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 각지의 유대인 집단수용소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아우슈비츠와 부켄벨트, 닷 하우처럼 악명 높은 수용소의 처참한 광경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가스실이라던가 유대인의 몸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소식 등은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쌓인 시체가 산을 이루고 역겨운 피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 그곳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도살장이었다. 골다는 통곡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라도 국가 흉내라도 냈더라면 수십만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유대인이 나치의 오븐이나 가스실에서 구출됐을지 모른다고 울부짖었다.
1947년 11월29일 유엔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각각 창설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한다는 분할 결정을 내린다. 유대인들은 환호했다. 마침내 2000년 동안 세계 각지를 유랑하며 겪었던 박해와 수모가 끝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은 끝이 아니었다. 분노한 아랍인들이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서 테러를 일으켜 유대인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경지대에까지 군대를 배치해 유대인들의 숨통을 조였다. 테러는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퍼졌다. 전쟁밖에는 달리 맞설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무기였다. 돈이 없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수백만달러가 필요했다. 당시 이 달러를 줄 수 있는 건 미국 유대인밖에 없었다.
골다는 옷을 챙길 새도 없이 서둘러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1947년 1월이었다. 예정에도 없이 유대인 복지기금연맹총회에 참석해 연설을 시작했다. 원고도 없이 연단에 섰다. 긴 연설은 아니었으나 비장한 각오로 가슴에 있는 모든 것을 토로했다.
“지금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최후까지 싸우려 하고 있습니다. 무기가 있으면 무기를 들 것이고 없으면 돌이라도 들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70만명이 살아나면 유대민족이 살아날 것이고 유대인의 독립이 보장됩니다.
우리 모두는 승리를 믿습니다만 무기 없는 정신은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민족 중에서 최선의 민족도 아닙니다. 단지 어쩌다 우리는 거기(팔레스타인)에 있게 되었고 당신네들은 여기(미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팔레스타인에 있었고 우리가 미국에 있었다면 당신들이 우리가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을 할 것이고, 당신들이 이곳에 와서 바로 지금 당신들이 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싸울 것인지 싸우지 않을 것인지는 당신들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결정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공동체는 아랍 폭도에게 백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오직 한 가지만 결정해줄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인지 아니면 아랍인이 승리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 결정은 미국의 유대인들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간청하는 것은 너무 늦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청중은 경청했다. 울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지역사회에도 내본 적이 없는 액수를 기부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보고받은 벤 구리온은 “언젠가 역사에 돈을 모금한 한 유대인 여성이 유대인 국가 수립을 가능하게 했다고 씌어질 것이다”고 극찬했다.
1948년 5월14일 텔아비브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반주 없이 국가를 부르고 선언문 전문을 읽기까지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가!’ 드디어 해낸 것이다. 더 이상 유랑은 하지 않아도 좋다. 골다는 울고 또 울었다. 이스라엘은 지구상에 하나의 ‘실존’이 되었다. 5월14일 밤 자정이 넘은 시각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인정했다는 낭보도 전해졌다. 하지만 독립 선포는 기쁨과 환희가 아니라 불안과 공포 속에서의 출범이었다.
바로 이튿날, 아랍군들이 사방에서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북쪽에서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동쪽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공격해왔다.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결사 항전했다. 병력과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선에서 승리하는 기적 같은 전과를 올렸다. 마침내 1948년 7월18일 이집트와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건국을 기정사실화했다. 젊은 이스라엘인 6000명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이 숫자는 당시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스라엘은 1949년 1월 첫 총선에서 내각을 구성하고 초대 총리로 벤 구리온을 임명했다. 건국의 일등 공신 골다는 노동장관에 임명됐다. 그녀가 맡은 일은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직장을 배정하고 도로를 놓고 주택시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직업훈련도 시켰다. 이주민이 엄청나게 늘어 국가 창설 1년 반 만에 30만의 인구가 불어났다. 골다는 이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951년 뉴욕에 머물 동안 남편 모리스의 부음을 들었다. 오랜 별거생활을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하고 헌신적인 아빠였다. 남편의 죽음조차 가까이에서 하지 못했으니 골다의 비통함이 컸다. 격무와 잦은 외유로 어깨관절이 탈골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응급처치만 받고 유엔 연설을 위해 소련으로 떠나야 했다. 다 자란 아이들과 손자 손녀 볼 시간도 없이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사생활 없이 오로지 국가에 헌신했다.
