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 남편을 모시고 사는 변 여사는 늘 조마조마했다.
“아이들도 아버지가 무서우니까 무척 어려워했어요. 자나 깨나 조심 조심이었죠. (아버지)묻는 말씀에나 대답할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항상 나를 통해서 얘기했지요. 아이들을 감싸고도는 것이야말로 내가 집에서 해야 할 큰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용돈 1만원을 달라고 하면 5000원만 주라는 것이 남편의 지시(?)였지만, 변 여사는 꼬깃꼬깃 몰래 감춰둔 돈을 자식들에게 건네주곤 했다.
생전에 한 기자가 “자식들 키울 때 속상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자 변 여사는 “속을 썩여도 욕 한마디 안 하고 지냈다. 원래 내가 속상할 땐 말을 안 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젖을 물리고 애와 함께 울었으면 울었지 누구한테 말을 안 했다. 오죽하면 시집와서 회장님이 벙어리를 데리고 왔다 했을까”라고 답했다. 변 여사의 말이 이어진다.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 기를 때가 가장 어려웠다. 여럿이다 보니 별 놈 다 있잖은가. 회장님은 늦게 귀가하시니까 집안 돌아가는 사정은 하나도 몰랐다. 그래서 내 책임이 무거웠다. 회장님이 애들 야단칠 때는 내가 야단을 맞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 내 잘못인 것 같고…. 애들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에 들어갈 무렵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자식을 아홉이나 두었으니) 수험생활을 9번이나 한 셈이다.”
시동생들도 큰형님을 무서워하다보니 의논할 일이 있으면 모두 형수인 변 여사를 통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여성중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변 여사는 정 회장을 “손님 같은 남편”이라고 했다. 잦은 출장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비우고 부부동반으로 출장을 간다 해도 하루 종일 아내를 호텔방에 두고 자기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무심한 남편이었다. 남편의 부재를 견디는 변 여사의 유일한 마음 다스리기는 ‘기도’였다. 남편이 현장에 나가 밤을 새울 때, 자신도 밤을 새우며 남편 하는 일이 잘되기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1985년 2월호 ‘여성중앙’ 기사에 소개된 기도문의 일부다. 구구절절 가슴을 따뜻하게 하면서 힘을 주기도 하는 기도문이라 다소 길지만 인용해본다.
‘주여, 약할 때 자기를 분별할 수 있는 강한 힘과 무서울 때 자기를 잃지 않는 위대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힘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도록 가르쳐주시옵소서. 웃을 줄 아는 동시에 울음을 잃지 않는 힘을, 미래를 바라보는 동시에 과거를 잃지 않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것을 다 주신 다음에 이에 대하여 유머를 알게 하여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시고, 자기 자신을 너무 중대히 여기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소박하다는 것과, 참된 지혜는 개방적인 것이요, 참된 힘은 온유한 힘이라는 것을 명심토록 하여 주시옵소서.’
변 여사는 기도문을 몇 번이고 외고나면 남편이 지구 반대쪽에 가 있을 때라도 집안이 훈훈해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기도문을 신문지 서너 장 펼친 것만한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어놓았을 정도다. 그리고 9남매가 사는 집집마다 기도문을 안방에 걸어놓고 며느리들도 읽게 했다고 한다.
변 여사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남편에게 아침식사를 차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종일 종종걸음 했다. 정 회장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잠을 설쳐가며 만든 순두부를 아침식사에 내놓기도 했다. 정 회장이 생전에 순두부 마니아였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변 여사는 옛 두부 맛을 내기 위해 강릉에서 바닷물을 길어와 그 물로 순두부를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 가끔 자식들 집에 방문해서도 고추장, 된장 담가주고, 반찬 해주느라 가만히 앉아 쉬지를 않았다고 하니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 모습 그대로다.
생전 변 여사는 자신의 저녁일과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하는 아줌마하고 텔레비전을 봐요. 특별히 좋아하는 프로는 없고 뉴스를 열심히 보는 편인데 회장님이 나오면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아요. 회장님이 오셔야 잠자리에 드는데 10시고, 11시고 대중없어요. 집에 돌아와도 신문만 보시다가 주무세요.”
생전에 변 여사는 남편이 모든 일을 워낙 잘 알아서 해 자신은 그저 “네, 네” 하고 살았을 뿐이라고 했다. 남편이 집안일에 일절 신경 쓰지 않도록 도와준 것밖에는 달리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들들에게 기업을 맡길 때도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난 뒤에야 아내인 자신에게 통보(?)를 해주어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사는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내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회장님이 회사에서 돌아와서 휘파람을 불면 회사 일이 잘되나보다 하고 신경질을 내시면 돈이 달리나보다 했지요. 회장님은 당신 마음대로 사는 분이죠. 저는 부담이 없어서 그것이 더 좋아요. 내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는 양반이죠. 물론 선물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회장님하고 같은 밥상머리에 앉아본 적도 제대로 없고요. 워낙 시동생들도 많고 자식도 많고 하니까 해먹이는 데 바빠 뭐가 뭔지 모르게 세월이 이렇게 후딱 갔어요. 당신 따라 나도 같이 바쁘게 살다보니 오늘에 이른 것이죠. 그래도 평생 만족하고 살아왔어요.”
