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②

발행일: 2010-04-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박 여사는 신랑 얼굴도 모른 채 시집와 바람처럼 무위도식하는 남편을 보기도 하고 사업을 불같이 일으키는 남편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소문과 비난 속에서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기도 하면서 살았다. 인터뷰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를 1986년 ‘주부생활’(3월호)에서 인터뷰했다. 생전 풍모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1986년 2월12일 박 여사가 호암의 77세 희수(喜壽) 기념 및 자서전 출간 축하행사가 열린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 나타났다. 국내 인사 1000여 명이 모인 이날 박 여사는 분홍빛 고운 한복을 차려입어 주목을 받았다. 밀려드는 축하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 카메라맨의 집중적인 플래시 공세에도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기사를 쓴 이정규 기자는 두 시간 행사 틈틈이 박 여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음은 기사 일부다.


“소감은 어떠신지요?”


“축하야 뭐 회장님이 받으셔야지. 내야 뭐라고 하노.”


경상도 사투리가 질박하게 섞인 박 여사의 대답은 의외로 솔직하고 시원하게 나왔다. 게다가 팔순 고개에 접어든 노인의 목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하고 힘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60년을 함께 산 부부로 지금 느끼는 심정이야 각별한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그거사 그렇지만 지난 세월 돌이켜봐도 지금은 마 담담하요.”


“평소에 회장님 생신뿐 아니라 아들 딸 며느님 생일까지 일일이 기억하시고 선물을 마련해주신다던데요.”


“허이, 우째서 그런 말까지 밖에 났는가. 내사 본시 며누리라고 꼭 시어머이 노릇보다 출가한 딸처럼 생각하고 선물이라고 해야 별것 없어요. 그저 평소에 생활비 같은 걸 아껴 모아놓았다가 주거나 그걸로 조그만 선물 사서 나누어주는 것이지. 또 가을에 햇곡식이나 과일들이 들어오면 모두 불러 나누어주고.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그렇게 섰지 말고 마 앉아요.”


“댁에서 회장님 식사는 손수 해드리십니까. 아니면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직접 봐드렸제. 지금은 딸들하고 며느리들이 더 잘하니까. 나는 회장님 좋아하는 음식을 일러주고 소홀하지 않게끔 당부하고는 하지.”


“주로 즐겨 드시는 음식 종류가 뭔지 궁금한데요.”


“특별히 가리시는 음식은 없어요. 워낙에 젊었을 때부터 별 가리는 음식 없이 다 잘 드셨으니까. 요즘은 조반에는 흰죽 콩죽 잣죽에다 김, 콩 절인 것, 생선구이같이 가벼운 걸로 드시고 출근하시지.”


그러면서 특히 좋아하는 음식으로 된장찌개, 된장국을 즐겨 먹는다고 덧붙인다.

 

 


앞서 언급했지만 박 여사는 호암과의 사이에 3남4녀를 두었지만 호암은 자서전에서 ‘4남5녀’라고 적고 있다. 당시 자서전 집필과정에 참여했던 삼성 측 인사들이 “세상이 모두 3남4녀라고 알고 있는데 4남5녀라고 하면 말들이 나온다”고 간언(?)을 했으나 호암이 일축했다는 후문이다.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식 문제도 정리하고 싶었던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1남1녀는 호암의 혼외자식이다. 이는 한동안 비밀로 유지되다가 198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들 맹희씨는 책에서 아버지의 여자를 언급했다.


‘1952년 내가 동경 농과대학에 정식으로 입학을 하고 그해 동생 창희까지 일본으로 유학차 건너오자 아버지께서 구라다상에게 우리 형제들의 숙식을 맡겼다.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고국의 어머니 생각 때문에 꺼림칙한 기분을 없앨 수는 없었다. 아무리 우리가 유학을 온 처지이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를 식민지 지배한 일본의 여자라는 생각까지 들어서 괜한 미운 감정이 더 들곤 했다.


원래 구라다상은 일본의 시골 출신이었다. 요즘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살림살이는 일본은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형편이 어려웠다. 그러니 일본의 가난한 시골 출신인 구라다상으로서야 우리의 먹성이 놀라웠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아무리 어려운 나라에서 왔지만 나나 창희나 어린 시절부터 먹는 데는 어려움 없이 자랐다. 더구나 그때 창희와 나는 10대 후반과 20대에 갓 들어선 한창인 나이였으니 먹성은 더욱 놀라웠을 것이다.


결국 창희와 나, 그리고 친구 몇 명만 알고 있는 ‘계란 사건’이 터졌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구라다상으로서는 스무 살 안팎의 먹성 좋던 우리 형제와 친구 두 셋이서 어느 날 계란 20여 개를 삶아서 한꺼번에 먹어치우자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퍽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계란을 먹은 후 방안에 누워 있는데 바깥에서 구라다상이 가정부와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간 한 달 생활비로 일주일도 못 버티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20여 개의 계란을 한꺼번에 먹어치운 것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구라다상을 붙잡고 한참 욕을 했다. 아마 그렇게 한 이면에는 고국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혹은 어린 마음에 구라다상과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미움 같은 것도 작용을 한 것 같다. 그 후 일본에 온 아버지께서 구라다상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곤 우리 형제에게 체벌로써 되게 다스리곤 그 일은 ‘일본에서는’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문제란, 귀국하는 날 내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이제야 털어놓지만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동경에서의 이야기를 전했다는 점에서는 퍽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이 일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상당히 고초를 겪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로서는 남편이 일본에 여자를 두고 있다는 것도 그냥 넘기지 못할 일이려니와 집안의 장남이 먹는 문제로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점에서 퍽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 후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구라다상은 나에게는 무척 조심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큰 소리를 낸 적은 물론이거니와 더더욱 누구를 손찌검한 일은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것은 우리 남매 모두를 통틀어서 나뿐이었는데 나 역시 구라다상 사건으로 매를 맞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책에는 남편의 여자와 자식들을 받아들인 어머니 박 여사의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는 언급도 나온다.


