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 일군 내조의 여왕
《올해로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탄생 100주년이 됐다. 호암과 삼성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이 한창이다. 거대 기업을 일궈낸 호암은 거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자식을 둔 아버지였다. 누구보다 꼼꼼하고 정확했던 호암을 너그럽게 감싸고 슬하의 자식들을 모나지 않게 키워낸 박두을 여사를 조명해봐야 할 때다.》
2월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을 맞아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렸다. 생전 호암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최근 기념 특강에서 “큰 산속에 있으면 그 크기나 깊이를 잘 알 수 없듯이 이 회장도 가까이 있을 땐 크기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떨어져 보니 정말 거인(巨人)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최 전 소장 말대로 호암이 50여 년간 기업을 일구어낸 역사는 한국의 산업사요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미소와 양조장 무역상에서 시작해 마지막엔 첨단산업인 반도체까지 씨를 뿌리고 성장시켰으니 말이다. 호암이 펼친 사업 범위는 제당 제분 모직 화학 제지 화섬 건설 조선 항공 엔지니어링 은행 보험 증권 부동산 리조트 광고 백화점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있다. 일찍이 업종별로 산업이 발전한 구미(歐美)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들고 뒤늦게 자본주의가 시작된 일본에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이 회장 자신도 생전에 펴낸 자서전 ‘호암자전’ 서문에서 이 일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삼성을 축으로 하는 사업 전개에 몰두하였다. 물론 그 도정은 역사의 파동과 무관할 수는 없었다. 어떤 때는 사업만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고 또한 어떤 때는 심혈이 맺힌 기업이나 자본을 단장의 심정으로 내놓아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사회의 곡해는 한 개인에게는 때로 과중하였다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르다.’ 이러한 생각을 되새기면서 분노와 비애를 내일에의 용기로 바꾸려고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몇 밤이었다.”
좌절이나 추락 경험이 없었을 것 같은 호암의 내면도 실로 이렇게 복잡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위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라 한다면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조차 ‘무자비(無慈悲)’와 ‘자선(慈善)’이라는 심성이 한 몸에 녹아 있는 복잡한 인간이라는 것을 최근 나온 그의 평전을 읽으며 느꼈다. 위인의 성격은 때로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고 잔인하다. 성취가 많다보니 실패도 많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위인의 진면목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동반자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결정과 선택의 순간이 반복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고 버틸 힘을 제공했던 배우자, 특히 아내야말로 철녀(鐵女)가 아닐까.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아내 박두을 여사를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호암은 1910년 2월12일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해 8월22일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됐으니 호암은 민족과 국가가 최대 수난을 겪은 해에 태어난 것이다. 가정 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호암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22년에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후 서울수송공립보통학교, 서울 중동중학교,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정경과에서 수학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호암은 부친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혼담이 이루어져 12월5일(음력)에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귀가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혼(早婚)이 관행이었다. 호암은 부친의 뜻에 따라 사모관대를 갖춘 대군복(大君服)차림으로 구식 혼례를 올렸다. 18세 되던 해 겨울이었다.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부모가 정해준 대로 혼인을 했으니 지금 세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갖게 된다.
신부는 호암보다 세 살 연상의 박두을. 1907년 11월8일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 산골마을에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아버지와 어머니 손씨의 4녀로 태어났다. 묘동마을은 순천 박씨 토착촌이었다. 박팽년의 후손답게 선비였던 아버지 박씨와 ‘교동댁’으로 불렸던 어머니 손에서 박 여사는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에 얼굴도 곱고 마음씨도 좋아 ‘두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십오륙 세 되던 무렵 어느 날, 절에서 시주를 나온 한 스님으로부터 “처녀는 앞으로 왕비가 아니면 일국의 왕 못지않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그 안방마님이 되겠소”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스님의 예견이 적중한 셈이다.
