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①

발행일: 2010-02-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우리에겐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보물을 대중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걸 고스란히 드러내길 꺼린다. 세금과 기부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다. 한편 언제부턴가 미술품이 재테크와 투기 대상이 되었다. 이따금 현금보다 고급스러운 뇌물로 변질되기도 한다. 자신의 부와 정력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쏟아 부으며 20세기 현대미술을 살찌운 페기 구겐하임으로선 땅을 칠 일이다.》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글쓰기로 유명한 인문학자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불문학)의 글 중에 ‘불편한 진실, 계급’이란 게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평등의 신화가 너무 강력하고 계급 구분이 하도 복잡해서 사람들이 가끔 계급구조 자체를 간과하지만 계급이란 것은 여러 각도에서 존재한다며 계급의 본질을 파헤친 글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요즘 미국의 진짜 부자는 ‘보이지 않는 저택’에 사는 사람들이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가난한 여주인공이 부잣집 아들인 연인의 집을 방문할 때 자동차로 아무리 들어가도 집이 나오지 않던 장면에서 보듯 ‘숨어 있는 계급’이다.


그들이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것은 세금으로부터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질투심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때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 대한 정보가 공개될수록 득보다 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 은둔과 비밀을 택한다. 가진 자의 예의(?)를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것도 어쩌면 없는 자 가난한 자들의 질시를 무마하는 일종의 ‘보험’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미국에서 태어난 한 재벌가 여자는 자신의 삶을 대중의 노출 한가운데로 내던졌다. 그녀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 부와 재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 애썼고 계급이 갈라놓은 금기와 경계를 넘어서며 가난한 남자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20세기 현대미술계의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 이야기다.


물질이 부족한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삶의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유’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물질이 넘칠수록 영혼은 빈곤해질 수 있다. 페기는 비록 가진 것은 남부러울 것 없었으나 불행한 가정사로 고통 받으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페기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전통적인 유대인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는 남북전쟁 기간 연방군의 군복을 만드는 일로 부(富)를 쌓았다. 행상인이었던 친할아버지 구겐하임은 전세계 구리광산을 사들이는 재벌이었다. 1898년 페기가 태어나던 해 친가와 외가는 뉴욕 유대인 사회의 거목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계(家系)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외가가 심했다. 페기가 잘 따랐던 이모는 상습적으로 도박을 했고 결벽증이 있었다. 이모부는 자살했다. 외삼촌들 역시 허랑방탕했으며 돈이 떨어지면 아버지(페기의 외할아버지)를 협박했다. 그 중 한 명은 결국 권총 자살했다. 외할아버지 주변에는 정부(情婦)가 끊이지 않았다.


페기는 뉴욕 이스트 69번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훗날 어릴 적을 회고하면서 “어떤 종류의 즐거운 추억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가정교사에게 홈스쿨링을 받은 페기에게는 친구도 없었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고상한 취향을 물려주고 싶어한 아버지 덕분에 박물관 등을 다니며 고전미술에 대한 심미안을 획득했고 유럽 역사를 배웠으며 대문호의 작품을 읽었다.


사생활이 방탕한 아버지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였다. 페기는 일곱 살 때 저녁 식사 중에 “그렇게 여러 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애인이 있지요?”라고 물었다가 식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주식과 채권투자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투자가이기도 했던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일탈로 힘들어했다. 페기에게 존경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그만 타이타닉 호 침몰로 사망한다.



훗날 그녀는 자서전에서 “심리적 측면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결코 이전 상태로 회복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항상 사랑을 갈망했던 것은 아버지를 찾아다녔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아버지가 죽자 집안 형편도 급락했다. 돈은 있었지만 당장 현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주식과 채권에 묶여 있었다. 다행히(?) 몇 년 뒤 외조부가 죽으면서 어머니가 유산을 물려받아 한숨 돌렸지만 추락의 쓰라림을 맛본 페기는, 자신은 어쩌면 구겐하임 집안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많은 부(富)를 가졌지만 늘 외롭고 쓸쓸했던 아웃사이더 의식이 생긴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10대 시절에는 사회주의 철학을 가졌던 가정교사 루실 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페기에게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르친 루실 콘은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전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재원이었다. 당시 성행했던 사회주의 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페기 역시 부잣집 딸이긴 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소수자와 국외자로서 차별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에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루실 콘의 애정에 공감했다.


