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육영수 여사 ②

발행일: 2008-12-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늘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는 육여사의 이런 마음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감정은 ‘연민’이었다. 연민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하고, 느낌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이기심은 커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줄어든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연민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보정신”이라고 말했다.


여사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 충북 옥천 갑부의 둘째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여사의 아버지는 미곡상 금광 인삼가공업 등 당시로서는 뉴 비즈니스 사업에 뛰어든 벤처 사업가였다. 옥천군에서 가장 먼저 닛산 화물자동차를 소유했으며 그 시절에 무비 카메라까지 갖고 있었다.


라디오 영사기 자전거 발전기 등 신(新)문물에 관심이 많아 일본 전기회사가 옥천역 구내에만 전기를 가설하고 마을에는 전기를 공급하지 않자 오사카에 있는 기계 제작소 일본인 사장을 불러 자체 수력 발전소 건설을 계획할 정도였다.


여사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꼼꼼하게 아버지 재산을 정리하고 살림하는 일을 맡으면서 세상물정을 익혔다. 하지만 수학여행도 못 가게 하고 여자가 시집이나 잘가면 됐지 배울 필요가 없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전문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결혼해서는 철저하게 남편 수입에 맞는 생활을 했다. 1950년 말 결혼 이후 1958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전셋집을 전전했고 의식주가 어려운 때도 있었다.


가난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잘나가는 군인의 아내였으니 중류가정의 살림은 됐다고 봐야 한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에 귀가 열리게 된 것은 최고회의 의장 부인이 되고나서였다.


 

남편을 도우려 신문을 열심히 읽다가 사회면에 실린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알게 됐고 앞서 소개한 민원편지처럼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민초들을 만나면서 가난에 고통 받는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됐다. 그러면서 ‘가난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가난은 가난하다는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나 행복은 물론 미래에 대한 꿈, 설계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끼니걱정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여사는 이런 가난과 접하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아서는 안 된다는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육 여사가 1971년 12월29일 날품팔이 근로자들이 30원을 내고 하룻밤을 유숙하는 동대문 근로자합숙소를 방문했을 때 적은 소감문에는 이런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이곳에 있는) 실업자들을 보며 그들이 하루아침에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정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반겨주는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식당 난롯불을 가운데 끼고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제쳐놓고 건강한 미소와 순수한 정신을 내게 보여준다. 떠날 때 자주 오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나는 비록 그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뜻을 열심히 들어보고 성의껏 그 뜻을 대통령께 전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의무에 앞서 커다란 보람이다.”

 

 

여사의 행동은 단지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바쁜 공식 행사 중에도 짬을 내어 판자촌을 돌아다니고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민원편지를 읽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안간힘을 쓴 것은 끼니걱정, 땔감걱정을 하는 국민이 있다면 ‘남편의 혁명’이 실패한 것이 되고 만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육 여사는 국가와 가정의 논리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았던 산동네 판자촌마을과 후진국 한국이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식구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판자촌 가장(家長)이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결국 가장들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느덧 종업원 120명을 거느린 회사 사장이 된 이촌동 청년이나 동네국수 공장장으로 성공한 삼양동 청년처럼 일할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 가족은 자연스럽게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남편 박정희가 혁명을 한 이유였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사는 더구나 현장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남편이 판단하고 선택한 일이 옳다는 절대적인 신뢰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각료부인들까지 한마음으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양지(陽地)회다.


그늘진 곳을 따뜻하게 비추는 햇볕, 자신 같은 상류층이 쬐고 있는 햇볕을 조금이라도 넓게 펴자는 뜻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자 한국 부유층 기부의 출발이라고 할 만하다.

 

 

 

불우여성들을 지속적으로 돕는다는 취지로 양지회관도 만들었다. 회원들이 모은 200만원 정도를 기금으로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에다 203평 대지에 연건평 275평 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200여 명의 여성이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편물 양재 미용 등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주부들이 교양을 높일 수 있도록 강의실 도서실도 만들었으며 요식업 종사자, 버스 안내양들도 교육받게 했다.


무료진료소를 지어 난민촌 사람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여사는 일반 회원들과 똑같이 3인1조가 되어 진료소를 돌며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여사가 손을 대면 상처가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환자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당시 양지회 활동에 참여한 한 회원의 말이다.


“가까이 있으면 누구나 결점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육 여사는 보면 볼수록 존경심이 깊어지게 하는 분이었다. 여사는 ‘남을 반성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동행’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낸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편의 평생 정적(政敵)이었음에도 부인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후한 평가를 내려 눈길을 끌었다. 육 여사 생전에 세 차례 만났다는 이 여사는 “육 여사는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의 야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민원 편지가 폭주하자 비서실에서 검열을 했다. 육 여사는 이를 알고 검열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국민의 소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생전 육영수가 양지회 회원들에게 했던 말 중한 대목이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가 국민과의 대화를 막아버리면 혁명정신이 무색하지 않습니까. 박 장군이 주도하여 이룩한 혁명은 어느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라 국민의 총의를 대신하여 이룬 것이니 혁명가의 아내는 국민과의 대화 통로를 폭넓게 마련하여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절차에 구애되지 않고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겠지요.”


여사는 하루에도 수십통씩 날아오는 편지를 ‘그냥 답장만 해도 무방한 것’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로 나눈 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비서나 소속 행정기관에 연락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한 후 정성을 다해 매듭지어주었다.


자기 선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민원인이 이해할 수 있게 알려주었다. 또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공익(公益)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이 있으면 대통령에게 보고해 힘을 빌리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드물었다.


