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할례를 고백해 세상을 바꾼 사막의 꽃 “운명에 맞서지 않으면 운명은 언제나 당신을 나락으로 잡아끈다”
《소말리아 유목민 소녀에서 세계적 패션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현대판 신데렐라인 와리스 디리.
그러나 그녀의 미덕은 극적인 신분상승을 일궈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아니라 여성할례라는 비극적 경험을 세상에 고백해 할례문제를 세계적 인권이슈로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공병호씨는 최근 펴낸 ‘대한민국 성장통’이란 책에서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불편함의 근원이 ‘당연히 이 정도는 (월급을) 받아야 한다’거나 ‘당연히 이 정도 생활수준은 유지해야 한다’는 기대수준에 있다고 꼽는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과거보다 아주 잘살게 되었는데 이런 소리를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객관적인 수치를 들이댄다.
알다시피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 안팎이다. 글로벌리서치리스트라는 웹 사이트를 이용해 계산해보면 이 소득수준은 전세계 부유층 인구의 상위 11%, 다시 말해 약 60억 지구촌 인구 중 6억6964만2941명 안에 든다. 또 우리 사회에서 매달 200만원을 버는 사람은 연봉 수준이 매우 낮다고 생각하겠지만 중국만 해도 대도시 대졸자 초임이 우리 돈으로 34만원, 대학원졸업자는 51만원에 불과하다.
좀 더 극단적인 사례로 들어가 보면 세계은행은 2004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 중 하루 1.25달러(1500원)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이 무려 9억6800만명이라고 밝혔다. 하루 수입이 그보다 적은 사람을 포함하면 14억명이나 된다. 물론 사회적 격차는 벌어지고 있지만 시선을 우리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돌리면 한국인의 삶이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꽤 괜찮은 상황이라고 공씨는 말한다.
물론 최악의 경우와 비교해 현재 상황이 낫다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지만 공씨의 말대로 눈을 돌려 세계를 보면 아직도 문명과 물질의 혜택에서 소외된 지구촌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일약 세계적인 모델로 성공한 와리스 디리의 삶을 보면 연민과 함께 정말 우리는 행복한 나라에 태어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와리스 디리는 소말리아의 유목민 소녀에서 세계적 패션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현대판 신데렐라다. 그러나 그녀의 미덕은 단순히 극적인 신분상승을 일궈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아니라 비극적인 경험을 솔직하게 세상에 털어놓아 다른 사람을 구해내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 다름 아닌 할례(여성 성기 절제)라는 참혹한 자신의 비밀을 세상에 고백해 할례문제를 세계적인 인권 이슈로 만들어내고 유엔 인권 특별대사로까지 임명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깐 소말리아가 어떤 나라인지 보자. 아프리카 동부 인구 800만명의 이 나라는 1991년 1월 시아드 바레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는 내전 상태에 있다. 유엔은 6월4일 수도 모가디슈 병원 세 곳에 최근 몇 주 동안 적어도 1400명의 내전 부상자가 입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중 4분의 1 정도는 아이들이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소말리아 정부는 5300명의 아프리카 연합 평화유지군에 힘입어 수도 일부 지역만을 겨우 통치하고 있다. 국제 뉴스를 접하다보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는 시민들의 모습이라든지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이 거리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소말리아가 최근 들어 유명해진 것은 해적 때문. 소말리아 해적은 알카에다의 빈 라덴에 버금가는 지구촌의 골칫거리다. 이 나라 앞바다의 해적행위는 2008년 이후 폭증했다. 2004년만 해도 10건에 불과했던 민간 선박 피랍은 2008년 111건, 2009년 217건에 달했다.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낀 홍해를 잇는 이 지역은 연 3만척 이상의 선박이 지나며 세계 원유의 25% 정도가 움직인다. 3000㎞에 달하는 긴 해안선은 해적이 서식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해적들은 처음에는 고무보트를 타고 소총과 기관총만 사용하는 ‘생계형’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규모와 세력이 커졌다. 이들은 화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원을 인질로 잡아 석방대금을 현금으로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인질 몸값으로 1억50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다보니 소말리아에서 해적행위는 국민 70%가 지지하는 가장 큰 사업이자 일종의 지역공동체운동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해적단은 모두 군벌과 연계돼 있으며 인질 몸값은 군벌들에게 넘어가 마약사업 같은 곳에 투자된다고 한다. 군벌들은 그 수익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무기를 구입한다.
