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은 연호를 바꾼 해에 분황사(芬皇寺)를 낙성한다. 분황사는 경주시내 황룡사 터 바로 옆에 있는데, 후대에 다시 지어져 지금도 사찰로 이용된다. 선덕여왕은 이미 3만여 평(9만9000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사찰인 황룡사가 지척에 있는데도 분황사를 또 지었다. 공사기간만 3년이 걸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석공만 200여 명, 인부 100여 명을 합쳐 모두 3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이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왕위를 계승하고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정치적 틀 속에서 안주하던 방식을 어느 정도 떨쳐내고 자기 나름의 정치를 펼쳐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김기흥)이라는 분석이다.
이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여성적이다. 더구나 1915년에 일본인들이 탑을 수리하다가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뜻밖에 실패와 바늘통 같은 각종 바느질 용구가 출토됐다. 함께 출토된 금바늘 은바늘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 귀족들, 나아가 왕실이 갖고 있던 물건임을 짐작케 해 선덕여왕과의 관련성을 짚는 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이름부터 불교적이다. 아버지 진평왕은 석가모니 이름을 가졌고 어머니 이름‘마야’도 석가모니 어머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선덕이란 이름도 ‘불교경전인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모범으로 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김기흥)
여왕은 재위 15년 동안 무려 25개 사찰을 창건했다. 이는 통치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수단이라는 분석이 많다.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라 27대에 여자가 왕이 되니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이 침범하게 되었다. 만약 대궐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침해를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를, 제3층은 오월을, 제4층은 탐라를, 제5층은 응유를, 제6층은 말갈을, 제7층은 단국을, 제8층은 여적을, 제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삼국유사’ 권3 탑상 4 황룡사구층탑, ‘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실제로 선덕여왕 즉위 후 통치가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642년 가을,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성을 빼앗아갔고 그해 8월에는 백제 고구려 연합군이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고 했다. 또 같은 달 백제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조카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기도 했다. 놀란 여왕은 자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리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선덕여왕은 불교세력을 정치에 이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뜬’ 인물이 자장이다. 진골 귀족 출신 자장은 높은 관직을 사양한 채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닦았다. 그는 유학 중 직접 문수보살을 보았다면서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집안과 같이 부처님으로부터 미리 특별한 약속을 받은 종족으로 다른 귀족들과는 출신 성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직접 들었다고 전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자장은 여왕의 배려로 당에서 공부했고 다시 여왕의 뜻에 따라 귀국했다. 그는 당 유학 중에도 단지 불법을 닦는 데 그치지 않고 늘 신라의 안전을 걱정하며 여왕 통치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로 알려졌다. 자장은 귀국 후 여왕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여왕을 깔보지 못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여왕은 그를 황룡사 사주 겸 국통에 임명해 불교교단을 정비하고 전국의 승려를 조직화했다.
자장은 국민을 상대로 보살계를 주었는데, 이 보살계는 살생을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재미로 살생을 하면 문제가 되지만 나라나 부모를 위한 살생은 괜찮다는 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던 국민에게 살생은 죄가 안 된다고 함으로써 불교가 전쟁 수행을 중시하는 세속의 가치와 대립되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선덕여왕은 왕 자신이 불교세력에 의지함으로써 기존 정치세력과 무관한 새로운 세력을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첫 번째 여왕’으로서 선구자적 어려움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자장조차 중국에 유학하면서 태화못이란 곳에서 만난 신령으로부터 ‘여자가 통치를 하면 나라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록(‘삼국유사’)이 있다. 사람도 아닌 유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귀신조차 여왕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남성들 사이에도 여성비하 의식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덕여왕은 결국 말년(647년)에 대규모 반란사태에 직면한다. 비담과 염종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삼국사기’ 권5. 선덕왕 16년)
이 난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왕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수많은 귀족이 가담해 여왕에게 엄청난 심적 고통을 안겼다. 난에 가담한 조정 신료가 30명에 달해 주요 직책을 맡은 신료 중 적지 않은 수가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담은 선덕여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비하해 부를 정도였다.
비담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귀족이었다.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때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상대등’이었다. 그는 당시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니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을 전하며 반란세력을 규합했다고 한다. 후계자(진덕여왕)까지 여왕으로 정해지자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된다. 김유신은 당시 특별한 존재였다. 부친 서현이 이미 왕실의 일원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해 왕실이 외가였으며 여왕의 조카이기도 한 김춘추와 그의 여동생(문희)이 결혼해 왕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김유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하고, 한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른 전쟁터로 달려가는 등 충성심과 용맹심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을 철저하게 지지하고 보호하려 애썼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한 말에는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의 이치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김유신은 여왕이 통치를 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대해 군신관계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명분을 들었다. 일부 귀족들이 여자를 비하하는 것에 대한 반대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역사상 첫 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시대상황마다, 왕마다 서로 달랐다. 당과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후 다시 당의 공격을 받은 문무왕 때는 당에 대해 당당했던 여왕을 향한 추모 분위기가 일었다. 당시 문무왕은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를 성전사원으로 관리하고 자신도 이 영묘사 앞에서 열병행사를 할 정도였다.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구층탑을 중수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에서도 여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 속에서 국가를 수호하는 위업을 닦았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이르러 헌안왕은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 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 된다. 사위(경문왕)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면 반드시 선조로부터 이어온 훌륭한 왕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삼국사기’ 권11 헌안왕 5년 봄 정월) 그가 이 말을 한 30년 뒤에 경문왕의 딸인 신라 세 번째 여왕, 진성여왕이 즉위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덕여왕은 재위 5년째인 636년부터 병이 나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종욱 교수는 여왕의 말년을 이렇게 기술했다. ‘선덕여왕은 636년 3월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는 고칠 수 없어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기도 했다. 어떤 병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으니 그 후 10년간 병에 시달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647년 1월8일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 열흘 후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비담)의 목이 떨어졌다.’(‘춘추’)
이 교수는 ‘신라의 역사’라는 책에서 신라시대 여성의 지위가 딱히 높지는 않았다고 밝힌다. 부계제 사회였기 때문에 혼인을 하면 여자는 남자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여자 집안의 신분이 높으면 남자가 여자 거처로 옮겨 여러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라는 신분의 지배가 ‘부계’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왕이 나왔다고는 해도 다른 관직에 여성이 임명된 예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여자들도 권력게임에 합류했다. 7세에 왕이 된 진흥왕의 뒤에서 섭정한 지소태후나 진평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사도왕후와 미실 등이 진지왕을 즉위시킨 과정에서 왕실 여성들의 역할이 막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독특하게 여성들 중 왕비를 공급하는 가계(인통)가 있었다고 한다. 지배세력의 부인들을 배출하며 세력을 유지하는 독특한 가계(진골정통 대원신통)였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종욱 ‘춘추’)라고 한다.
이처럼 신라를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철저한 신분제(골품·骨品)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다시 선덕여왕이 소설 드라마 같은 문화 아이콘으로 등장한 이유로는 뭐니뭐니해도 여성의 지위 향상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달라졌음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성들보다 뛰어난 힘을 가졌다거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남성들과 비교해볼 때 여러 측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등극이 이뤄진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조범환)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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