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오키프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스티글리츠를 비롯한 여타 남자들의 작품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이즈음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자들은 내가 하고 있는 일(그림)을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고 토로하곤 했다. 한 전시회에서 예술가로서 여자로서 겪는 절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말하고 싶다고 모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그림은 세속적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구도(求道)를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오키프의 크게 확대된 꽃을 보고 많은 사람은 ‘관능’을 느낀다. 불타오르는 색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커다랗게 확대된 꽃술과 꽃잎은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이야 꽃을 그리는 화가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꽃 나부랭이’가 그림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꽃을 그리는 기법도 혁명적이었지만 꽃이라는 소재 자체도 전위적이었다.
더구나 여성화가가 드문 시절, 남자처럼 되려면 남자들이 관심 갖는 것을 그려야 성공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여성적인 것, 예쁜 것에 주목하는 것은 소수자, 아웃사이더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 직면할 때마다 오키프는 “아니,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하는 게 무슨 죄냐” “예쁜 것은 잘못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고 항변했다. 그녀는 ‘예쁘다’는 말이 여성적인 것을 연상시킨다는 점 때문에 비웃음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성공을 꿈꾸는 여성들 중에는 남자처럼 행동하고 남자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있다. 남자의 언어, 남자의 관계 맺는 방식을 따라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오키프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는 길은 남성과 똑같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이 갖고 있는, 즉 여자만이 갖고 있는 감각과 경험, 배경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고 그림이 아니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림에 대한 그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내 방식대로 가는 게 최선 아닌가.”
한 비평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미지의 세계를 알리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적인 것에 대한 자긍심의 뿌리는 스티글리츠가 심어준 것이기도 했다.
연구공간 ‘수유’에서 공부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고미숙씨는 최근 펴낸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라는 책에서 “사랑이란 소유가 아니라 상대의 가치가 나로 인해 보다 온전한 것으로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장애와 기준 없이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 사랑 노래를 불러대지만 이런 경계는 아무나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몸이다. 저자는 ‘춘향전’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변사또와 맞서는 춘향의 모습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사가 따로 없다. 흔히 (그것을) 수절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나 민중적 역동성으로 해석하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오르가슴의 기능’이라고 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까. 춘향이는 이 도령과의 사랑을 통해 완전히 몸이 열려버렸다. 음양이 마주쳐 춘풍화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열정과 환희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으랴. 이것이 춘향이로 하여금 전사가 되게 한 원동력이 아닐지.’
오키프의 그림을 명상하듯 바라보노라면 이 말이 실감난다. 거기에는 사랑을 통해 몸이 열린 여자만이 체험하는 절정의 경지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오키프 삶에서 특기할 점은 그녀가 여성에게는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척박한 시절에 태어나 자신의 재능이 남자들보다 더 뛰어났음에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과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를 적(敵)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녀가 싸운 대상은 타인이나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룬 성취 과정에 중요한 역할(멘토에서부터 비서에 이르기까지)을 했던 사람이 ‘모두 남자’였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반(反)페미니스트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 여성의 권리와 독립을 주로 다룬 올리브 슈라이너의 책 ‘여성과 노동’을 탐독하고 틈만 나면 여성 참정권 특집기사를 애독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태동한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아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많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이 여성평등권을 보장하는 법률안에 반대한다는 기사가 실리자 바로 다음날 항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평등권 사상을 연구하고 성 평등을 위해 일해왔던 여성들 덕분에 바로 오늘의 당신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권력자가 되어 지금 같은 공적인 삶을 살도록 한 데는 그런 여성들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키프는 뉴욕에 있는 대다수 남자가 여자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여자도 남자처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언젠가는 새로운 평가가 우리(여성)에게 따라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잠시 남자들이 예술에 대해 맘껏 소유권을 즐기도록 허락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여자 예술가들이 더 건강하고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녀는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권리를 갖는 게 여성해방이 아니라 남자처럼 똑같은 책임감을 갖는 게 진정한 평등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독립된 개체로서 여성을 열렬히 신봉한다. 단지 남자처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가졌다는 의미뿐 아니라 남자처럼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지닌 개체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여성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그녀를 모시려고 아우성칠 때마다 그녀는 페미니즘이야말로 여성 스스로를 고립된 상황으로 모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삶에서 언제나 나를 도왔던 사람들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남자는 내 그림의 원천이기도 했다. 여자들은 나에게 어떤 유산(遺産)도 남겨주지 못했다.”
권력화된 페미니즘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 삶에서도 그랬던 그녀의 생각과 말들은 여성의 목소리가 크게 높아진 요즘에도 커다란 울림을 갖는다.
스티글리츠는 말년까지 오키프의 속을 썩였다. 오키프보다 열여덟 살이나 어린 돈 많은 유부녀와 노골적으로 바람을 피운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오키프는 가슴절제수술, 대상포진, 심장병, 나중에는 시력상실까지 갖은 병마와 싸워야 했다. 수시로 우울증에도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100세 가까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정신력과 철저한 식이요법에 따른 자연주의 생활이 큰 요인이었다. 덧붙여 말년에 그녀 곁을 지킨 한 젊은 남자를 빼놓을 수 없다. 오키프가 여든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마지막 10년을 함께 한 남자, 해밀턴은 예술가를 꿈꾸던 20대 청년이었다. 무작정 오키프 집을 찾아와 “도울 일이 없겠느냐”는 말로 인연을 맺었다.
해밀턴은 오키프가 인생에서 가장 약할 때 그녀에게 왔다. 동이 트면 차를 몰아 오키프 집으로 가서 함께 아침산책 하는 것으로 시작해 운전기사가 되어주고, 편지에 답장을 해주는 비서 노릇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악담이 쏟아지자 해밀턴은 이렇게 대응했다. “자기 또래들과도 제대로 된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예순 살도 더 많은 사람과의 우정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실제로 두 사람은 단순히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라 경험과 생각을 교환한 연인이었다. 죽어서 유명해진 예술가들의 삶에 비하면 살아서 인정받고 부(富)를 누린 데다 국가 훈장까지 받은 오키프는 운 좋은 사람이다. 말년에도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그림을 전시하고 때로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유명세를 즐겼던 그녀는 생애 마지막까지 한 청년과 사랑을 나눴으니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해밀턴은 날이 갈수록 어린아이 같아지고 잊어먹기도 잘하는 애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몰락에 낙담해 다른 여인과 결혼도 했지만 그 뒤로도 오키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키프는 1986년 100회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숨을 거뒀다. 그리고 뉴멕시코 골짜기에 한줌 재로 뿌려졌다. 생전 유언대로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추모식도 치르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을 지킨 젊은 애인에게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을 뿐이다.
<> 참고도서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지음, 이화경 옮김, 민음사)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고미숙 지음, 그린비출판사)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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