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②

발행일: 2010-02-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미국 화가이자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기수로 불리는 잭슨 폴록(1912~56)은 페기의 ‘금세기 화랑’ 기획 공모전에서 발탁된 화가다. 마룻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기법으로 ‘액션 페인팅’이라는 장르를 열며 이름을 떨쳤지만, 페기가 발굴했을 때만 해도 무명이었다. 페기가 폴록의 작업실을 찾아간 날, 폴록은 술에 취해 약속시간에 엄청 늦고 말았다. 화가 난 페기는 폴록에게 비난을 퍼부어댔지만 작품을 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페기는 안정된 상태에서 작업을 하고 싶어하는 그를 위해 매달 150달러의 생활비를 제공하고, 작품이 2700달러 이상의 가치로 팔릴 경우 화랑 몫인 3분의 1을 제외한 금액을 주기로 했다.


폴록은 금세기 미술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을 때만 해도 초현실주의와 피카소의 아류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이후 피카소를 넘어서는 위대한 화가로 발돋움했다. 페기는 폴록의 재능을 확신했다. 전시 보도자료에서 “나는 이 전시회가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하나의 획기적 사건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폴록을 미국 화가들 가운데 가장 힘차고 기대되는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확신했다. 페기의 예감은 적중했다. 페기는 난해한 폴록의 초기 작품만으로도 천재성을 간파하고 한 무명작가에게 자신의 명성을 걸었다.


폴록은 즉각 금세기 미술 화랑의 스타가 되었다. 페기는 1943년부터 1947년 미국을 떠날 때까지 폴록에게 헌신했다. 당시 페기는 에른스트를 잃은 상태였다. 에른스트가 젊은 여성화가와 바람이 나 이혼하고 만 것이다. 모성본능이 가득했던 페기는 자신이 돌봐야 하는 새로운 피보호자가 생긴 것이 반가웠다. 하지만 폴록과는 순수한 예술가와 후원자 관계였다.


페기의 자서전에는 에른스트와의 결말이 ‘쿨’하게 묘사됐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나 자신에 대한 자책 같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 ‘전시회를 위해 나는 에른스트에게 많은 일을 부탁했다. 그는 해당 여성화가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림을 자기 차에 싣고 와야 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여자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 중서부 지방 출신 예쁜 아가씨가 있었는데 상당한 재능이 있는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모방한다는 데 에른스트는 몹시 우쭐했다. 두 사람은 몹시 친해져서 내가 화랑에 있는 동안 함께 체스게임을 하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 이상의 사이로 발전했다. 결국 우리의 결혼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페기는 화랑을 경영하면서 점점 재정적 곤란을 겪었다. 그리고 지쳐 있었다. ‘나는 미국보다 유럽이 좋았다. 전쟁이 끝나자 유럽으로 돌아가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화랑 일도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노예 같은 존재였다. 점심 먹으러 나가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다. 화랑에 묶인 죄수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고 더 이상 그 긴장을 견디기 어려웠다.’


페기는 마침 프랑스문화원 공보관의 초청을 받아 파리로 가는 길에 이탈리아 베니스에 들렀다. 그리고 베니스에서 여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여러 해에 걸쳐 작품들을 이곳으로 옮기고 뉴욕의 화랑 문을 닫고 베니스로 이사한다.



베니스 운하 변의 대저택을 개조해 만든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페기가 ‘하루 한 점씩’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수집한 현대미술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가정집같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에서 복잡한 현대미술을 피카소, 몬드리안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다 가까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구성해놓았다. 뉴욕, 베를린,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20세기 전반의 주류 미술품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미술 애호가라면 빠지지 않고 반드시 순례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녀는 일생 마지막이 된 연애도 베니스에서 했다. 상대는 자기보다 스물세 살이나 어린 남자였다. 살인혐의로 징역까지 갔다 온 전과자였지만 페기는 그런 삶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페기는 이 남자의 ‘돈줄’이었다. 스포츠카를 사주고 베니스 외곽에 렌터카 회사와 자동차 수리공장까지 세워준다. 하지만 3년 뒤 남자가 스포츠카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연애는 끝난다. 자서전에서 털어놓은 그녀의 회고다.


‘그는 그저 차에만 신경을 썼고 내 친구들과 좋게 지내지 못했으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끔찍스러운 짓을 하거나 듣기 괴로운 말을 했다. 너무 외로워 그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끔찍한 것은 내가 사업을 하게 도와준 것이 그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팔자라고 해야지. 마치 그리스의 비극처럼.’


사랑을 보냈지만 페기는 대체로 활기찬 노년을 즐겼다. 때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가 귀족여인이 되었다가 하면서 인생이라는 외줄에서 흥미로운 줄타기를 했다. 곤돌라를 타고 베니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녀를 사람들은 ‘베니스의 마지막 총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를 무시했던 루브르박물관이나 구겐하임미술관도 그녀를 인정해주었다. 1964년과 1965년 테이트미술관에서 열린 ‘페기 구겐하임 소장품 전시회’는 많은 미디어의 관심 속에 8600여 명의 방문객을 끌어 모으는 대성공을 거뒀다. 폐기는 1979년 12월23일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그녀는 평범한 수집가나 후원자가 아니었다. 페기는 갤러리로 돈을 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화랑이 이룩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대담한 혼합은 20여 년 전 가족과 주위에서 기대하던 삶을 거부하고 도전한 데 대해 충분한 보상을 주었다. 그녀는 자기 재산을 자랑하는 전당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자리 잡을 장소를 창조했다. 말년에 뉴욕을 돌아보며 한 한탄에는 진정한 예술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미술전체가 거대한 투기사업이 되어 있었다. 진정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속물적인 의도로 혹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그림을 구입해 미술관에 맡겨둔다. … 몇몇 화가들은 이제 호된 세금이 매겨지는 존재가 된 탓에 1년에 한두 점만이 매매되고 가격은 비밀에 부쳐진다. 사람들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가장 비싼 것만 구입한다. 투자 목적으로 그림을 사니 감상은커녕 창고에 넣어두고 최종가를 알기 위해 매일 화랑에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들도 있다. 마치 주식을 가장 유리한 시점에 팔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600달러에도 팔기 어려웠던 화가들의 작품이 이제는 1만200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 18년 전 미국 미술계에는 순수한 개척정신이 있었다. 나는 그 운동을 지원했고 후회하지 않는다.’


변하는 시대에 대한 쓸쓸함이 담겨 있는 그녀의 말은 정신을 잃어버린 물질만능주의 세태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녀가 자서전에 적어놓은 현대미술에 대한 해석에는 20세기 현대미술을 향한 뿌리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더불어 우리가 현재 향유하고 있는 현대미술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20세기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천재를 선사했고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따금 놀려두어야 하지 않는가! 요즘 예술가들은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독창적이지 않다. 지금으로선 20세기가 배출해낸 이들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레게, 브라크, 에른스트, 미로, 브랑쿠시, 아르프, 자코메티, 립시츠, 콜더, 페프스너, 무어, 그리고 폴록에 말이다.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이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보존해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목록

댓글 0개 / 답변글 0

댓글쓰기

‘ 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의 다른 글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2011-01-01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2011-01-01
[세기의 철녀들]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② 2010-02-01
[세기의 철녀들] 패션지 ‘보그’ 편집장 애나 윈투어 ① 2010-01-01
[세기의 철녀들] 패션지 ‘보그’ 편집장 애나 윈투어 ② 201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