비서, 간호사, 교사와는 전혀 다른 직업이었다.

 

 


제인은 야생동물을 관찰하는 동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담교사는 제인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개를 좋아한다는 제인의 말에 “사진학교에 진학해 애완견 사진 촬영기술을 익히라”고 충고했을까. 에세이 상을 받을 정도로 글재주가 있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은 제인에게 결국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제인은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비서학교에 가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속기, 타자, 부기를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했다. 과정을 모두 끝낸 1954년 3월6일 제인의 종합평가서에는 ‘두뇌 명석하나 자만하는 경향이 있고, 배울 게 전혀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함’이라고 쓰여 있다.


직업을 찾으려면 도시로 나가야 했다. 제인은 비서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옥스퍼드로 갔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찾은 첫 직업은 신체장애아 물리치료센터 서무. 급료는 최저 수준이고 일은 지루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환자들을 접하는 일은 그를 내적으로 성숙시켰다.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정상인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줬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겸손함을 배웠다고 할까.


이후 제인은 옥스퍼드대 학적계장 비서, 광고물 제작 스튜디오 사환, 식당 웨이트리스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그저 그런 생활로 던져졌다. ‘타잔’과 ‘정글북’에 심취하며 모험심을 키우고 시골 집 마당에서 자라던 동식물에 호기심을 갖고 살면서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과 함께 살고 싶다는, 당시로서는 독특한 꿈을 꾸던 제인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을 바꾸는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친한 고교 동창이 보낸 편지로 자기 아버지가 식민지령 케냐 나이로비 교외의 구릉지에 있는 농장을 사서 자기도 그곳으로 가게 됐으니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 노력하고 기회가 오면 재빨리 잡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제인은 비록 얼굴은 백인의 모습이지만 고향에 온 듯 반가웠다. 우선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처지였기에 나이로비 시내에 있는 영국계 건축회사 타이피스트로 취직했다. 늘 꿈에 그려온 아프리카까지 오긴 했지만, 여기서 누구를 찾아 어떻게 동물 연구를 시작할지 막막했다. 틈만 나면 동물원으로 달려가 시간을 보내며 위안을 찾던 그에게 어느 날 누군가가 “동물에 관심이 많으면 루이스 리키 관장을 만나보라”고 제안한다.


루이스 리키는 이후 평생 제인의 멘토이자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는데, 리키는 스스로를 ‘하얀 피부의 아프리카인’으로 여긴 53세의 괴짜였다. 제인이 그를 만날 무렵엔 코린돈이라는 나이로비의 자연사박물관(현 케냐 자연사박물관) 관장으로 있었다. 잘생긴 외모,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지만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각종 기행을 일삼으며 사회적 통념을 거부하는 아웃사이더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하긴 바로 그런 이력 때문에 제인의 열정을 알아볼 수 있긴 했다. 여자인데다 학사학위조차 없는 제인에게 침팬지 연구를 제안했으니.


루이스 리키의 직업은 인류학자이자 고생물학자. 고대 유물이나 두개골, 뼈 화석을 캐내며 40여 년을 보냈다. 그의 작업은 당시 과학계에서도 웬만큼 평가를 받았다. 인류가 아프리카라는 ‘정원’에 뿌리를 두고 갈래를 뻗어가는 나무처럼 진화해왔다는, 지금은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믿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이바지했다.


제인이 루이스를 처음 만난 것은 1957년 5월. 당시 루이스는 이미 과학자로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철학박사, 옥스퍼드대 이학 명예박사였으며 8권의 책을 쓴 저술가였다. 당시는 제3차 선사학 범아프리카대회 의장으로 막 당선된 시점이기도 했다. 제인의 호기심과 열정을 간파한 루이스는 그에게 비서 일을 제안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유인원(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연구를 후원하려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유인원 현장 연구는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했다. 아니, 현장 연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어느 과학자든 인적 드문 외딴 숲에서 거칠고 위험한 연구를 해내려면 용기와 인내심, 동물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는 기존 통념을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는 굳은 의지가 필요했다. 더구나 그 일을 남자가 아닌 여자가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후 루이스가 제인과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기금을 모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이 후원자들로부터 ‘비전공자는 고사하고 어떻게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지적에 지원을 꺼린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리키 관장은 이런 편견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동물행동 연구만큼은 여성이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여성은 남성보다 인내심이 강하고, 야생동물들에게 남성보다 덜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인간을 닮은 영장류 사이에 섞여 있을 때 수컷 영장류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적었다.


그는 학위나 정식 교육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제인이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에만 해도 야생동물에 대한 현장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난 사례는 극히 드물었기에 ‘정식 교육’이란 것은 오히려 상상력이나 행동에 제한을 가하는 덫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단순명료하고 이론적 편견이 없는 정신 상태’의 소유자를 찾고 있었다. 제인이 적격이었다.


루이스 리키 관장이 제인에게 권한 곳은 탄자니아에 있는 곰베 강 침팬지 보호구였다. 곰베는 동물행동관찰의 천국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인근 탕가니카 호수가 산림 생태계를 형성해 동물에게 양분을 공급한 것은 물론 사람에게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 덕분에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적이 드물어 동아프리카 삼림지역의 동물 표본이 풍부하게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160여 마리에 달하는 풍성한 개체수의 침팬지와 그밖의 다른 영장류를 대표하는 6종인 아누비스개코원숭이·붉은콜로부스원숭이·푸른원숭이·붉은꼬리원숭이·버빗원숭이·바늘발톱갈로고원숭이들이 살았다. 이밖에 다른 포유류로 들소·부시벅·하마·하이에나·표범이 있었고, 사향고양이·제닛고양이·긴코땃쥐와 각종 다람쥐, 설치류도 살았다.


제인이 곰베에 발을 디딘 것은 1960년, 26세 때였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곰베 생활을 시작했다. 제인은 이곳에 온 지 두 달여 만인 7월부터 본격적인 침팬지 관찰에 나섰다. 새벽부터 밤까지 쫓아다녔고, 아침에 잠에서 깬 침팬지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이틀 밤을 침낭 속에서 자기도 했다. 침팬지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걷고 또 걸어 다녔다. 그러고는 매일 밤 10시 반 무렵까지 현장일지를 썼다. 일요일에도 표본을 채집하고 침팬지를 찾아 호수 연안이나 캠프 주변 숲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동물 탐사에 매달린 제인의 모습을, 그의 어머니는 제인의 외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한다.


“거의 꼼짝도 하지 않고 원숭이들을 노려보고 또 노려보고 있어요. 그리고 본 것을 머릿속에 담고, 기록하고, 기다리고, 관찰을 한다니까요! 햇빛이 내리쬐든, 개미가 몸 위로 기어 다니든 말든, 콧잔등이 벗겨지든 말든, 앞이마 허물이 벗겨지든 말든 그곳에서 단 1초도 자기 일을 멈추지 않아요. 제인이 지금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인은 초기에 쓴 일지에 “울적함과 우울함이 밀려들었다”고 적었다. “대체 (침팬지의) 행동이라 할 만한 걸 언제쯤 볼 수 있단 말인가? 보이는 거라곤 각종 열매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모습뿐이다”라고도 썼다. 제인은 말라리아 감염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다.



   ②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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