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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세계적 패션모델이자 인권운동가 와리스 디리 ②

발행일: 2010-07-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와리스는 영국대사였던 이모부 집에서 4년 동안 1년 365일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며 살았다. 시간 개념 없이 살다가 여섯시에 일어나 여섯시 반에 이모부 아침식사, 일곱시에 이모에게 커피를, 여덟시에 아이들에게 아침식사를 주고 부엌을 청소했다. 4년 동안 단 하루도 쉰 적 없이 짬이 날 때마다 아무 거나 집어먹고 자정쯤 되어서 잠잘 때까지 계속 일만했다.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카의 구박을 받아가며 글을 익힌다.


어느덧 이모부의 임기가 끝나 소말리아로 돌아가야 할 시간. 하지만 와리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발을 디딘 문명사회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었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남아 맥도널드에서 청소와 주방보조를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온몸은 온통 기름투성이가 되었지만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녀의 출퇴근길을 눈여겨보던 사진작가 테렌드 도노반의 눈에 띄어 패션잡지 표지모델이 된 것이다. 그녀는 이후 파리와 밀라노의 패션쇼에 출연하고 이어 레블론과 로레알의 화장품 모델로도 얼굴이 알려지게 된다. 화려한 인생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다.


‘모델은 재미있는 직업이다. 매력적이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직업임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특히 자신감 없는 어린 여성에게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잔인한 면이 있는 직업이다.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되었지만 내면은 여전히 불행했다. 더 이상 사람들이 입혀주는 옷을 입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미소를 지어야만 하는 것도 싫었다.’


모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와리스는 자신을 보고 경탄하는 소리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에 흥분했다. 하지만 이내 그 세계가 가식적이란 것을 깨닫고 희망은 산산조각난다. 와리스는 출세한 많은 사람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수없이 보면서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면서 의존한 게 술이었다. 어느 날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진 그녀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 치유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들이 괴롭힐 때, 생리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자신이 하나의 상품이나 브랜드처럼 사람들 앞에 전시된다고 느껴질 때 다시 술에 손을 댔다.

 

 


문제는 그녀의 정신을 할퀴고 지나간 할례였다. 할례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녀를 망가뜨렸다. 남들로부터 박수를 받아도, 아무리 화려한 자태를 뽐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상처와 정면으로 맞부딪치기로 한다. 모델로서의 삶이 절정에 이른 1997년 패션지 ‘마리 끌레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할례를 받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기자와 인터뷰한 다음날 나는 내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 너무 놀랍고 부끄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온 세상이 나에 대해 알게 될 터였다. 나만의 비밀을 알게 될 터였다. 내 아주 가까운 친구들조차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소말리아의 폐쇄적인 문화에 길든 나로서는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얼굴도 모르는 수백만의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듣게 될 터였다.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마음을 비우자,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는 옷을 벗듯 자존심을 벗어 던졌다.’



와리스가 할례를 고백한 것은 자기치유 목적이 컸다. 몸이 온전치 못한 불구자라는 생각에서 자유롭고 싶었다는 것이다.


‘할례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유는 찾지 못하고 분노만 더했다. 나는 평생 담아두고만 있던 나의 비밀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주변엔 가족이 없었다. 엄마도 언니도 없었기에 슬픔을 나눌 사람도 없었다. 나는 ‘피해자’라는 말을 싫어한다. 너무 무력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리 끌레르’에 ‘여성할례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인터뷰가 나가자 반응은 열렬했다. 이후 더 많은 인터뷰가 몰려들었다. 와리스는 학교나 지역사회뿐 아니라 여성할례문제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강의했다. 바바라 월터즈와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제 와리스는 인권운동가로 변신했다. 유엔인구기금에서 주최하는 여성할례 반대운동에 동참했고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일했다. 유엔특별사절로도 활동했다. 그녀의 삶은 ‘뉴욕의 유목민’이란 이름 아래 영국 BBC 다큐멘터리로 제작됐으며 최근 ‘데저트 플라워’라는 영화로도 제작돼 개봉된 바 있다. 이 영화는 지난해 9월5일 이탈리아의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같은 달 21일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독일, 미국 햄튼 국제영화제,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에서도 상영됐다.