‘그녀(루실 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급진적이 되었고 내가 성장해온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로부터 헤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뿌린 씨앗은 내 인생을 그녀조차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가지를 뻗도록 했다.’


페기는 집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탈출하는 의식의 자유와 더불어 몸의 자유도 꿈꿨다. 20세기 여성들의 평범한 삶에서는 한없이 비켜간 일탈이었다. 그녀는 돈이나 지위 같은 세속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상대방과 영혼이 통한다 싶으면 이내 사랑에 빠졌다. 첫 남편 로렌스는 재능은 있으나 명성을 얻지 못한 작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였다. 생활력이 전혀 없는 한량(閑良)이었다.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남자와의 결혼생활은 파란만장했다. 7년 결혼생활에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이혼한다. 페기는 로렌스를 통해 예술가 인맥을 얻었다. 훗날 페기가 화랑 일을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과의 인연도 로렌스로부터 비롯됐다.


두 번째 남자는 비록 결혼은 안 했지만 5년간 동거한 존 홈스라는 예술가였다. 첫 남편 로렌스는 여자를 무시하고 챙기지 않아 페기를 고통스럽게 했던 반면, 존은 여자를 존중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늘 “여자들은 안됐어”라고 말하며 페기를 동정했다. 페기가 존에게서 얻은 것은 예술비평에 대한 통찰력이었다. 존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꿰뚫고 있는 탁월한 비평가였다. 무슨 분야든 정통했다.


하지만 존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서서히 무너져갔다. 존과 페기의 관계는 존이 간단한 허리 수술 중에 마취상태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면서 끝이 난다. 존의 죽음을 접한 페기의 솔직한 회고에는 한순간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존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갑자기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와의 사랑이 식어가면서 어느 순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결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열어준 성적 자유로움은 이후 그녀의 삶에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자신이 ‘한 남자의 부인’이었으며 오직 그 역할에만 집중했던 20대와 30대 시절을 지워버렸다. 그런 삶은 야망 없는 여인의 것이라고 단호하게 결론 내렸다. 세상은 물론 페기의 자유로운 생활을 곱게 보지 않았다. ‘돈 많은 창녀’라는 세간의 비난이 드셀 무렵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성생활을 음주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섹스를 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여흥일 뿐입니다. 나는 일이 우선이고 내 아이들도 있습니다. 양쪽 모두가 내 인생의 중심입니다. 어떤 여자든 섹스 그리고 남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활기 사랑 여성성을 유지해줍니다. 가끔 육체적 생활과 효과를 즐겨야 합니다.’


 

하지만 페기의 심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적 쾌락에 대한 몰입이라기보다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젊은 시절 가장 사랑했던 사람 셋을 예기치 않게 떠나보냈다.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시체도 찾을 수 없었고, 가장 친했던 친언니는 해산 중에 죽었으며, 인연을 맺은 남자들 중에서 그래도 그녀를 가장 사랑해주었던 존 역시 유언 한마디 없이 죽었으니 말이다.


20대에 접어들어 홀로 영국 시골에 정착하며 빈둥거리고 있던 페기에게 한 친구가 화랑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다. 페기는 앞서 소개된 오랜 친구이자 이미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던 마르셀 뒤샹을 찾는다. 뒤샹은 현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미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예술가다. 미술관에 남자 소변기를 갖다놓고 제목을 ‘샘(Sam)’이라고 한,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 작품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상에서 가장 흔한 것, 게다가 창작품도 아닌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을 미술관에 갖다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한 그의 행동은 대중과 유리되어 목적도 없이 부유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냉소이자 일침이었다. 예술에 대한 개념 자체를 뒤집은 그는 20세기 미술에 있어 피카소만큼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뒤샹은 단지 눈에만 영향을 주는 소위 ‘망막 예술’을 거부했으며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떻든 페기는 뒤샹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성공적인 화랑주인으로 변신한다. 뒤샹은 당시 미술계의 ‘신’이었기 때문에 페기는 뒤샹과 함께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페기는 화랑 이름을 ‘구겐하임 죄느(Guggenheim Jeune·젊은 구겐하임)’라고 붙였다. 첫 전시회를 ‘파리 현대예술의 선구자이며 대부’로 불리는 장 콕토 전으로 정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구겐하임 죄느는 일약 런던 예술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영국 초현실주의 화가 롤런드 펜로즈는 “런던에서 페기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구겐하임 죄느는 중요한 사건이 생기는 곳이 되었고 누구든지 그곳을 찾았으며 페기는 모든 국제적인 취향을 그곳으로 가지고 왔다”고 평했다.