박 여사에 관한 공식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호암의 일생이 자서전과 소설, 추모집 등을 통해 자세히 알려진 것과 대조적이다. 하긴 그 옛날 내조하는 아내의 전통적인 삶이란 게 이렇게 철저히 ‘그림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남편 호암조차 286쪽에 달하는 자서전에서 내자에 대한 언급을 단 몇 문장으로 줄였다.
‘처음 본 인상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다. 슬하에 4남5녀를 두고 반세기여를 서로 도우면서 살아왔다. 내자 역시 유교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배우고 성장해서 그런지, 바깥 활동은 되도록 삼가고 집안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아 대소사가 두루 화목하다.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치장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처럼 수신제가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는 내자에게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박 여사에 대한 기록은 맏아들 맹희씨가 쓴 책이 비교적 자세하다. 삼성그룹 후계 자리를 동생(건희)에게 내준 비운의 황태자로 알려진 그는 1993년 ‘묻어둔 이야기’라는 회상록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아버지 집안이 의령 일대에서는 부자라고 했지만 굳이 비교해보자면 당시 경북 달성군에 있었던 외가 쪽이 더 부농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일수가 없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 집안 어른들에 따르면 친가 쪽도 물론 3000석 지기에 가까울 정도의 부를 지닌 집안이었고 서원을 세울 정도의 성리학자셨지만 외가 쪽 지체가 워낙 높아서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 실제 어머니는 시집 올 적에도 몸종을 비롯하여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박 여사는 호암이 일본 와세다대 유학 중인 1929년 12월2일 맏딸 인희(현재 한솔그룹 고문)를 낳은 데 이어 2년 터울로 맹희, 창희, 차녀 숙희를 낳고 이어 3녀 순희, 3남 건희, 4녀 명희를 차례로 순산해 슬하에 모두 3남4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간다면, 호암자전에서 호암은 자신의 자녀수를 4남5녀라고 적시했다. 이 중 박 여사 소생은 3남4녀이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의령부잣집 막내아들에게 시집와 아들 딸 잘 놓고 별 어려움 없이 살던 박 여사에게 생애 최초 시련이 닥쳤다. 남편이 대학을 중퇴하더니 무위도식하며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낸 것이다. 호암의 와세다대 중퇴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1학년 2학기 말 심한 각기병에 걸린 것이다. 2학년이 되자 휴학원을 내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결국 학교를 단념하고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귀향했다.
고향에서 쉬면서 곧 건강을 회복했지만 이번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호암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들과 노름에 빠졌다. 노름은 늘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무렵 호암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자성과 자제를 잃은 무위도식의 나날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날도 골패노름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26세의 그는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이 그동안 너무 허송세월을 했다는 자책이 컸다. ‘뜻을 세워야 한다. 독립운동도 좋고 관리가 되어도 좋고 사업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을 빈곤에서 구하는 일이 시급하다.’ 호암은 사업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한다. 훗날 호암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이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살려 가느냐에 있다.’(호암 평전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좌절과 실의, 무기력에 빠진 젊은 남편의 시련기를 옆에서 지켜본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마침내 호암의 사업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처음부터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은행 대출 업무가 중지되었다. 그 바람에 계약해둔 땅 등은 돈이 없어서 계약금만 날리고 결국 포기를 해야 했고 은행을 믿고 빌려 쓴 돈도 갚을 길이 막연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운수회사와 정미소, 농토 등을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호암은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사업(국수공장)을 새로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삼성상회였다. 사람들은 호암이 공장을 운영해서 쉽게 돈을 벌었고 재벌이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들 맹희씨가 기억하는 한 만만치 않았다. 호암은 아내, 맹희, 인희, 창희, 숙희와 함께 공장 귀퉁이 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이익금이든 뭐든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란 돈은 전부 공장에 다시 쏟아 부었기 때문에 생활은 넉넉지 못했다.
