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①

발행일: 2010-05-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무한 신뢰

 

 

《최근 자유기업원이 대학생 2000여 명을 대상으로 ‘2010년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업인’을 설문한 결과 절반을 훌쩍 넘는 64.8%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았다. 특유의 뚝심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정 회장의 드라마틱한 삶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3월20일, 정 회장의 9주기를 맞아 정주영 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가 생전에 살았던 서울 청운동 집에 현대가(家) 자제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변중석 여사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한국 경제사에 미친 여성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고(故) 변중석 여사가 범(汎)현대가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삼성의 박두을 여사처럼 변 여사도 생전에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지만, 성품이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후덕하고 검소하다는 평을 들었다.


변 여사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니 유독 여성지에서 다룬 기사가 많았다. 남편이 생전에 워낙 화제를 뿌린 인물이었던 데다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해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던 때문일 것이다. 변 여사 인터뷰 기사 중에서 ‘여성중앙’이 1985년 2월호 특집으로 게재한 ‘변중석 여사 스토리’가 변 여사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청운동 집을 찾은 기자는 우선 건설 재벌이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하는 소박한 콘크리트 2층 양옥집에 놀란다.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는 2층 슬래브 주택이었다. 다음은 기자와 변 여사가 나눈 문답의 일부다.(편의상 문장을 일부 축약했다)


▼ 여느 때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십니까?


“다섯 시면 모두 일어나지요. 회장님이 아무리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라 해도 아침이면 꼭 5시에 일어나십니다.” (아침 준비를 하느라 꽤 부산스러울 텐데도 집안은 조용하다.)


▼ 이 집에 사시는 분이 몇 분이십니까?


“회장님하고 나하고 둘밖에 없어요. 여태까지 막내가 있었는데 공부(미국유학)하러 갔어요. 손주들이 요 앞에서도 살고 저 건너에서도 사는데 회장님 뵐 시간도 없고 하니까 아침마다 오라고 해 2층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지요. 며느리들이 와서 거듭니다. 다들 워낙 바쁘시니까 모두 모일 때가 참 드물어요.” (마침 산책을 마친 정주영 회장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들어섰다.)


“(정 회장) 난 어제 밤 1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오늘 이 약속을 저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했어. 옛날에 내가 서울 처음 올라와서 밥 얻어먹던 쌀집 아주머니가 올해 아흔이셔. 그리고 나한테 돈 꾸어주던 오윤근씨도 아흔이신데 이 두 분을 모시고 저녁이나 대접하려고 했는데 오씨가 보름 전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쌀집아주머니랑 그 집 며느리, 아들들, 그리고 그때 쌀집에서 같이 일하던 이원재씨라고…, 한데 모여서 이야기하느라고 어제는 1시에 들어왔어. 그러느라고 오늘 이 약속을 얘기도 못했는데…. 저 사람 늘 ‘몸뻬’에 쉐타 차림이더니 오늘은 한복으로 되게 차리고 나왔군.”(일동 웃음)


▼ 이렇게 두 분 모시기는 더욱 어려운데 잘 됐습니다.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쓰십니까?


“글쎄요…, 저는 월급도 없고요(이때 정 회장이 “내가 매달 들여오는 월급이 당신 월급이지 뭐야” 해서 일동 다시 웃음), 여기저기서 모아 가져오시는 돈이 200만원가량 되는데 먼저 얼마를 쪼개 저축에 넣고 살림에 쓰지요.”


▼ 직접 회장님한테 타서 쓰십니까? 아니면….


“사무실에서 보내주지요. 큰며느리와 상의해서 살 것 사고 쓸 것 쓰고…, 가계부를 적지요.”


▼ 회장님 식사는 손수 지으십니까?


“서로 하지요. 며느리하고 일하는 아줌마하고….”


▼ 회장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시니까 남편감으로는 낙제점수 아닙니까?