두 번째 전시의 주인공은 이브 탕기(Yves Tanguy·1900~55)였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해 현대 초현실주의 화풍에 크게 기여한 작가다. 당시 전시로 그림도 많이 팔려 큰 부자가 된다. 그는 페기를 무척 좋아해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할 정도였지만 당시 페기는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아일랜드 희곡작가 사뮈엘 베케트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하지만 이후 베케트와의 관계가 갈등을 빚자 자연히 탕기와 가까워진다.) 이브 탕기는 그때까지만 해도 화단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이었다. 당시 영국 언론은 ‘그녀의 화랑은 예술가들이 명성을 얻고 나서야 전시를 해주는 그런 갤러리들과 다르다. 그녀에게는 실험정신이 있다’고 칭찬했다.


페기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전시 작품을 고르고 설치하는 것을 감독하고 그림을 팔기 위해 구매자와 흥정하는 모든 일을 잘 해냈으며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요령을 배워 해결했다. 예술가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들을 알게 되고 연애도 하고 또 도와주고 북돋아주면서 점점 예술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戰雲)이 짙어지자 페기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자기뿐 아니라 파리의 예술가들과 함께 말이다. 어떤 점에서 페기는 현대판 ‘예술가 쉰들러’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향하려고 했던 1940년 12월 유대인 유럽 탈출을 위한 비상구조위원회에 50만프랑을 기부해 유대인 구조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그녀를 통해 뉴욕에서 피난처를 찾은 미술가로는 샤갈을 비롯해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쿠르드 셀리히만 등이 있다. 막스 에른스트와는 결혼에까지 이른다.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는 20세기 현대미술에서 초현실주의 화풍을 이끈 지도적인 인물이다. 페기와 만났을 당시 이미 거장으로 평가되고 있었던 그는 당시 프랑스 마르세유에 살고 있었다. 나치의 박해로 수용소 여러 군데를 전전한 탓에 무척 늙고 수척해 있었다. 이 현대미술 거장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뉴욕현대미술관도 그를 데려오고 싶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정작 그에게 필요한 돈이나 서류 같은 것은 보내지 않았고 여권도 만료되어가고 있었다.


페기는 에른스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강력하게 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페기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로지 그를 유럽에서 빼내 뉴욕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를 다른 일행들과 함께 뉴욕으로 데려온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던 해 페기는 에른스트와 결혼한다. 에른스트는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독일이라는 적국(敵國)의 남자인데다 생활력도 전혀 없었다. 주변에서는 걱정이 많았지만 폐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페기의 예술가 지원은 에른스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뉴욕에서 무엇을 할지 정할 때까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1년 동안 매달 200달러씩을 제공했다. 페기가 남자관계가 방탕하다고 하지만 페기의 남자들은 모두 금전적으로든 미술품판매를 통한 비즈니스로든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페기는 뉴욕 7번가에 정착해 ‘금세기 미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화랑을 연다. 1942년 10월20일 개관 당일에 수백 명이 찾아올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 갤러리는 유럽에서 피난 온 미술가들이 미국의 떠오르는 미술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로버트 머더웰 등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되어 파리와 뉴욕을 잇는 다리 구실을 했다. 또한 양쪽의 교배와 제휴를 통해 추상표현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지는 현장 그 자체였다.

 

   ②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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