‘국수를 뽑으려면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먼지도 날리고 밀가루도 날렸을 텐데 그 속에 방을 정하고 가족을 기거하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업가의 기업을 키우겠다는 열정이나 욕심은 대단하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아도 우리 가족이 호의호식할 정도의 부는 축적되어 있던 상태였고, 그렇게 악착스레 하지 않더라도 기업은 조만간 성장하게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어찌 그리 힘들게 했는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맹희씨는 훗날 어른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한 남자로서, 그리고 엄청난 일을 성취한 기업인으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릴 적엔 아버지가 어찌 저리 냉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때로 가족에게 소홀한 가장에게 박 여사는 그야말로 묵묵히 내조하는 스타일이었다. 혹자는 남편을 어려워하고 무조건 남편의 뜻을 따르는 전통적 여인상이 지금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가정’을 지켜주는 아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없으면 남자의 성취도 힘들다는 것은 호암뿐 아니라 많은 경우 확인된다.
호암의 성격은 그리 녹록하지 않고, 퍽 깔끔하고 호사스러운 편이었던 것 같다. 옷도 명주로 된 한복을 즐겨 입었다. 명주옷이란 게 손질이 쉽지 않다. 박 여사는 생전에 호암이 “아침에 새 옷을 입고 나가더라도 오후에 집에 잠깐 들어왔다 나갈 때에는 반드시 또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셨다. 옷도 깔끔하게 입고 다녀서 거의 먼지도 없을 정도였지만 늘 새 옷을 입어야 외출을 하곤 했다”고 말하곤 했다고 아들 맹희씨는 책에서 전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옷을 손으로 빨아야 했고 게다가 명주옷은 복잡한 손질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어머니는 그 명주옷을 마련해내느라 퍽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하곤 한다.’
그렇게 깔끔하고 단아하고 평생 고집을 꺾는 일 없었던 남편을 내조하는 일이란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집안에서 호암의 명령은 결코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누구도 그의 명령을 받으면 “왜 그러시느냐”고 되물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어떤 이유로 부른다는 말도 없었고, 아무 부연 설명도 없었다. 오로지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는 그대로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호암은 또 생전에 정확한 일과표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워낙 매일의 일과가 시곗바늘같이 정확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는 것. 예를 들어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식사를 하고, 저녁 8시면 늘 목욕을 하는데 목욕물의 온도가 일정해야 했다고 한다. 호암은 1℃의 수온 차이도 쉽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목욕물 온도를 맞추는 것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는 특별한 수온 조절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목욕 시간이 불규칙적이면 목욕물 수온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늘 저녁 8시를 기준으로 목욕물의 온도를 맞추면 어김이 없었다. 집안일 돕는 이가 수온을 맞추어두고 목욕탕 문을 나서다가 목욕탕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와 욕실 입구에서 부딪힌 경우가 허다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목욕시간은 정확했다. 시계를 보고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었던지 지금도 신기하게만 생각된다.
아버지가 목욕탕에 들어가면 늘 목욕하는 시간도 정확하기 때문에 나와 창희, 건희 등은 그동안 바깥에서 마음 놓고 담배를 피곤하던 기억도 난다. 기상 시간도 늘 아침 6시였고, 일어나기 전에 자리에 가만히 누워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곤 했다. 아마 중요한 결정 등은 이 시간에 하는 것 같았다. 퇴근은 저녁 6신데 일을 하다 시계도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정각 6시였다.
더러 시간이 틀린다 해도 5분 정도의 차이였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늘 밤 10시에서 5분 정도의 오차밖에 없었고 심지어 월, 수, 금요일 골프를 가면 골프장에서 티업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11시였다. 이 역시 평생을 두고 어김이 없었다. 식사도 정확했다. 특히 암으로 수술을 받고 나서는 소식을 했는데 그 역시 극소량의 식사를 정확하게 했다.’(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호암이 그렇다고 소유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편도 아니었다. 그저 보고 즐기는 편이었다. 단 한 가지 상당히 욕심을 내고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은 잘 지은 한옥이었는데 결국 노년에는 용인에 있는 한옥에서 소일했다. 한옥 이외에는 큰 욕심을 가진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옷이나 생활용품이 고급품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아들 맹희씨의 말대로 호암이 평생 이룬 부(富)에 비하면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본다.
②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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