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①

발행일: 2009-02-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싸워야 할 적은 남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여자만의 감각과 경험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지는 길이라고 믿었다. 초기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신을 키운 건 ‘남자’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삶은 강렬하고 도발적인 자신의 그림과 꼭 닮았다.》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 주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도시 샌타페이.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곳을 ‘햇살이 춤추는 땅’이라고 불렀다. 해발 2135m지대에 있는 높은 도시답게 이곳의 빛은 일반 도시와 다르다. 강하지 않지만 환하다고 해야 할까. 코발트색 아크릴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짙푸르고 맑은 하늘이 그림의 문외한이라도 캔버스와 붓을 들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기자는 2005년 8월 샌타페이에 갔다. 국제선은커녕 가장 가까운 공항이래야 도심에서 100km나 떨어져 있는 인구 7만의 작은 도시지만 대학이 4곳, 출판사가 27개,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이 8개, 갤러리가 250개나 되는 지적(知的)인 도시다. 시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예술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지금도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예술가가 모여 산다고 한다.


이곳의 중심에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조지아 오키프(1887~1986)의 치열한 삶과 그녀의 화업(畵業)을 집대성한 오키프 미술관이 있다. 기자가 오키프미술관(www.okeeffemuseum.org)을 찾은 날은 평일인데도 붐볐다. 1997년 한 독지가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오키프 작품이 불과 70여 점 전시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워낙 대표작들이 망라되어 있어 매년 각국에서 17만여 명이 찾는다고 한다.


허름한 폐광촌이던 이 도시를 예술인 도시로 자리 잡게 한 것은 오키프의 덕이 크다. 20세기 미국 미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는 그녀는 서른 살 때인 1917년 기차여행 중 이곳을 처음 만난 뒤 기회만 있으면 몇 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았다. 62세 때인 1949년부터는 아예 정착해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녀의 강렬한 꽃 그림은 이곳 거주를 기점으로 풍경화와 뼈, 식물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 자연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그림들로 변모한다.


바버라 불러 오키프 미술관장은 “예술에 관심이 있고 특히 오키프의 드라마틱한 삶에 매료된 세계인들은 샌타페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예술가 정신을 세례 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예술가 정신이란 한마디로 일탈이자 탈속이다. 반복적인 일상에 묶여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것은 위험한 도전이다. 하지만 일탈의 미학이란 게 있다. 떠나봄으로써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다시 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샌타페이와 샌타페이에 녹아든 오키프의 탈주적 삶이 주는 메시지는 그런 것들이다. 모두가 그녀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런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과 삶을 더 넓은 시선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11월15일 위스콘신 주 선 프레리 농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배한 옥수수를 기계로 수확하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꺼렸던 담배 농사를 지은, 요즘으로 따지면 벤처 농업가였다. 일곱 형제 중 장녀였던 오키프는 어릴 적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한 건 열한 살 때.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일찍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가 여동생과 함께 한 달에 한번 미술교사를 붙여주어 과외수업을 받게 한 것이다.


오키프는 그림에 빠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친구들이 무도회에 다니며 구혼(求婚) 대상을 물색하기에 바쁠 때도 오로지 그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녀의 그림솜씨는 학교에서도 유명해 졸업 앨범에 삽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부모는 오키프를 시카고 예술대학에 입학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화가가 되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잘해야 미술교사나 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런 소박한 기대는 오키프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갈 정도의 역할모델이 없던 시절, 그녀는 지금으로 치면 교사자격증을 주는 사범대학 과정에 등록해 교사수업을 받는다. 이후 집안 형편이 기울자 학업과 임시교사 일을 반복하며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이어진다.



 

