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무측천 ①

발행일: 2009-11-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봉건의 한계 뚫고 스스로 天子가 된 혁명적 여성 정치가


   

《시대를 지배했던 남자들의 눈에 그녀는 악행과 허영을 일삼은 요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냉철한 눈은 그녀가 정사를 주관한 기간 중국이 어느 때보다 빛나는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진보를 누렸다고 평가한다. 한낱 후궁에 불과했던 여인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이해관계를 넘나드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권력을 쟁취하기까지. 》

 

 


 

무측천(武則天)은 중국 역사 240여 명의 황제 중에 유일무이한 여성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녀가 집권하던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봉건사회가 가장 발달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아내인 황후로서, 다음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로서, 그리고 마지막 10여 년 동안은 황제로서 중국을 거의 반세기 가까이 통치했다.


군대를 동원했다거나 수구세력과 원로들을 억압했다거나 반대세력을 뿌리 뽑는다거나 하는 유혈혁명으로 권좌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왕가의 신분도 아니었다. 무측천은 천한 궁녀의 지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의 자리를 쟁취한 것이다.


당나라 시대를 연구하는 중국 당사(唐史)학회는 1985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무측천 학술토론회를 열고 있다. 그 열기가 사뭇 대단해 첫 토론회는 3년 내내 열렸다고 한다. 성인과 위인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중국 역사를 통틀어 사후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역사적 영예를 누리는 인물은 흔치 않다.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오랜 기간 인색했다. ‘무측천 평전’을 번역한 역자들에 따르면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라 할 수 있는 신당서(新唐書)는 ‘무측천이 악행을 일삼고도 도륙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요행(운)이다. 음란한 짓거리를 내놓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써놓았다. 심지어 근대 중국의 저명한 문학가 린위탕(林語堂)조차 ‘중국역사상 가장 교만하고 음탕하고 허영기가 있고 고집스럽고 명성이 나쁜 황후이며 잔인한 살인마’라고 비난했다.


무측천을 향한 비난은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식을 죽일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며 남첩을 둘 정도로 색을 밝힌 사람이었다는 것에 집중된다. 이와는 반대로 남북조 이래 파괴되었던 중국의 사회와 경제를 회복시키고 민족화합을 공고히 했던 통치력과 생산성을 높인 탁월한 업적에 대해 초점을 맞춘 연구가 부각된 것은 최근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신하들의 직언을 과감히 받아들인 도량이 넓은 군주였으며,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고 사람을 귀히 여겨 인재발굴을 위해서라면 반대파라도 적극 등용했던 현군(賢君)이었다. ‘군주의 도리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란 철학을 갖고 농업발전에도 힘써, 그의 통치기간 중 중국 인구는 652년 380만호였던 백성이 705년 615만호로 늘어나는 등 풍요로움을 구가했다고 기록돼 있다.


무측천의 삶은 그 자체로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고 사용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본질이란 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절은 변하고 사람도 변했으나, 권력이라는 목표에 돌진하기위해 치러야 할 대가와 남(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변함이 없다. 무측천이 무려 1300여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진정한 여제(女帝)로 추앙받는 것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와 얄팍한 술수로 황제나 주변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중상모략과 이간질로 적을 물리치는 대신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업을 이룬 정치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무측천이 태어난 624년은 통일 당나라가 세워진 해다. 그해에 하남 하북 강회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차례로 진압되면서 새로운 통치자 앞에 놓인 과제는 어떻게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건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고조 이연은 각종 규칙과 제도를 만들고 국가기관을 완비했으며 인재등용에 힘쓰고 지방통제를 강화했다. 이연에게는 아들이 네 명 있었는데 장남은 일찍 죽어 그가 황제에 오를 때는 세 아들만이 남았다. 결국 둘째 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는 참혹한 권력투쟁의 끝에 626년 8월 제위에 오른다. 이때 그는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바꾸는데 중국역사에서 유명한 당 태종의 ‘정관의 치(治)’가 시작되는 때다.


무측천은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처음 궁과 인연을 맺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본래부터 비천한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상으로 크게 돈을 벌어 나중에 고위관직까지 오른 장안의 신흥 권세가였다.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재상 친척의 딸로 학식과 교양을 갖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모친의 영향으로 무측천도 불교를 믿었고 어려서부터 경전을 읽었다. 아버지 무사확이 마흔여섯, 어머니 양씨가 마흔네 살에 나은 둘째딸이 바로 무측천이었다.


