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존재로 거듭나는 사람
“저는 어려움이 닥칠 때면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어려움은 내게 뭘 가르쳐주려고 내 앞에 온 걸까?’” - 오프라 윈프리
3월11일 MBC ‘무릎팍 도사’ 가수 백지영 편을 보았다. 그녀는 지난해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데뷔했을 때와 얼굴이 많이 다른 이유는 성형수술 덕분”이라고 고백해 ‘솔직한 성품’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 이날 인터뷰는 그야말로 ‘솔직 버전’의 백미였다.
그녀는 8년 전 비디오 사건으로 시련을 겪었던 일을 비켜가지 않고 정공법으로 받아쳤다. 당시 일 때문에 오랫동안 ‘쇼크 상태’에 빠졌었다는 것, 모든 이의 눈을 피해 한 호텔 9층에 머물고 있을 때는 창밖을 바라보며 ‘여기라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는 고백도 했다. 당시 힘이 되었던 남자 친구 이름까지 공개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방송 이후 게시판에는 “어려운 일을 겪고도 씩씩하고 밝은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진짜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같은 응원 글이 이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무슨 일을 겪었는가’가 아니라 ‘그 일을 겪을 때 어떻게 이겨나갔는가’ 하는 ‘위기 그 후’의 이야기에 목말라하고 있다.
‘백지영 현상’을 보며 기자는 뜻밖에 오프라 윈프리를 떠올렸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에서 지금은 미국인의 정신적 평안을 이끄는 ‘영적 구루(guru·스승)’로 추앙받는 오프라를 성공으로 이끈 키워드 역시 ‘고백’ 아니었는가.
그녀는 불우하게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흑인 미혼모였다. 오프라는 자신의 탄생이 “(생모와 생부가) 나무 아래에서 했던 단 한 번 실수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당시 부모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단 한 번 실수’ 이후 고향을 떠난 생부는 나중에 출생증명서와 함께 아기 옷을 받아들고서야 자신의 딸이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였다.
오프라는 외조부모, 생모와 함께 미시시피 농장에서 자랐다. 늘 배고픔에 시달렸을 정도로 가난했다. 오프라가 네 살이 되었을 때 생모는 일자리를 찾아 타향(밀워키)으로 떠나야 했다. 오프라는 외할머니를 엄마라 생각하며 자랐다. 몇 년 뒤 오프라는 생모가 살고 있는 밀워키로 떠났다. 그곳에는 이미 배 다른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생모는 파출부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에 집안은 가난했고 분위기는 늘 우울했다.
오프라는 정(情)을 느끼지 못하는 생모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단란한 가정을 그리워했다. 꿈이 이뤄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생활이 어려워 오프라를 도저히 키울 수 없다는 생모의 연락을 받은 생부가 오프라를 맡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도 생부와 계모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 오프라는 모처럼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몇 년 뒤 오프라는 생모가 ‘살기가 괜찮아졌으니 밀워키로 다시 오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생부가 사는 내슈빌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인다.
오프라가 ‘비행 청소년’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아버지와의 단란한 생활에서 다시 생모와 불편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열네 살 오프라는 생모 집에서 돈을 훔쳐 가출하고 청소년들과 성관계를 갖는 등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청소년감호소에 수용된다. 우리로 치면 소년원에 간 셈이다. 다행히 감호소가 만원이었던 덕에 오프라는 집에서 특별훈육대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비행청소년으로 분류되었고 본인의 뜻에 따라 생부가 있는 내슈빌로 돌아간다.
이미 오프라는 임신 상태였다. 사이즈가 큰 옷만 입고 다녀 배가 불러와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해 임신 7개월이 넘어서야 아버지에게 들킨다. 유산하기에도 너무 늦은 때였다. 결국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2주 만에 죽었다. 아이의 죽음은 오프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대를 이어 가난한 흑인 미혼모로 살아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프라는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무언가를 잃은 게 아니라 더 큰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엄마’라는 인생 대신 “새 인생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오프라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천성을 갖고 태어났다. 못생기고 뚱뚱한 검둥이 소녀였지만 말문이 터진 세 살 때부터 교회 연단에 올라가 말하기를 좋아했다고 하니 말재주는 타고난 것 같아 보인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런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걸린 게 라디오방송국 진행자였다. 화려한 삶을 꿈꾸던 오프라에겐 날개를 달아준 절호의 찬스였다. 그녀는 죽어라 일에 매달렸고 마침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엔 내슈빌 WTVF-TV 방송국 첫 번째 여성 뉴스 앵커로 발탁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흑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3년을 보낸 후 규모가 큰 볼티모어 WJZ-TV 방송국 6시 뉴스 앵커로 발탁되지만 난관에 봉착한다. 방송국 담당자가 오프라의 뉴스 전달이 너무 감정에 치우친다며 아침 토크쇼진행자로 좌천시킨 것이었다. 화재 사건을 보도하던 중 사건 보도보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동정하는 데 더 치중해 객관성과 중립성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프라는 울며불며 항의했지만 이 일이야말로 그녀를 토크쇼의 여왕으로 만들어준 전화위복이 되었다.