‘변 여사는 정 회장이 여자를 좋아해 밖에서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소문을 들어도 그저 미소만 지을 뿐 한 번도 남편에게 제동을 걸지 않아 ‘보살’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변 여사는 일생을 화 한번 내지 않고 살았을 만큼 무던했던 것은 물론 외부사람들에게도 관세음보살 같은 음덕을 많이 베풀었다고 한다.’(‘우먼센스’ 2004년 5월)
변 여사의 이런 마음은 남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 회장이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자 ‘주간조선’(1992년 12월)에서 ‘아내가 본 후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후보 아내들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변 여사는 당시 기고한 글에서 ‘남자는 자상하고 가정적인 것보다 밖에서 남자답게 일을 해야 맛이 나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런 나를 두고 ‘무간섭의 내조’라고 말하는 것을 어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다음은 글의 일부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었을 때 그분 몰래 어떤 차인지 타보기도 했다. 대견스럽기도 했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 생각으로는 ‘과연 될까’하는 일을 많이도 이루었다. … 조선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살아오면서 참으로 신통하게 여겨지는 일이 하나 있다. 옛날 서울의 낙산에 살 때, 하루는 남들처럼 한강에 놀이를 갔었다. … 그런데 다른 사람들처럼 보트를 타다가 그분의 서툰 노질로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그런 사람이 엄청난 최대의 조선소를 지었다니…. 마음먹은 것은 꼭 달성하려는 의지와 일을 시작하면 지칠 줄 모르고 밀어붙이는 힘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분은 일하는 데서도 호랑이 같다.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이 닥치면 두 눈에서 불꽃같은 것이 튀는 걸 나는 안다. 맥없는 눈초리는 본 적도 없지만 애당초 내가 싫어했다. … 남들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 비결은 간단하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이다. 언제나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 신문을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 시간을 알뜰하게도 쓴다. 혼자서 열심히 공부한 것도 많다. 이런 양반이 정치인이 되어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해선 안 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던 양반이라 나는 정치를 하는 데도 큰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진심은 통하듯 큰 뜻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록 남편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내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남편의 심정이 어떨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내가 보내는 무한대의 존경과 사랑이야말로 남편으로 하여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끄는 원천이 아닐까.
생전 변 여사는 쉽게 이혼하는 젊은이들의 세태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때는 한번 시집가면 그 집에서 살다 죽어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애들은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래도 타일러야지요. 남자들은 애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달래고 구슬려 가면서 살아야지. 참고 살면 또 좋은 일도 있고. 남자나 여자나 한 40은 넘어야 철이 들어요. 그러니 철나자 망령이라잖아요.”
건강하던 변 여사는 맏아들 몽필씨가 198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 충격으로 건강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1990년에는 4남인 몽우씨마저 자살로 생을 마치자 더는 버틸 힘을 잃었는지 이듬해 병원에 입원해 임종할 때까지 1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5남인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마저 대북사업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2003년)했으니 변 여사는 생전에 3명의 자식을 먼저 보낸 불행한 어머니였다.
고인은 앞서 소개한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 부부에게 가장 큰 슬픔은 두 아들과 큰며느리를 먼저 보내야 했던 일이다. 그때마다 그분(정 회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인과응보야. 결국 돈은 인간의 목적도 행복도 아니야’하며 침통해했다’고 적고 있다.
고인은 입원 초기에는 간간이 바깥나들이도 했으나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고혈압에 뇌세포 파괴에 따른 운동장애는 물론 기억력 상실을 앓았다. 말년에는 거의 의식이 없어 2001년 남편 정 회장과 2003년 몽헌 회장 사망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변 여사는 2007년 8월17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묻힌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 함께 묻혔다.
<> 참고도서
●‘가정조선’ 1985년 9월호 ‘가정조선이 만난 사람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부인 변중석 여사’
●‘여성동아’ 1992년 12월호 ‘현대그룹 ‘고모’로 불리는 정희영이 최초로 털어놓은 ‘올케 변중석 오빠 정주영’ 패밀리의 공개 안 된 종교와 집안 얘기’
●‘여성조선’ 2007년 9월호 ‘조강지처의 표본 : 10년 투병 끝에 작고한 현대가 안주인 변중석 여사의 검박한 인생 86년’
●‘여성중앙’ 1985년 2월호 ‘본지완전독점 138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 스토리: “처음으로 속 이야기 다 털어 놓았습니다”
●‘여원’ 1987년 3월호 ‘입체분석: 삼성 이별철 회장의 아내, 박두을 vs 현대 정주영 회장의 아내, 변중석: ‘분홍 저고리’와 ‘몸뻬’의 1900년대 한 시절’
●‘우먼센스’ 1996년 5월호 ‘독점: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의 7년 투병에 얽힌 눈물겨운 사연 독점공개: 외로운 병상에서 파킨슨씨병과 싸우고 있는 변 여사의 감동 투병생활’
●‘우먼센스’ 2004년 5월호 ‘본지특종2: 고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 15년 만에 본지가 최초로 만났다!: “아산병원 특별병동에 있는 그녀는 의외로 건강한 모습. 치매나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과 달랐다”’
●‘주부생활’ 2006년 6월호 ‘현대가의 어머니 변중석 여사: 17년째 아산병원에 입원 중인 근황’
●‘주부생활’ 1987년 7월호 ‘책속의 책: 삼성 이병철 회장 부인과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부인 내조 50년 비교 박두을·변중석’
●‘주간조선’ 1992년 12월10일 ‘대선특집 후보 부인이 본 남편’
●‘필’ 1997년 12월호 ‘8년째 입원중인 정주영 회장 부인 변중석 여사: ‘의식 또렷하고 가끔 외출도 한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② | 2010-05-01 |
[세기의 철녀들]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① | 2010-04-01 |
[세기의 철녀들]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② | 2010-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