무측천은 아버지가 일곱 개 주의 도독으로 옮겨 다닌 덕분에 어릴 적부터 중국 땅의 절반 정도를 다 경험할 수 있었다. 규방에 머물면서 가사를 배우는 대신 비교적 개방된 환경에서 책을 읽고 그림과 음악과 춤을 배웠으니 성장 환경부터 비범했던 셈이다.


무측천은 교양과 학식도 뛰어났지만 인생을 바꾼 것은 탁월한 미모였다. 그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태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입궁시키고 재인(才人·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는다. 딸을 배웅하며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무측천은 “사람들은 천자를 뵙는 일을 복(福)으로 알고 있는데 왜 슬퍼하시느냐”며 달랬다고 한다.

 

 

당 태종은 무측천을 보자마자 맘에 들어 한다. 얼굴도 예쁘고 배움도 출중했기 때문. 태종은 그녀가 꽃과 옥같이 어여쁘다며 ‘미(媚)’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태종의 총애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측천이 너무 ‘튀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태종에게 서역에서 공물로 보낸 ‘사자총(獅子?)’이라는 말이 도착한다. 너무 몸집이 크고 성질이 포악해 길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측천이 나섰다.


“제게 철편(鐵鞭), 철과(鐵戈), 비수가 있으면 길들일 수 있습니다.”


태종이 궁금한 표정으로 “어떻게 말이냐?”고 물었다. 무측천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철편으로 때려 말을 듣지 않으면 철과로 머리를 내리치고 그래도 안 들으면 비수로 목을 찌르겠습니다.”


섬뜩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무측천을 태종은 “대범하다”고 칭찬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경계심이 일었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무측천이 궁에 있던 10여 년 동안 수많은 비빈이 승진했지만 그녀는 보통의 재인으로 알아주는 이 없는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며 시기하고 질투하던 궁녀들은 시간이 갈수록 경멸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 동안 그녀는 상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사랑에 기대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기회는 또 온다, 때를 기다리자’며 마음먹고 한 일은 ‘궁내 정보수집’이었다. 그녀는 부패한 환관들을 상대로 뇌물을 주면서 궁 안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온갖 정보를 사들였다. 돈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인심을 쓰면서 항상 따뜻한 말과 깍듯한 예로 궁 안 사람들을 대하니 점점 많은 사람이 그녀 편이 된 것은 당연지사다.


이 시기 무측천에게 또 하나의 큰 수확은 당 태종으로부터 ‘정치 리더십’을 배운 것이다. 당 태종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용했고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봉건 제왕의 본보기였다. 그가 통치한 기간 정치는 투명했고 경제는 발전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었고 국력은 강성했다. 무측천은 비록 정사에 간여할 수 있는 권력은 없었지만 태종을 시봉하면서 그의 통치술을 옆에서 보고 익혔다.


권력의 무상함도 느꼈다. 황궁이란 곳이 결코 모든 사람의 천당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황궁 한켠에는 화장을 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켠에는 늙은 궁녀의 고됨과 슬픔도 있었다.


어떻든 평범한 궁녀로 끝날 삶이 아니었다. 무측천은 말년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태종을 시봉하다 인생을 바꿔줄 한 남자를 만난다. 다름 아닌 태종의 아들 이치였다.


이치는 무측천보다 네 살 연하였다. 두 사람은 엄밀히 따지면 모자관계다. 봉건적 윤리도덕에 의하면 상궤를 벗어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 황족의 윤리관념은 비교적 엷었고 남녀 간 금기도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했다. 오랜 세월 냉대를 받았던 무측천도 이치에게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뀐다.


 

649년 5월16일 당 태종은 죽는다. 이틀 후 이치가 즉위했는데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태종의 비빈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부처님을 믿었던 그가 비빈들에게 태종을 위한 염불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무측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감업사(感業寺)로 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오직 궁중 여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감업사는 이름 없는 평범한 암자에 불과했지만, 황제에 관한 궁중비사의 유포를 막기 위해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채 바깥출입은 물론 외부손님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몇몇 비구니는 목숨을 끊거나 미쳐버렸고 영양실조로 죽기도 했다.


무측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긴 했지만 비구니가 되기를 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가 택한 것은 ‘인내’였다. 언젠가 고종이 반드시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주리라는 강한 믿음으로 비구니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뎌냈다.