1956년 골다는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외부 정세는 좋지 않았다. 이집트는 최신 무기를 대량구입하면서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파괴를 외쳤고 실제 폭탄테러를 하기도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국제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시리아 요르단과 함께 단일 군사체제를 공식선언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카드는 선제공격뿐이었다. 그해 10월말 이스라엘군은 불과 100여 시간 만에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 수에즈운하에 이르렀고 소련제 무기를 노획했다. 하지만 평화를 깨뜨린 주범으로 몰려 국제여론의 빗발치는 항의를 들어야 했다.
이스라엘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한 골다는 난처했다. 그녀는 이집트의 공격 계획서를 제시하면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은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녀의 해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중심부 국가보다는 아프리카 주변국과의 관계에 힘을 쏟았다. 될 수 있는 한 타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해 이스라엘 ‘왕따’를 완화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1963년 벤 구리온이 임기를 2년 남겨두고 사퇴하자 그녀 역시 공직을 떠났다. 손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긴장으로 누적된 수십년간의 피로를 녹여냈다. 그러나 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알려진 제3차 중동전이 벌어졌다. 군사적으로 포위된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비행기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이다. 불과 3일 만에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골란고원을 빼앗고 다마스커스 인근까지 진격해 1948년 이래 분할돼 요르단 통치하에 있던 예루살렘 구(舊)도시까지 탈환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스라엘에 ‘6일 전쟁’ 이전 상태로 철군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거부했다. 1967년 6월5일은 이스라엘 공군 역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7시10분 이스라엘 공군은 전투기 12대만 지상에 대기시켜놓고 나머지 전투기를 모두 출동시켰다. 지중해 상공으로 날아간 뒤 저공비행으로 이집트를 향해 접근했다. 오전 두 차례 기습으로 이집트 전투기 309대를 파괴했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19대가 격추됐다. ‘6일 전쟁’은 개전(開戰) 30분 만에 승부가 결정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에쉬콜 총리가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따라 후임 총리로 71세의 골다가 취임한다.
감격과 영광도 잠시, 이스라엘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중동 정세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는 때가 많았다. 1970년 9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과격파 게릴라들에게 암살당하자 아랍권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했다. 후임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반환을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확장해나갔고 시리아 역시 전열정비에 박차를 가해 제4차 중동전 조짐이 번지고 있었다.
1973년 10월6일 새벽, 마침내 소련제 탱크와 미그 전투기를 앞세운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남과 북 2개 전선에서 물밀 듯 진격해 들어왔다. 전쟁 시작 3일 만에 이스라엘 요새는 대부분 이집트군에게 점령당했고 북부의 골란고원은 시리아군에게 점령당했다.
이 전쟁은 골다에게 최대 위기를 안겨주었다. 개전 9시간 전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을 결심했다는 작전 참모회의 보고를 받았지만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가하면 침략자로 몰릴 것이고 미국이 대(對)이스라엘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일간 벌어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약 2500명의 사망자와 7500명의 부상자 등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인구 300만 남짓하던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소련의 대(對)아랍권 원조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선제공격의 유혹을 뿌리친 바람에 미국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분노한 민심은 그런 것까지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집무실에는 자식과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찾아와 울부짖었고 참전병사들도 “왜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골다는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설득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이스라엘 국민은 그녀를 다시 총리로 선출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존경이 변치 않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승리한 지 불과 몇 개월 후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 악화되면서 그녀는 결국 은퇴를 결심한다.
골다 메이어의 삶은 이스라엘 건국 드라마 그 자체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국에선 아무런 감흥도 유발하지 못하는 ‘애국심’이라는 단어의 힘이 느껴진다. 이제 우리에겐 국가와 민족이란 말이 정치구호가 된 듯하지만, 이스라엘에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말이 아니라 행동, 자기희생을 통해 오늘날의 가치로 구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심엔 건국의 주인공 골다 메이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골다와 같이 건국에 목숨 바친 조상들의 이야기를 자녀에게, 후배에게 들려주면서 애국심을 전파한다. 물론 이곳 젊은이들도 디스코와 패션을 좋아하고 이기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만은 여전하다고 한다. 테러집단 하마스에 대항하는 국민적 단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골다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인류애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해 10여 명의 선수를 살상하자 특수 수사팀을 만들어 무려 10여 년에 걸쳐 테러단 전원을 죽이는 냉철함도 지녔다. 단지 ‘자리’를 위한 성취가 아니라, 정직과 희생으로 일관한 그녀의 삶은 정치를 한다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①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② | 2011-01-01 |
[세기의 철녀들] 이스라엘 전 총리 골다 메이어 ② | 2009-03-01 |
[세기의 철녀들]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① | 2009-02-01 |
[세기의 철녀들]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② | 2009-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