토크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당시 토크쇼의 제왕 ‘필 도나휴 쇼’를 앞서갔다. 비결은 뜻밖에도 그녀가 뉴스를 진행할 때는 단점으로 지적됐던 ‘시청자와의 동일시’ 능력이었다. 시청자의 고통과 아픔을 자기 것으로 느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안아주는 오프라에게 스튜디오에 나온 게스트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만난 듯 속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쇼가 처음으로 전국에 방영된 1986년 근친상간을 다룬 프로그램에서 중년여인이 ‘성폭행 당했다’고 말하자 오프라는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는 카메라에다 대고 갑자기 광고방송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고, 광고가 나가는 동안 스튜디오에서 그 여인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성폭행의 고통이 어떤지 잘 안다면서 자신 역시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는 그녀의 행동은 매번 진심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오프라는 1984년 WLS-TV방송국 ‘시카고의 아침(A.M 시카고)’ 단독 진행자로 발탁되어 시카고로 옮긴다. 이 30분짜리 토크쇼는 방송 3개월 만에 시카고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던 필 도나휴 쇼를 앞질러버렸다. 그녀 나이 서른이었다. 비행청소년에 못생긴 흑인처녀가 3000만달러의 연봉과 수백만의 열광적인 팬을 거느린 스타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1년 뒤 오프라에게 패배한 도나휴는 뉴욕으로 진출해버렸다. 이제 시카고는 오프라 손 안에 들어왔다. 1986년 윈프리 쇼는 전국적으로 송출되면서 이후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아예 자신의 쇼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회사(하포 프로덕션·Oprah를 뒤집은 말)를 설립해 쇼의 소유권까지 가져옴으로써 본격적인 사업가로 나선다.
‘오프라 쇼’의 무서운 질주에 대해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렇게 분석한다.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게 단시간에 정상의 TV토크쇼 진행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터뷰를 하는 실력으로 보자면 필 도나휴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 하지만 윈프리는 자기에게 부족한 저널리즘적 요소를 솔직함과 건강한 유머,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상쇄해버렸다. 오프라는 슬픈 사연을 들려주러 나온 게스트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 일쑤다. 그러면 게스트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던 가슴속 이야기를 공중파 TV시청자 앞에서 술술 쏟아놓는다. 이 토크쇼는 집단 상담 테라피다.’
아무리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또 아무리 작가가 써주는 시나리오가 있다 하더라도 드라마가 아닌 이상 방송 토크쇼는 게스트와 호스트 간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장 큰 경쟁력이다. 누구라도 스튜디오에 나오면 긴장하게 마련이다. 이 긴장감을 풀어주어 마음을 열어 결국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 진행자의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오프라는 타인의 입을 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를 갖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나부터 먼저 고백하기’였다. 아홉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아버지 친구를 비롯해 삼촌은 물론 학교 동급생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고 급기야 미성년이던 10대 초반에 아이까지 낳았다는, 삶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경험을 방송에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자신이 어떻게 이겨나갔는지 지속적으로 시청자에게 알렸다.
낮 시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은 신비로움으로 포장된 은막의 스타들과는 달리 친근함을 주었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구나’하는 연민의 마음이 텔레비전 앞으로 시청자를 모이게 한 것이다.
오프라의 고백은 핵폭탄급 비밀 이야기부터 주말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고 어떤 유명인사를 만나 가슴이 설레었으며 콘택트렌즈 대신 안경을 쓰고 하이힐 때문에 불편해 죽겠다는 식의 시시콜콜하면서도 사소한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살과의 전쟁’을 생중계한 것도 유명하다.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로 비만 때문에 늘 고민했던 오프라는 시청자에게 수년 동안 자신이 체중과 벌인 싸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30kg에 달하는 쇠고기를 실은 작은 수레를 끌고 무대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동안 자기가 줄인 몸무게와 똑같은 무게의 고깃덩어리였다.
그녀가 체중과 벌인 사투는 단지 날씬한 몸을 보여주겠다는 과시가 아니라 의지, 인내, 순수한 야망, 희생, 극기,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로 비쳤다.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이야기, 성공의 순간이 아닌 성공에 이르는 힘겨운 과정을 생중계하면서 ‘대중과 하나 되기’가 그녀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삶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오(O) 매거진’에 기고하는 정기칼럼 ‘내가 확실히 아는 것(What I Know for Sure)’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름대로 영적 종교적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면 “맙소사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어려움은 내게 뭘 가르쳐주려고 내 앞에 온 걸까?”’
늘 사랑받지 못하는 계집아이라고 느끼며 10대 시절을 보낸 오프라는 언젠가는 꼭 성공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해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이처럼 ‘삶에서 만난 장애와 고통을 해석하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능력은 고백하며 얻었다.
‘내가 고백을 통해 배운 것은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뭔가에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두려움 그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직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내가 지금껏 겪은 모든 고통의 조각들이 쓸데없는 근심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쓸데없는 근심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절망에 빠질 때에도 그것을 시청자와 공유하려고 애썼다.
‘나는 과거에 학대로 깊은 상처를 입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치유되었다고 확신할 때에도 나는 완전히 치유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수치심을 안고 살아갔고 나를 성폭행한 남자들의 행위를 핑계로 내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탓했다’.
멋진 몸을 선보이고도 몇 달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살이 찌기 시작하자 절망감에 빠져들어 ‘나는 다시 결단력을 잃고 말았다’는 것을 그대로 알리기도 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오프라의 고백을 통한 ‘테라피’(Theraphy·치료) 문화코드가 힘을 갖게 된 데는 미국사회 특유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이 있다고 말한다.
②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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