그녀의 간절함이 멀리 떨어진 고종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마침내 1년 뒤 고종은 그녀를 찾았다. 태종 서거 1주년 의식을 마치고 감업사로 와 분향하고 절을 올린 뒤였다. 무측천은 그를 만나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흐느꼈다. 애틋한 연정이 되살아나기는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구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고종의 황후와 숙빈 사이에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측천의 황궁 귀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궁궐 내에서 고종의 마음은 황후보다는 숙빈에게 기울고 있었는데, 황후는 무측천을 데려오면 숙빈에 대한 고종의 애정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측천과 숙빈이 서로 질투해 다툰다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측천을 황궁으로 데려오자고 먼저 건의한 것은 바로 황후였다.


무측천은 마침내 4년간 비구니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입궁 이후 무측천은 누구보다 황후를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한다. 반면 황후는 자신의 계산대로 숙빈은 점점 고종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측천을 증오하기 시작한 황후는 이번에는 숙빈과 한통속이 되어 무측천을 제거하기로 의기투합한다.


무측천의 대응은 한수 위였다. 고종을 지극히 보살피는 한편 황후에게 배척당한 후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후궁들을 통해 얻은 황후와 숙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정보에다 거짓을 보태 고종에게 고했다. 이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암투도 이어졌다. 무측천이 자신이 갓 낳은 어린 딸을 황후가 보고 간 뒤 딸을 목 졸라 죽이고는 이를 ‘황후 짓’이라고 모함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이 일화는 여인들의 궁중암투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 와중에 고종의 총애가 무측천에게 집중될수록 안절부절 못하던 황후는 굿을 하다 무당에게 황제를 저주하는 말을 쏟아낸다. 이 사실은 바로 무측천에게 보고되고, 무측천은 바로 고종에게 일러바쳤다. 고종은 본격적으로 황후 폐위 문제를 제기했다.


655년 10월 황후와 숙빈이 모두 유배된다. 마침내 무측천이 승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자리를 손에 넣는 것 못지않게 자리를 지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언제 또 어떤 비빈이 고종의 총애를 얻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황후와 숙빈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감히 무측천과 겨루는 비빈은 없었다.




고종은 아버지 태종에 버금가는 현명한 군주였다. 신하들에게 간언을 하도록 독려했으며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긴 자를 단호히 처벌했다. 인사를 하면서도 사사로운 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고종이 우매하고 나약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무측천 평전’의 저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한다.


무측천이 정치에 개입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적 요소가 있었다. 다름 아닌 고종의 건강악화였다. 660년 고종은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력저하에 시달린다. 학질에 걸리기도 했다. 한번 병이 나면 한 달을 앓아 누어야 할 정도로 허약했다. 마음은 있으나 기력이 모자라 국정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럴 경우 그의 뒤를 이어 정사를 돌볼 사람은 아들이지만 당시 황태자 이홍은 여덟 살에 불과한데다 얼마 뒤 죽고 만다.


결국 아내 무측천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일상에서는 연인이었고 정치에서는 동반자였다. 게다가 무측천은 정치적 두뇌가 명석해 걱정스러운 문제와 곤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정세파악 능력도 대단했다.


황후로서 무측천의 국정참여는 683년 고종이 병사할 때까지 23년간 계속된다. 정사에 개입한 지 14년이 지난 674년 8월 고종은 천황으로, 무측천은 천후로 칭해진다. 한때 고종은 아예 무측천에게 황위를 넘기려고까지 했지만 재상들의 반대로 포기한다.


무측천은 국정에 참여한 이후에도 ‘한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무엇이든 남편 고종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항상 낡은 옷을 입고 근검절약을 실천하기도 했다. 대체로 황후가 할일도 하면서 정사에도 애쓴 현모양처였다는 평가다.


많은 중국 역사가는 그녀가 황제가 되려고 아들 이홍을 독살했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태자는 무측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진 바 있다. 683년 12월4일 고종이 죽었을 때에도 무측천의 박해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돌았다. 심지어 고종이 위독할 때 어의가 고종 머리에 침을 찔러 피를 내자 “어찌 감히 천자의 머리를 찔러 피를 낼 수 있느냐? 참형을 받을 짓이다”며 꾸짖은 일이 병을 낫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모함하는 에피소드로 탈바꿈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종은 오히려 무측천 덕분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약한 몸으로 34년간 집정하며 당 왕조의 태평성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고종이 죽고 이현이 황제로 즉위했으니 바로 무측천의 셋째 아들인 중종이다.



 

  ②편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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