소말리아의 가난은 국민들을 반군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지난 4월15일 소말리아에서 세력을 넓히는 이슬람 반군 알사바드의 전사 모집 실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취재 결과 소말리아 청년들이 반군에 지원하는 이유는 신념보다는 돈 때문이었다.
와리스 디리의 어릴 적 삶은 일반적인 소말리아 어린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내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의식이란 게 없다. 소말리아 글은 1973년에 생겼으므로 읽기 쓰기도 배우지 않았다. 지식은 노래나 이야기를 통해 입으로 전해졌으며 그보다 중요한 생존에 필요한 기술은 부모로부터 배웠다. 엄마는 마른풀을 이용해 우유를 담을 만큼 촘촘한 그릇을 엮는 법을, 아버지는 가축들을 돌보고 건강하게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중요한 건 오늘이었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아이들은 다 집으로 돌아왔는가? 가축들은 다 안전한가? 무얼 먹을 것인가? 어디서 물을 찾을 것인가?’(‘사막의 꽃’중에서)
소말리아 사람들은 지금도 수천년 전 조상들이 살던 대로 살고 있다. 유목민들은 전기도 전화도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나 텔레비전은 꿈도 못 꾼다. 지금 40대 중반인 와리스 디리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내가 몇 살인지 모른다. 추측할 뿐이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난 아기는 1년 후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생일을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시간표나 시계, 달력과 같이 인위적으로 시간을 나누는 체계가 없었다. 대신 계절에 따라, 뜨고 지는 태양에 따라 살았다. 비의 양에 따라 이동하고 낮의 길이에 따라 하루 계획을 짰다. 우리는 태양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내 그림자가 서쪽에 있으면 아침이었고 바로 밑에 있으면 정오였다. 그림자가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오후였다. 해질녘이 가까워질수록 그림자가 길어졌는데 그걸 보고 해 지기 전 집으로 돌아갈 때를 정했다.’
와리스는 훗날 도시생활을 경험하면서 시간에 대한 관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뉴욕 사람들은 종종 수첩을 꺼내서 묻는다. 14일에 점심을 할까요? 15일은 어때요? 그러면 나는 그냥 만나기 전날 전화하라고 한다. 아무리 약속을 기록해놓아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 왜 사람들이 팔목을 노려보다가 “빨리 가봐야 돼”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늘 서둘렀고 모든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이뤄야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서두를 필요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다. 아프리카 시간은 아주 아주 느리고 매우 차분하다. 내일 정오쯤 보자고 말하면 네 시나 다섯 시에 보자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시계를 차지 않는다.’
와리스는 자신이 처음 서구에 갔을 때 가장 놀란 것이 사람들이 “두통 때문에 일을 못 하겠다”는 식의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와리스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말 힘든 일이 뭔지 보여줄까요. 그러면 다시는 이 일이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을 텐데.”
기계 문명을 접할 수 없었던 그의 아프리카 생활에서 언뜻 낭만적인 분위기도 느낄 수 있겠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 와리스의 회고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가 기억난다. 엄마는 갑자기 사라져 며칠간 나타나지 않곤 했다. 그러다가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다시 나타났다. 엄마는 아이를 낳기 위해 홀로 사막 한가운데로 간 것이다. 탯줄을 자를 날카로운 도구를 가지고 말이다. 한번은 엄마가 사라졌는데 우리는 물을 찾아 이동을 해야 했다. 이동하는 우리를 다시 찾는 데 엄마는 나흘이 걸렸다. 엄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사막을 가로질러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소녀 와리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가난도, 물질문명으로부터의 소외도, 어릴 적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당한 성폭행도 아니었다. ‘할례’(여성 성기 절제)였다.