“옛날부터 손님 같으시니까요.(웃음) 아침식사 때만 만나니까요.” (정 회장은 회사일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시 방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청에 변 여사는 “창피해서 어쩌나”를 되풀이하면서 1층 한쪽 구석으로 안내한다. 두 평도 채 안 될 것 같은 작은 방이었다. 한국 최고 재벌의 아내가 이런 방에서 자다니 기자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방 한쪽에는 이불 한 채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고 윗목에는 피난 때 부산까지 갖고 갔다는 낡은 재봉틀과 가족사진으로 가득 찬 사진첩 여남은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변 여사는 재봉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6·25 전엣것이라 구식이죠. (그래도) 웬만한 옷은 요즘도 이 재봉틀로 만들어 입을 수 있어요. 취미라고는 재봉틀질밖에 없어요. 명절 때 며느리들과 손자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게 큰 즐거움이죠. 이 재봉틀이 우리 집안 가보이고 저 사진첩은 내 밑천이죠.”


한편 남편 정 회장의 방은 2층 침대방이었다. 이와 관련해 같은 해 9월에 나온 ‘가정조선’에 두 사람이 층까지 달리해 각방을 쓰는 사연이 변 여사 육성으로 재미있게 소개됐다.


본래 변 여사 방은 2층 정 회장 옆방이었는데, 당시로부터 5년 전에 도둑이 들었던 모양이다. 변 여사는 아들 몽준의 혼사를 앞두고 있어 반지와 시계 같은 패물을 보관해놓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름이다보니 열어놓은 문으로 도둑이 든 것이다. 변 여사가 인기척에 잠이 깨자 도둑은 변 여사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휘발유를 뿌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불 질러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변 여사를 이불로 뒤집어씌웠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부들부들 떨 상황인데, 변 여사가 담이 큰 사람인 게 분명한 것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반격을 했다. 방안을 뒤지던 도둑의 두 손을 붙잡고 “뉘 집인지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소리 안 지를 터이니 타협적으로 하자”고 도둑을 달랬다. 하지만 도둑은 변 여사가 내놓은 패물과 200만원을 쥐고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변 여사의 눈과 입을 반창고로 가리고 전깃줄로 꽁꽁 묶었다. 그러면서 ‘딸라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변 여사는 “딸라 돈은 나도 이름만 들었지 못 봤다”고 맞선다. 그러자 도둑이 “무슨 현대건설 회장집이 이 따위냐”면서 투덜거리며 그냥 갔다는 것이다.


이튿날 이 소식을 들은 정 회장의 반응이 가관이다. 변 여사가 정 회장에게 “아이고 회장님 나 죽을 뻔했어. 도둑놈이 날 꽁꽁 묶어놓고 몽준이 패물 다 갖고 갔어요” 하니 정 회장은 아내 걱정은 고사하고 “왜 도둑놈을 내 방으로 안 데려왔느냐. 내가 돈 쪼금 줘서 타일러 보냈을 것인데”하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변 여사는 혹여 도둑이 남편 방에 가 해코지를 할까봐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는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타박을 받았으니 얼마나 서운할 일인가. 하지만 이런 일화를 기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변 여사의 육성은 경쾌하게 들렸다. 큰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호방함이 보였다. 그래도 ‘그때 그일’에 너무 놀라서 2층은 꼴도 보기 싫어 아예 아래층에 방을 잡았다고 하니 영락없는 연약한 아낙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정 회장은 생전에 펴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아내를 존경한다”는 표현을 썼다.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이, 평생 변함없는 점들을 존경한다. (하기야)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도 할 수 없다.” 이어 “내가 돈을 번 것도 모두 아내 덕택이었다”며 “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사실을 알았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 회장은 생전에 인터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내는) 패물 하나 가진 적 없고 화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저 알뜰하게 간수하는 것은 재봉틀 한 대와 장독대의 장항아리들뿐이다.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그런 점들을 존경한다”면서 “어려웠던 고생을 함께 하면서도 하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했다. 가끔 임원 가족과 한자리에서 어울려 놀 때는 느닷없이 임원들에게 변 여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고는 정 회장 자신이 솔선수범해 절을 했다고 하니 평소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으로서는 최고의 애정표현이었던 셈이다.