‘지금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어느 날 구라다상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호적에 입적을 시켰다. 운명하기 몇 해 전에 ‘태휘’와 ‘혜자’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린 것이다. … 우리 호적에 그들을 입적시키는 문제를 두고 부모님 사이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머니 마음속으로야 반길 일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마찰 없이 그 일은 진행되었다. 생전 처음 듣는 일이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어머니는 일본 여자 구라다상과 그 자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호적에 입적을 시킬 무렵엔 아버지가 이미 암 선고를 받은 후였기 때문에 환자를 두고 뭐라고 말씀드리기도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호암의 사생활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 시절엔 그런 문화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더구나 가장 일차적인 당사자인 아내가 이해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다.


생전에 박 여사는 자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맏아들 맹희가 아버지의 신임을 얻지 못해 후계구도에서 탈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둘째아들 창희는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아버지 눈 밖에 난 데 이어 사카린 밀수사건을 책임지고 구속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했다. 삼성에서 독립해 새한그룹을 이끌던 창희씨는 결국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어머니의 고통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박 여사는 결혼한 이후 남편과 함께 산 기간보다 떨어져 산 기간이 더 길었다. 말년에도 박 여사는 장충동 집에서 손자들과 함께 살았고 기관지가 약했던 호암은 세상을 뜰 때까지 공기 좋은 한남동 집에서 살았다. 동정심이 많았던 박 여사는 간혹 TV 등에서 무의탁 노인 같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사람을 시켜 돈을 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박 여사는 2000년 1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0년 1월3일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진 박 여사의 빈소에는 정·재계, 금융계, 학계 인사들이 줄을 이어 조문했다. 타계한 차남과 미국에 가 있던 이건희 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주가 자리를 지켰다. 특히 당시 오랜 세월 은둔생활을 해왔던 장남 맹희씨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내 문상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상주는 맹희씨의 장남인 이재현 당시 제일제당 부회장이었다. 딸 이명희 신세계 고문의 아들인 정용진 상무와 탤런트 출신 며느리 고현정씨도 모습을 드러내 세간의 관심을 샀다.


박 여사는 한국 최대의 재벌인 삼성가의 안주인으로, 삼성 창업 68년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표상으로 사업에 전념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무심한 듯 집안에 들어앉아 자식들을 키웠다. 명실 공히 한국 최대 재벌가의 ‘마님’이었지만, 70년 세월이 넘도록 남편의 그늘에 꼭꼭 숨어 조용히 살았다.


박 여사는 생전에 며느리들에게도 잘했지만 여느 할머니들처럼 손자 손녀들에게 각별했다고 한다. 먼 길 출장 가는 손자에게 더운밥 한 그릇을 친히 먹여야 마음 편해하던 할머니였다. 박 여사의 병세가 크게 나빠졌을 때 미국 유학 중이던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가 급히 귀국해 할머니 곁을 지켰는가 하면, 숨을 거둘 때까지 손자 손녀들이 병원 주변을 떠나지 않으며 돌보았다고 한다. 발인 때 상영된 추모영상물에는 손자 재용씨의 결혼식 사진과 손자손녀들의 아기 때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지냈던 박 여사의 방안 풍경이 담겨 있었다.



생전의 박 여사는 불행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 지아비의 관심을 온통 일에 빼앗기고 몸 치장, 얼굴 치장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남편과 자식들의 뒤를 지켜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암이 타계한 후 외부에서 우려했던 가족 내 갈등이 조화롭게 해결된 것도 박 여사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수신제가에 흐트러짐이 없을뿐더러 한없이 자애로운 한국 여인의 전형인 존재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리라.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들은 밤낮없이 일에 전념한 남편들만의 공이 아니다. 박 여사처럼 남편에게 정서적 힘이 되어준 숱한 아내에게 절반의 공이 있다. 가정의 화합이란 가장의 통솔력도 크게 좌우하지만 가족 내부의 큰 그늘인 아내의 보이지 않는 조정과 사랑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내조의 여왕’이야말로 또 다른 철녀다.



<> 참고도서


● 이맹희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청산)


● 호암자전


● 호암평전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 ‘레이디경향’ 2000년 2월호 ‘92세의 나이로 세상 떠난 고 이병철 회장 박두을 여사 라이프 스토리’


● ‘여원’ 1987년 3월호 ‘박두을과 변중석(정주영 회장의 아내)’


● ‘주부생활’ 1986년 3월호 ‘최초인터뷰 이병철 부인 박두을의 결혼 60년’


● ‘주부생활’ 1987년 7월호 ‘박두을과 변중석의 내조 50년 비교’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목록

댓글 0개 / 답변글 0

댓글쓰기

‘ 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의 다른 글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2011-01-01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2011-01-01
[세기의 철녀들]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② 2010-04-01
[세기의 철녀들] 美 대통령 10명 취재한 백악관 출입기자 헬렌토머스 ① 2010-03-01
[세기의 철녀들] 美 대통령 10명 취재한 백악관 출입기자 헬렌토머스 ② 201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