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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②

발행일: 2009-04-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1950년 10월7일 단 열두 명의 수녀밖에 없던 테레사 수녀그룹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사랑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총장을 ‘마더(mother)’라고 부르기로 해 이날부터 테레사 수녀는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사랑의 선교회’는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다해 헌신한다’는 것을 서원으로 두었다.


남을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돕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수녀회가 사랑의 선교회 수녀 자격으로 ‘정신과 육체의 건강’ ‘배우려는 자세와 배울 수 있는 능력’, 그밖에 ‘성격이 명랑하고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굳센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의 강조였다.


수녀는 또 가난한 사람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틈만 나면 선교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지식 평화 진리 정의 사랑에 목마른 사람, 집뿐만 아니라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이 모두 가난한 사람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가장 큰 악은 사랑과 자비의 부족, 이웃에 대한 얼음같이 찬 무관심입니다.”


선교회 활동을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도 내부에서의 반대와 오해였다. 가장 큰 오해는 테레사 수녀가 힌두교 중심지에 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신전을 더러운 사람들로 더럽힌다는 항의도 있었다. 힌두교도들의 데모가 숱하게 일어났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우리를 죽이면 하느님 계신 곳에 더 빨리 갈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힌두교도들의 반발은 두 가지 사건으로 잠잠해졌다. 불만을 접수하고 선교회에 출동한 경찰이 오히려 감동을 받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수녀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몸을 씻기고 간호해주는 것을 본 경찰은 오히려 성난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외국인 수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러분의 주장대로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 직접 가서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어머니와 자매들을 이곳으로 데려와서 그 여자가 하고 있는 일을 대신하게 하라.”


한번은 힌두교 승려 한 사람이 결핵 말기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결국 그가 몸을 누인 곳은 사랑의 선교회였다. 그는 이곳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찾아와 테레사 수녀에게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30년간 사원에서 신에게 봉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신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제 앞에 와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나신 신께 경배하게 된 것은 저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고 이웃을 씻어주고 먹여주고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선교회에 저항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다.


마더 테레사가 전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와 보니 남자는 이미 숨이 끊겼다. 얼굴을 물에 처박은 상태였다. 죽기 전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외롭게 죽어간 사람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듯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면….’ 수녀가 죽어 쓰러진 짐승처럼 길 위에서 죽어간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도도 3세기 반에 걸친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섬기는 신이 다르고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다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캘커타가 있는 서벵골에서는 분쟁이 유독 격렬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해에 따른 인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47년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졌다.


파키스탄은 다시 동서로 갈라졌다. 동 파키스탄은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로 완전 독립한다. 이때 인도가 방글라데시 편을 드는 바람에 서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늘 그렇듯 힘없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이었다. 목숨만 겨우 건진 사람들은 대도시 캘커타로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넘쳐나는 캘커타에 난민이 몰려들자 캘커타는 빈민소굴이 됐다. 공터뿐 아니라 공원, 도로까지 판잣집으로 메워졌다. 1971년 시청 발표에 따르면 캘커타 전체 인구 1000만 중 노숙자가 40만이었다. 길거리에서 자고, 심지어 아이도 길에서 낳는 사람이 허다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도 흔했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상황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상상이 간다. 어느 날은 길에서 쥐와 개미에게 반쯤 먹혀버린 여인의 시체를 보았다. 시궁창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를 데려와 돌보아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저는 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받고 보호받으니 천사가 되어 죽는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3시간 후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수녀는 사람이 홀로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씨앗이 되어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이 문을 열었다.


마더 테레사가 가난하고 병든 인도인들에게 베풀고 싶었던 것은 단지 물질이나 간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살아 있는 단 한 시간만이라도 그들 각자가 하느님에게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선교회에서 따뜻한 간호와 치료를 받은 이들은 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중요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초의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사랑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배운다고 말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구더기가 이 여인의 몸을 파먹고 있었다. 여인을 침대에 눕히자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테레사는 “일찍이 사람 얼굴에서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여인은 “감사해요”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지만 테레사 수녀는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내가 만일 이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한테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추워요, 배고파요 하면서 어서 나에게 먹을 것과 옷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여인은 내가 그녀에게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고 사랑을 주고 갔다.’


사랑의 선교회 활동은 이제 전세계로 확산됐다. 테레사 수녀는 선진국이건 개발도상국이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시설을 만들고 수녀들을 불러 모았다.