오키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스티글리츠라는 남자다. 보통 예술가들의 삶에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예술적 재능을 교환하고 긴밀한 영적 소통을 하는 동반자가 있게 마련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예술분야에도 성공한 여자보다는 성공한 남자가 많다. 따라서 대가(大家) 남성에 여성 제자가 흔하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남자의 성취에 육체적 감정적 정서적 보조자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사 재능이 남자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세상의 평가는 여자의 성취에는 박하게 마련이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의 경우도 처음엔 비슷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당시 오키프는 갓 도시로 나온 시골뜨기 교사에 불과했지만 스티글리츠는 당대 유명 인사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뉴욕에서 가장 유명했던 ‘291화랑’이었고, 스티글리츠가 바로 주인이었다. 291화랑은 마티스 몬드리안 브라크 피카소와 같은 유럽 화가들의 작품전을 미국에서 처음 연 곳으로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미국 내 첫 화랑이었다. 지금이야 현대미술의 주 무대가 뉴욕이지만 당시만 해도 중심지는 파리였고 유럽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정력적인 활동으로 뉴욕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일군 개척자나 다름없다.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매체는 사진이었다. 당시 사진은 본격적인 미술장르가 아닌 그야말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 장르였다. 그런 매체를 도구 삼아 스티글리츠는 카메라 렌즈를 빛에 3,4분씩 길게 노출시키는 자신만의 촬영기법으로 뉴욕 시의 파괴되거나 건설 중인 건물들을 밤이나 가을비를 배경으로 찍었다. 이렇게 나온 사진은 마치 ‘그림’처럼 보여 스티글리츠는 ‘사진기를 든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또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畵商)이기도 했으며 명석한 통찰력과 허를 찌르는 비평에, 가난한 예술인들을 열렬히 지원한, 한마디로 뉴욕 예술가들의 영웅이었다.


오키프는 뉴욕 생활을 하면서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1908년 로댕전을 보기 위해 291화랑에 처음 갔을 때 관람객들에게 깊이 있으면서도 쉬운 언어로 작품 설명을 해주던 그를 먼발치에서 인상 깊게 보기도 했다. 이후에는 가벼운 눈인사를 하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당시 스티글리츠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통 받는 한편 매력적인 부호 여성과 불륜 행각을 즐기고 있었으니 시골뜨기 오키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더욱이 오키프는 임시 교사를 하기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시골로 이사를 가 잠시 뉴욕을 떠난다. 그녀는 이곳 자연 속에 묻혀 평생 트레이드마크가 된 꽃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오키프는 어느 날 친구 폴리처에게 주홍색 코스모스와 자주색 피튜니아 꽃그림을 그린 파스텔화와 소묘를 보내주는데, 이게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폴리처는 어느 날 오키프의 작품을 들고 291화랑을 찾는다. 쉰두 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현대예술의 거장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진짜 여성 화가가 나타났군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 그림을 그린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사물을 보는 통이 크면서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입니다. 이 그림들은 제가 그동안 봐온 것들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작품들입니다. 언젠가 꼭 전시회를 열고 싶군요.”


전시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애송이 화가의 그림 몇 장만 보고 전시회를 열겠다고 한 스티글리츠야말로 예술가를 보는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탄성이 미국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여류화가를 발굴한 것이었음을 그 자신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오키프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작품이 유명 화랑에 전시된다는 소식도 기뻤지만 천하의 스티글리츠가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편지를 쓴다. ‘제 그림을 보신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그림이 왜 좋은지 기억하신다면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그림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하신 것 같아서요.’


스티글리츠는 제법 유혹적인 어투로 답장을 쓴다. ‘작품에서 느꼈던 것을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직접 만나 인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의) 작품이 제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정말로 놀라웠소. 자신의 내면을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소.’



 

예술가에게 ‘작품이 훌륭하다’는 말은 국적 불문, 장르 불문 가장 듣기 좋은 말이다. 오키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후 몇 차례 편지가 더 오가고 마침내 1915년 오키프는 화랑을 직접 방문해 스티글리츠를 만났다. 스치듯 한 첫 만남 이후 8년 만이다. 오키프는 자신보다 스물세 살이나 연상이면서 유부남인 스티글리츠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 이것은 연애감정이라기보다 정신적 스승이자 멘토에 대해 보내는 존경심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오키프 작품이 291화랑에 내걸렸다. 다른 화가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 그룹전이긴 했지만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가 오키프 그림에 대해서만 리뷰(관람평)를 실음으로써 정식 예술무대에 선을 보이는 첫 번째 중요한 계기가 된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이 운영하던 사진 잡지에 “오키프의 소묘작품은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 291 화랑에서는 한 여성이 종이 위에 이토록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한 작품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극찬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가 캔버스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본 최초의 타인, 그것도 그녀를 도와주고 키울 수 있는 ‘힘을 가진’ 타인이었다.