세상은 그녀에게 동지적인 애정으로 화답했다. 2004년 가톨릭 인권운동본부는 그녀에게 오스카 로메로상을 수여했다. 이 상은 1981년부터 제3세계 국가에서 정의 인권 발전을 위해 온힘을 다한 사람에게 매년 수여되는 상이다. 같은 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상’(The Wo-men′s World Award) 시상식에서 ‘세계 사회상’(World Social Award)을 받은 데 이어 2007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당시 그녀의 수상소감에는 다부진 의지가 담겨 있다.


“저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않고 자의식도 없으며 자신들이 영원한 패배자란 생각을 하도록 주입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기보다는 남의 원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천년을 혹독한 사막에서 적응해왔고 가뭄과 모래폭풍 같은 힘겨운 환경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생존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의 지혜와 생활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단지 외부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 대륙은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아프리카의 운명을 고민하는 확신에 찬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돕고 우리의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며 세계는 우리를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으로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프리카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구촌 여성할례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여성할례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28개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1억3000만명 이상의 여성이 할례를 받았으며 매년 시술을 받는 여성의 수는 200만~300만명이다. 케냐 등 여러 국가에서는 할례를 금지하고 있으나 하루에만 6000명 정도의 여자아이가 할례를 받다가 사망하는 등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 이에 비례해 할례를 퇴치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노력도 활발하다. 여성 국민의 69%가 할례를 받고 있는 수단의 경우 2008년부터 이번 세대 안에 할례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통합적인 전략을 세우고 실행에 착수했다.


2003년 7월, 아프리카연합 국가들의 정부 대표, 수반 등이 모잠비크의 마푸토에 모여 인권에 관해 의정서를 제정했다. 아프리카의 15개 국가는 여성할례 금지를 명시한 마푸토 의정서(Maputo Protocol)를 비준했고, 이 의정서는 2005년 11월에 국제법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중 제5항에는 모든 형태의 여성할례를 법적으로 금하도록 되어 있다.


유니세프는 매년 2월6일을 세계 여성할례 금지의 날로 정했다.


치명적인 시련이나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을 강하게 단련시킨다. 와리스 디리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뒤 그녀가 택한 자유를 향한 여정에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강한 자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한 꿈을 좇아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통과 싸웠으니 이 시대 또 다른 전사라고 할 수 있다.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순전히 우연적으로 일어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사실 나는 순전한 우연이라는 게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우리 인생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내가 집을 나와 사자와 맞닥뜨렸을 때 나를 구해준 알라신에게는 계획이 있는 듯했다. 날 살려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운명에 맞서지 않으면 운명은 언제나 당신을 나락으로 잡아끈다’는 게 그녀의 인생관이다. 그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에 솔직하게 자신을 맡겼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그녀를 내면의 평화로 이끌었다. 분노로만 일그러졌던 소말리아에서의 삶도 긍정으로 껴안게 된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나는 호화로운 집을 한 채도 아니고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차 보트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매일 만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더 많은 걸 원한다. 다음 구입할 물품이 마침내 행복과 마음의 평온함을 가져다줄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이제 사고 싶은 걸 다 살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재산은 인생 그 자체이고 그 다음은 건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갖 하찮은 일에 안달하면서 귀중한 건강을 망친다. 나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소박한 삶과 바쁜 삶을 모두 경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소박한 삶의 방식을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


흔하면 그것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서구사회가 주는 풍요와 자유로움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1991년 반란군이 정부를 무너뜨린 이후 내 조국 소말리아에는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탈리아 식민 정부가 지은 하얀 건물들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모가디슈는 재가 되었다. 도시에는 더 이상 그 어떤 질서도 없다. 정부도 없고 경찰도 없고 학교도 없다. 서양에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평화다. 사람들은 평화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는 것 같다. 범죄가 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이 나라의 보호 아래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를 기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할례로 찢긴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수술을 받고 결혼해 아이도 가진 와리스 디리는 2002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리스 디리 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아시아 여성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 참고도서


●‘사막의 꽃’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사막의 아이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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