뉴욕 런던 멜버른 등 선진국 대도시에는 육신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멜버른 시내 뒷골목에서 마더 테레사는 한 노인의 집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창문은 닫혀 있었고 실내는 한 번도 청소를 안 했는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옆에는 몇 년 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램프가 눈에 띄었다. “왜 램프를 켜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인은 “누구를 위해서 불을 켜느냐”고 되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니 불빛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세상과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으로선 당연한 대답이었다. 수녀는 “앞으로 내가 찾아오면 램프를 켜겠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켜두겠다”고 말했다. 외로움에 절어버린 노인의 모습이란 현대사회의 섬처럼 분리된 개인의 모습을 은유하는 듯하다.


1979년 12월11일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모든 곳에 캘커타가 있다’고 한 그녀의 연설은 나눔철학의 정점을 보여줬다. 마더 테레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 시작하면 누구나 ‘사랑의 선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일생은 믿음과 복종,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불굴의 소망으로 점철된 삶이다. 하루 중 1분 1초도 자신을 위해 쓰는 법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할 때 그녀는 기쁨으로 충만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겼다.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께 무언가를 거절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에너지는 침묵과 묵상이라는 내적 수행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 역시 내적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선교회 사업을 시작하고 3년 뒤인 1953년 3월 대주교에게 보낸 고해성사 편지에는 이런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제 안에는 모든 것이 죽어버린 듯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사업’(선교회)을 시작한 즈음부터 계속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몇 해 동안 말없이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의 마음상태를 아주 가끔 모호하게 드러냈다. 그러다 마침내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청한 것이다. 대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1년 뒤 테레사는 더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가장 믿었던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소외감으로 가득했다. 아마 이런 심적 상태는 선교회라는 조직을 이끌면서 겪어야 했던 인간적인 고통과 연결된 것이었으리라.


‘제가 예수님을 원하면 원할수록 예수님은 저를 덜 원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예수님과 멀어진 느낌, 끔찍한 공허함, 하느님이 제 옆에 계시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그녀 사후에 공개된 고해성사 편지들은 구구구절 절박함으로 가득하다. ‘제 영혼은 너무 많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느낌에 공허함까지 계속되어 신앙도 사랑도 열정도 없습니다. 영혼도 저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천국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누구이기에 저를 버리십니까. 저는 이렇게 애타게 부르고 매달리며 간절히 원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입니다. 어둠은 너무나 짙습니다. 저는 버림받았습니다.’


그녀는 평생 표면적으로는 명랑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일도 열심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위선적인 가면은 아니었다. 그녀라고 펑펑 울고 싶었던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1957년 예수회 요셉 노이너 신부는 독일의 한 선교잡지에 테레사 수녀와 그녀의 사업에 대한 글을 실었다. 뜻밖에 수녀는 자신의 고뇌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쓴 노이너 신부의 회상에는 테레사 수녀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수녀님은 내적 시련을 겪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복잡하게 얽힌 환상의 희생자가 된 것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왜 그녀를 버리셨을까? 왜 그녀는 지금 이런 어둠을 겪는 것일까? 마더 테레사에게 몇 년 동안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다른 수녀님들을 지도하며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수녀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마음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처럼 떠들어대는 고약한 위선자가 된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힌 것은 시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그녀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차츰 고요와 평화로 바뀌어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진정한 사랑은 ‘굴복’임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신께 굴복하니 가난한 인도인들이 단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됐다.


모든 이에게 거절당한 채 고통 속에 버려진 캘커타 거리의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영성생활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료 수녀들의 모습도 새롭게 보였다. ‘그녀들이 점점 하느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심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테레사 수녀는 결국 오랜 내적 어둠 속에서 신의 부재를 느끼는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큰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체험한 것이다.


1975년에 설립 25주년을 맞은 ‘사랑의 선교회’는 전세계 15개국 85개 분원에 3000명 이상의 수녀를 가진 수도회로 성장했다. 이후 전세계로 급속히 확장됐고 마침내 세계 언론이 마더 테레사와 캘커타의 기적에 주목했다.


마더 테레사는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다. 1987년 멕시코 슬럼가를 돌보던 때에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켜 미국에서 가슴에 심장 박동기를 다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수술 후에도 “나는 선 채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싶다”며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처럼 일했다. 1996년부터 테레사 수녀는 자주 입원했다. 말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침대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정신도 큰 고통을 겪었다. 이즈음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너무 많은 것을 (나에게) 원한다”는 말로 심적 고통을 표현했다.


1997년 9월5일 오후 9시30분, 테레사 수녀의 목숨이 꺼졌다. 마더 테레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최후의 순간에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주변사람들은 그녀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을 준비하며 ‘하느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누군가 “마더,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 마더 없이 살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면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제가 천국에 가면 여러분을 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거예요.” 모든 것을 비운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두 똑같은 육신을 갖고 태어나지만 정신의 숭고함으로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마더 테레사는 증명해냈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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