성공적인 첫 그룹전 이후 전도양양해보이던 오키프의 앞길이 어머니의 사망으로 잠시 휘청하는 듯했으나 실의에 빠진 그녀를 다잡아 세운 사람이 바로 스티글리츠다.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열정적인 편지와 격려 덕분에 붓을 놓고 싶은 유혹에도 다시 그림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첫 개인전에 출품할 마흔 점 남짓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첫 그룹전 2년 뒤인 1917년 4월 오키프의 첫 개인전이 291화랑에서 열린다. 짙은 보랏빛 수채화 물감과 목탄으로 그린 사우스캐롤라이나 풍경화, 수채화 물감과 유화로 그린 텍사스, 그리고 석고 조각 작품이 전시됐다. 당시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던 조각가 브랑쿠시는 “그녀의 작품이 휘두르는 매력은 힘, 해방, 자유”라는, 간단하지만 본질을 꿰뚫는 언어로 평하기도 했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유부남이라는 게 걸림돌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그녀는 편하게 연애나 할 처지가 아니었다. 너무 가난했다. 자칫 결핵으로 번질 수 있는 독감과 몇 달째 싸우느라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부서진 마음과 육체를 보듬은 사람이 다름 아닌 스티글리츠였다. 오키프를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뉴욕으로 불러들인 뒤, 의사인 자신의 동생을 시켜 돌보게 했다.


어떻게 보면 오키프가 스티글리츠를 선택한 것은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하기야 사랑이란 게 따지고 보면 서로의 절절한 정신적 물질적 필요에 대한 갈망에서 오는 것 아닌가.) 오키프가 스티글리츠로부터 받은 것은 독립된 작업실 같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이 아니었다. 그는 변덕스럽고 감수성이 예민한 오키프의 성격을 받아준 특별한 남자였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죽고 형제들은 가난했으며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오키프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망 없는 황무지에서 구해준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스티글리츠 입장에서도 오키프는 특별한 여자였다. 그는 오키프가 사고방식과 감정이 분명하고 거침없어 맥박이 펄떡펄떡 뛰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이 평소 갈망해오던 순수와 직관의 여성상이었다. 두 사람은 동거를 거쳐 마침내 1924년 12월 결혼한다. 첫 만남 후 16년 만이다. 결혼식은 어떤 의례적인 형식도 갖추지 않았다. 반지도 교환하지 않았고 사랑이니 명예니 복종이니 하는 말들을 읊조리는 행사도 없었다. 피로연도 없었다.


오키프는 남편 성(姓)을 따르지 않았다. 훗날 그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묻자 “왜 내가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려야 하나 생각했다. 결혼 이후 사람들이 나더러 스티글리츠 부인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오키프 양이라고 정정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애송이 신인과 예술계 거장의 결합이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오키프의 고집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실 두 사람의 결합은 너무나 다른 둘의 결합이었다. 스티글리츠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오키프는 자연주의적 삶에 익숙한 시골 사람이었다. 스티글리츠는 늘 사람 속에 있기를 원했지만 오키프는 고독 속에 있기를 원했다. 스티글리츠는 토론광이었던 반면, 오키프는 침묵하고 경청하기를 즐겼다.


 

두 사람이 동거하던 1921년 2월 스티글리츠는 사진전을 열었다. 145점의 흑백사진 대부분이 오키프의 부분 누드를 찍은 선정적 사진이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스티글리츠는 당시 미국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작가였다. 뉴욕 예술계를 주름잡는 명사였다. 그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열정을 수많은 초상 사진에 담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온몸을 정교하게 그린 듯한 사진 중엔 그가 이전에 몰두했던 춘화도(春畵圖)에서 영감을 받은 것도 많았다. 가슴 배 음부 가랑이를 과감하게 확대해 양감이 풍부한 토르소처럼 보일 만큼 가깝게 초점을 맞춰 찍은 것들이나 화면 가득 엉덩이나 다리만 나온 사진들은 그 시절에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사진 작법(作法)이었다. 단순한 나체사진이 아니었다.


사진에서 오키프는 거의 웃지 않고 있다. 표정이 대리석처럼 차가워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자신을 찍은 사진작품으로 스티글리츠가 유명해질수록 오키프는 정부(情婦)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을 나눈 후 비좁은 작업실에 기진맥진해 누워 있던 순간조차 기꺼이 애인을 위해 피사체가 되어주었지만 이로 인해 자신이 혹독한 시련을 겪으리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②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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