소말리아 속담에 “여자는 악마가 놓은 덫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여성의 다리 사이에는 나쁜 기운이 있고 성기 역시 불결하고 음탕하니 할례로 악한 기운이 들어갈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례는 또 결혼 전 순결한 몸으로 시집갈 준비를 하는 일종의 절차였다. 남편이 할례를 받은 소녀들의 몸을 열게 함으로써 숫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징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처음엔 와리스도 할례를 받고 싶어했다. 하루 빨리 어른들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할례를 시술하는 사람들이 마을의 늙은 노파들인데 이들은 마취제도 없이 위험하고 비위생적으로 여성의 가장 연약한 부위에 상처를 낸다. 면도칼, 칼, 가위, 유리조각, 날카로운 돌 같은 것으로 성기를 절제해 성냥개비가 들어갈 만큼의 작은 구멍만 남겨놓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과다출혈, 쇼크, 파상풍, 패혈증 등의 각종 후유증으로 많은 소녀가 목숨을 잃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불임, 생리통, (성적) 불감증,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흔하다.
와리스의 자서전에는 자신이 경험한 할례의식이 끔찍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어있다. 그녀 나이 대여섯 살 됐을 때의 기억이라고 한다.
‘할례의식을 치르는 데 드는 돈은 가정에서 지출하는 돈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딸들 혼삿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성기가 (할례를 하지 않은) 그대로이면 결혼을 할 수 없다. 음탕한 매춘부로 여겨져 누구도 아내로 맞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할례를 하기 위해 온 집시)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인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작은 면주머니였다. 여인은 긴 손가락을 뻗어 면주머니 안에 넣더니 부러진 면도날을 꺼냈다. 그리고 면도날을 뒤집으며 양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태양이 막 떠오른 후라 색깔은 보였지만 자세한 것은 구별하기 어려웠다. 들쭉날쭉한 면도날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은 면도날에 침을 뱉더니 옷에 닦았다. 여인이 면도날을 닦는 동안 엄마는 스카프로 내 눈을 가렸다. …내 살이, 내 성기가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허벅지 살이나 팔을 자르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가시로 살에 구멍을 여러 개 뚫은 다음 그 구멍을 희고 질긴 실로 엮어 꿰맸다. 다리에는 느낌이 없었다. 다리 사이의 고통은 죽고 싶을 정도로 심했다. 내 기억은 그 순간까지다. 기절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집시여인은 가고 없었다. 여인과 엄마가 나를 옮겨놓은 것 같았다.’
살점을 도려낸 상처는 몇 달 넘게 핏자국과 고름이 범벅된 채 낫지 않았다. 어린 소녀 와리스는 소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 달 넘도록 자리에 누워 지냈다. 이미 친언니와 사촌언니 둘은 이 참혹한 수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 뒤였다.
열네 살이 된 와리스는 낙타 다섯 마리와 바뀌어 육십 먹은 영감의 신부로 팔려간다는 소식을 아버지로부터 듣고 가출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여러 날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수도 모가디슈에 있는 언니 집으로 도망쳤다. 돈 한 푼 없는 그녀가 사막을 건너 지도도 없이 모가디슈로 가는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사자 밥이 될 뻔한 적도 있고 히치하이킹을 한 트럭운전사에게 성폭행까지 당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언니 집에 도착하지만 가난한 언니는 그를 도울 처지가 못 됐다. 온갖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4년을 지낸 뒤 와리스는 다시 인근 숙모네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똑같은 식모살이였다. 버릇없는 세 아이를 하루 종일 돌봐야 했다. 결국 아이를 때린 것이 걸려 집을 나와 이번에는 이모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는 공사장에서 험한 일을 하기도 했다. 어렵게 번 돈을 고향에 부치지만 이모가 가로채는 바람에 허사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또 다른 이모의 남편, 즉 이모부가 영국대사로 가면서 가정부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모를 졸라 런던행을 허락받았고 마침내 선진 문명사회에 발을 내딛게 된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본 그녀의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 자세히 관찰했더니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떤 문 있는 곳으로 가더란다. ‘바로 저기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와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겨우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이번에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소변을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세면대는 아닌 것 같고 이윽고 변기를 살피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일을 보는 장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그녀는 자리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일어서는 순간, 문제가 또 생겼다.
변기 안에 소변이 그대로 있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볼까봐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영어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Flush(물을 내리세요)라는 글자도 그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와리스는 화장실 안에 있는 온갖 손잡이와 단추 나사못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엇을 건드려야 할지 고민했다. 단추를 누르면 비행기가 폭발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밖에선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와리스는 궁리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종이컵을 찾아들고 변기를 수돗물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소변을 충분히 희석시키면 다른 사람은 변기에 물만 가득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이 변기 뚜껑 바로 아래까지 차오르자 그제서야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바깥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큰일을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②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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