여사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2시간 이상씩 서재에 틀어박혀 답장을 썼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그것도 바쁜 일정을 쪼개 힘들고 괴로운 내용을 붙들고 일일이 답장을 쓴다는 것은 보통 정신이 아니고선 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서식이 일정한 사무적인 것도 아닌,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 있는 글들에 대한 회신을 하루에도 10여 통씩 줄기차게 쓴다는 것은 끈질긴 성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한 해에 처리한 서신이 5000여 건 가까이 된다.


이런 간접 소통 외에 여사는 직접 소통에도 열심이었다. 육 여사 하면 나환자 돌보기 사업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나환자와 악수하면서 미소 짓던 육 여사를 기억한다.


여사가 나환자한테 관심을 가지게 된 때는 1965년 봄이었다. 식목일이 다가오자 몸은 비록 불편하나 꽃을 보며 마음을 환하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꽃씨상자를 나환자 마을에 보내준 것이다.


그 후 일반 목욕탕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어주었고 나환자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왔다. 한번은 나환자를 부모로 둔 아이들이 정상아를 둔 학부형들의 집단행동으로 초등학교 입학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이 1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아들 지만 군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일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여사는 어느 날 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경기도 양주군 나환자촌을 찾았다. 얼굴은 찌그러져 있고 호미를 들고 있는 손도 마디가 떨어져 나간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육 여사는 그들을 만지고 안는 데 개의치 않았다. 여사는 코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며 직접 손수건으로 코를닦아주기도 했다.


한 소녀가 드링크 한 병을 들고 여사 앞에 놓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하는 양이 어른들이 미리 연습을 시킨 것 같았다.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건 서울 가는 차안에서 마실 테니 냉수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맛있게 마셨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한켠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들을 벌레 대하듯 하며 얼굴을 보기도 싫어하고 심지어 감염도 안 된 아이들과 자기 아이들을 한 공간에서 공부시키기 싫다며 초등학교 입학도 반대하는 게 사회 사람들의 정서 아닌가.


그런데 영부인인 그가 자기들과 악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기들이 사용하는 그릇에 담긴 물까지 맛있게 마시고 물론 뭉개진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1974년 8월15일 육 여사의 사망이 박정희를 고독하게 만들어 유신체제를 약화시키는 데 결정타가 됐다는 증언과 주장은 많다. 실제로 육 여사는 박정희 삶에 결정적이고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애초부터 세속적인 가치와는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는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 말대로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는’군인이었을 뿐이고 육 여사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이었으며 게다가 이혼남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만남은 전쟁 중, 그것도 국군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던 1950년 8월 하순 부산에서 시작됐다.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가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육 여사는 개의치 않았다.


요절한 정치학자 전인권씨는 인간 박정희를 심리학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평전을 낸 바 있다. 평전에서 그는 “육영수는 심리적 고아였던 박정희에게 새로운 인식을 제공했고 사실 육영수야말로 박정희를 정치적 리더로 만든 진정한 장본인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는 육 여사가 순종적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박정희가 육 여사에 의존했다고 봐야 한다.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던 박정희 당시 준장은 1954년 6월 배 위에서 이런 일기를 쓴다.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이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 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이다.’


이 글에서처럼 박정희는 아내를 어머니처럼, 여신(女神)처럼 대했다.


육 여사는 내조의 정신적 방향이나 임무를 세 가지 면으로 요약해 지켜가려 노력했다고 한다.


첫째, 가정에 근심을 덜어줌으로써 남편에게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주어야 한다.


둘째, 남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을 아내가 협조한다.


셋째, 남편의 건강을 살핀다.


이런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이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시골에서 남편 아이들과 함께 단란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음은 자연스럽다. 여사는 삼선(三選)개헌을 묻는 국민투표를 앞둔 1969년 10월14일 국민투표에 대한 감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감상이랄 게 뭐 있겠어요. 만약의 경우 나야 보따리 싸가지고 훌훌 나가서 가족들과 알뜰하게 살면 그만이지요” 라고 했다.


여사는 생전에 “앞으로 언젠가 이 자리를 물러나게 되면 그때는 진정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동족이 쏜 총탄에 맞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소설가 남지심씨는 육영수 여사 평전 ‘자비의 향기’서문에서 2006년 8월15일 열린 육영수 여사 32주기 추모식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다.


남씨가 놀란 것은 추모객들 중에 과거 박 대통령과 함께 국정에 참여했거나 현재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100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0여 명이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는 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폭염이 내리쬐는 공휴일 아침에 30여 년 전에 이 땅을 떠난 영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남씨는 “부모가 자식 곁을 떠나고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도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피를 나누고 목숨을 나눈 사람도 잊고 사는 세태인데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던 영부인을 매년 잊지 않고 찾게 하는 힘인가”라고 묻는다.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어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사람들로 문턱이 닳는 게 권력이다. 그러나 육 여사 추모행렬은 비정하고 허망한 권력의 속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남씨 말대로 참으로 ‘불가사의한 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또 다른 평전을 쓴 작가 홍하상씨는 “육 여사야말로 국민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만 골라서 한 가장 정치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시위대를 탄압할 때 학생들을 감쌌고 남편의 정권 연장에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과거는 잊히게 마련이지만 육영수 신화는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고 있다. 생전의 그녀의 삶은 진정한 여성적 리더십이란 무엇인 지를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자비의 향기 육영수(남지심, 랜덤하우스)

박목월 육영수 평전(박목월, 자유문학사)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 육영수(홍하상, 작은키나무)

나의 어머니 육영수(박근혜, 사람과사람)

박정희 평전(전인권, 이학사)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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