변 여사가 얼마나 부자 티를 내지 않고 검박한 사람인지는 곳곳에 전하는 일화로도 확인된다. 생전에 그가 자주 들렀던 슈퍼마켓 종업원들도, 동대문시장 포목점 주인도 변 여사의 정체(?)를 잘 몰랐다고 한다. 어느 해 정초에는 복조리 장사가 조리 값을 받으러 왔다가 변 여사를 보고 “사모님 안 계시느냐”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변 여사가 단골로 다녔던 용산 청과물시장에서는 ‘인심 좋게 보이는 어떤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와서 과일과 채소를 대량으로 사서는 용달차에 싣고 운전사 옆자리에 타고 사라지면 그 할머니가 바로 현대그룹 회장 부인이다’는 말도 돌았다. 생전에 변 여사는 “내 앞으로도 차가 한 대 있지만 시장 봐가지고 용달차 타고 돌아오는 게 가장 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6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던 정 회장이 부부동반 만찬을 열었을 때, 만찬장 구석에 수수한 한복 차림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변 여사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 회장이 나타나 아내를 안내할 때에야 비로소 참석자들이 황황히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천만원도 쓸 사람”


그렇다고 변 여사가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생전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가끔 회장님이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었으니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세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대답하죠. ‘걱정 마세요. 당신이 쌀 한 가마니를 누구에게 주라고 시키면 나는 두 가마니를 주는 사람입니다.’”


변 여사는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마음이 약해서 물건 값도 잘 못 깎는다는 그는 부산 피난 시절, 거리에서 포도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손님이 달라는 대로 다 주다보니 이익은커녕 밑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부러운 게 없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러운 거 하나도 없지요. 난 욕심이 없어요. 회장님은 ‘우리 몽구 어멈(정 회장이 변 여사를 부르던 호칭)은 몇 백만원, 몇 천만원을 줘도 하루에 다 쓸 거다’ 하세요. 사실 내가 그래요. 누가 와서 돈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요. 그래서 (회장님은) 나한테다 돈을 전혀 맡기질 않아요.”


인정이 많았던 변 여사는 1년에 설과 추석 전후로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아원 방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재벌가 아내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돈도 남편 주머니에서 나온 게 아니라 생활비를 줄여서 저축한 것이었다.


변 여사는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 저금통장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액수야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받는 며느리들 마음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재벌가 식구가 되어 사치를 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리라. 변 여사는 또 며느리들에게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해야 하며,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면서 매년 새해 아침에 한복을 한 벌 씩 지어 입히는 자상한 시어머니였다.


변 여사의 마음 씀씀이는 현대그룹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남편이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지으면서 집도 이곳으로 옮겨가자 밤샘하는 공장직원들의 밤참을 해다 먹였다. 나중에 현대의 규모가 커졌을 때는 직원식당 주방장을 자처하며 구내식당을 책임졌다. 현대사옥이 무교동에 있었던 시절, 변 여사가 만들어주는 음식이 맛있어서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는 직원이 드물었다고 한다. 변 여사는 1991년 병원에 장기입원하기 전까지 매년 메주를 쑤어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아예 경기도 덕소에 메주 공장을 세워 40년간 운영했다. 남편의 기업이 커질 때마다 메주 수가 늘어났다.



변 여사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옥마리라는 곳이다. 정 회장 집과 2㎞쯤 떨어져 있는데, 결혼 전에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 밑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변 여사는 그 시절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계집애’라는 이유로 보통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과 교회 야학을 통해 한문과 언문을 깨쳤다.


양쪽 집안 간에 다리를 놓은 이는 변 여사 친정과 한동네에 살았던 정 회장의 넷째 숙부다. 성품이 곱고 후덕한 변 여사를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조카 정주영이 결혼적령기에 이르자 맞선을 주선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23일 밤 변 여사 집에서 처음 대면했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총각의 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확 열리는 것 아닌가. 사내는 놀라 얼굴을 감춘 소녀를 힐끗 보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지만 그 시절엔 그렇게 이미 양가 친척들이 사돈을 맺자고 약속한 사이라면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친정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다. 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남자 쪽 집안이 너무 기우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당시 청년 정주영은 서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다고는 하지만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점원에 불과했다. 집안도 가난하고 시동생도 너무 많으니 친정어머니로선 딸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변 여사 가족도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 회장 쪽보다는 유복한 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딸을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은 변 여사의 큰오빠 인석씨가 정 회장 편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석씨는 정 회장보다 한 살 위로 송전보통학교 선배였는데, 예비신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변 여사는 결혼해 서울로 올라온 뒤로 친정식구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다. 변 여사가 출가한 직후 친정이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후 분단이 되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다.


정 회장은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 전인 일제 때라도 아내를 친정에 보내주지 그랬냐?”는 질문에 “허허, 그래 내가 못 가게 했지. 돈 벌어 가자고 밤낮 얼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구만”이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변 여사는 “아니에요. 친정 안 보내준다고 야속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당신도 이때껏 고향을 못 가보았잖아요”라고 답했다.


어떻든 두 사람은 1938년 1월8일 혼례를 올렸다. 정 회장 나이가 21세, 변 여사 나이 15세였다. 변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첫날밤, 무슨 사람이 이렇게 크고 무섭게 생겼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오순도순 신혼생활은 처음부터 없었다. 신랑이 “3개월만 시부모님 모시고 살아라. 곧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말만 남긴 채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쌀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던 정 회장은 결혼할 무렵에 독자적으로 쌀가게를 해볼 요량을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 쌓아놓은 신용을 바탕으로 직접 쌀을 떼어다 배달을 하면 이문을 더 남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정말 3개월이 지나자 남편으로부터 서울로 오라는 기별이 왔다. 교통수단이 마땅하지 않던 시절이라 변 여사는 시집이 있는 강원도 통천에서 서울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남편을 만나 따라간 곳은 지금의 대학로가 있는 동숭동 뒷산 ‘낙산’이라는 산동네. 꼭대기 허름한 판잣집 문간방이 거처였다. 변 여사의 회고다.


“시골서는 아무리 못살아도 작은 초가집에서라도 살았는데…. 어찌나 서글프던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 시골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회장님이 ‘서울에선 다들 이렇게 산다, 얼마 동안만 참자, 남들처럼 우리도 곧 잘살 수 있다’고 달래시더라고요. 그래서 눌러앉기로 했지요. 하지만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남편의 사업은 굴곡이 많았다. 정 회장이 쌀가게를 하며 자리를 잡을 만하니까 일제가 1939년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경일상회’란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한 지 3년이 못되어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자 난데없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차리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직원의 실수로 불이 나 잿더미로 변했다. 남편은 굴하지 않고 평소 신용이 두터웠던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 재기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서울에 다니는 승용차라고는 몇몇 귀족과 총독부 고위관리, 일본군 사령부 사단장과 참모장, 조선은행 등 큰 일본회사 몇 군데가 가지고 있는 게 전부였다. 수리공장이 별로 없다보니 차가 고장 나면 고관대작들의 발이 묶였다. 빨리 고쳐주는 곳이 최고였다. 정 회장은 열흘 걸릴 것을 사흘에 고쳐주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며 수리비를 많이 받았다. 장안의 고장난 자동차들이 정 회장이 운영하는 신설동 ‘아도서비스공장’으로 몰려들었다(아도서비스란 애프터서비스의 일본식 발음).

 

 

정 회장이 현대그룹의 모체가 되는 건설업을 시작한 것은 광복 후다. 광복 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사업에 나선 그는 건설업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한 번에 거래하는 돈은 기껏해야 30만~40만원 정도인데, 건설업자들은 1000만원씩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정 회장은 1948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해체하고 직원 대여섯 명으로 ‘현대건설’이라는 새 간판을 내걸었다.


정주영은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세 번이나 가출을 시도하며 주어진 운명에 맞선 젊은이였다. 무엇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절대 긍정의 소유자였다. 그의 ‘18번’은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평소에도 “겨울은 밤이 길어 좋고, 여름은 해가 길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렇다보니 현대그룹 회의석상에서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금기시됐다. ‘안 된다’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패배로 받아들여졌다. 정 회장이 부하 직원들을 다스리는 방식도 혹독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자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호칭도 ‘아버지’나 ‘아빠’가 아니라 ‘회장님’이었다.

 

 

   ②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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