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②

발행일: 2008-11-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콘디는 덴버 시 남쪽 잉글우드의 천주교재단이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입학한 지 1주일 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맞닥뜨렸다. 교내 진학 담당자가 음대에 진학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콘디의 계획을 듣더니 ‘힘들 것’이라고 단언한 것. 흑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녀와 부모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오히려 ‘무엇이든 백인보다 두 배 더 열심히’를 신조로 삼는 계기로 삼았다.


마침내 흑인 최초로 버밍햄 음악학교에 진학한 콘디는 음악학교에서 그 꿈을 포기했다. 막상 전공으로 삼자 현실적인 고민들이 다가왔다. 다양한 음악회와 뮤지컬에서 많은 연주자를 만날 때마다 천재도 아닌 자신이 전업 피아니스트로 산다는 것이 녹록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카네기홀에 서보기는커녕 피아노 바에서 일생을 마치는 연주자가 너무나 많았다. 평생 교사나 교회합창단 지휘자로 만족해야 한다면 목표를 수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진했던 목표를 수정한다는 것은 내면적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우울증으로 허비한 후에야 새로운 분야를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하지만 콘디는 덴버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관심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영어학도 기웃거려보고 정치학도 수강했다.


그러다 2학년 봄, 한 강의실에서 그녀를 사로잡는 평생 전공을 발견했다. 국제정치학 강의였는데 강사는 전직 중유럽 외교관이자 후에 클린턴 행정부 여성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울브라이트의 부친 조지프 코벨 교수였다. 그날 강의의 주제는 ‘스탈린’이었다.


콘디는 그 강의를 듣고 음악 외에 어떤 것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열정을 실감했다. 나중에 코벨 박사는 콘디의 총명함과 열정에 감동받아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도록 이끌었다.


콘디는 정치과학부에 등록한 후 러시아어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는 배우기가 어려운 공포의 언어다. 그러나 발군의 어학감각을 바탕으로 1974년 졸업할 때에는 전공 필수와 선택의 구분 없이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정치과학부 명예의 전당에 가장 탁월한 업적을 거둔 한 사람으로 이름을 새길 정도가 됐다.


물론 그녀가 전공을 바꿨다고 해서 피아노 실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콘디는 백악관 재직 시절인 2002년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콘디는 졸업 후 국제정치학 연구소로 유명한 인디애나 주 노트르담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현실정치는 도덕적 이념이 아닌 힘의 역학 관계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현실적인 외교관(外交觀)이 형성됐다. 그리고 콘디는 노트르담 대학 석사를 거쳐 덴버대로 돌아와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런데 박사과정 재학시절 그녀의 정치적 성향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민주당원이었던 콘디가 지지를철회한 것이다. 1976년 선거에서 콘디는 지미 카터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카터의 미온적인 정책을 접하면서 지지를 철회했다. 콘디는 “소련은 마치 바이올린을 조율하듯 미국을 다루며 침략의 본성을 드러냈는데 카터는 무능하게도 소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콘디는 1980년 공화당원으로 등록해 로널드 레이건에게 한 표를 행사한 이후 일관되게 ‘선도적인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1981년 8월 스물여섯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딴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 ‘국가안보 및 군비감축 연구소’ 부소장을 거친 뒤 정치과학부 부교수로 임용돼 군사학과 국가안보 외교정책, 소련 및 제3세계 동맹국의 경제 활동을 가르쳤다.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역할연기’를 통해 각자의 입장을 표명하게 하는 독특한 수업방식을 도입해 학생들의 의사결정 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또 미식축구 마니아답게 군사학을 미식축구에 비유하는 수업도 인기를 끌었다.


“인생도 미식축구와 마찬가지다. 결승점을 향해 내달려라. 주눅 들지 말고 반칙도 하지 마라. 오로지 결승점을 향해 내달려라.”


3년 부교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정교수로 임용되면서 우수 교수에게 주는 상과 ‘최우수강의상’을 받을 정도로 강의 실력이 뛰어났다.


콘디는 국방부 외무부 교환근무 일환으로 1년간 파견근무를 하면서 현실정책수립 과정에 첫 발을 내디뎠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핵무기를 비롯한 군비제한회담이 진행되던 때여서 핵무기 전략 연구가 주요 테마였다. 1년 후 다시 대학으로 복귀했지만 2년 뒤인 1989년 1월 국가안보리의 소련 동유럽 분과 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소련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이 기간에 폴란드 자유노조가 합법화됐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역사상 최초로 소련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됐고 옐친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1년 3월까지 콘디는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적인 대사건을 주도하는 미국 정부의 최중심부에 서 있었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그녀의 탁월한 업무 능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계속 안보리에 남아달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콘디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하루 14시간씩 일에 매달려 탈진한 상태였다.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2년 동안 15편의 논문을 생산하며 연구에 몰두하던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 종신교수 발령과 함께 1만4000여 명의 학생과 1400여 명의 교수진, 연간 15억달러의 예산을 가진 대학의 행정을 책임지는 교무처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나이는 38세였다.


스탠퍼드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에, 최초의 흑인 교무처장이었다. 전임 총장이 연방지원금과 관련해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부임한 신임 총장은 젊으면서 유능하고, 여성이면서 흑인인 콘디야말로 스탠퍼드 개혁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콘디가 맡은 가장 큰 일은 연간 2000만 달러의 적자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미 대학은 콘디 부임 몇 년 전부터 적자 줄이기에 안감힘을 쓰고 있어서 새로 줄일 부분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2년 만에 균형 예산을 맞췄다. 누구도 나서서 하기 싫은 ‘해고’까지 단행하면서 거둔 성과였다.


“한 기관의 기관장은 지식이 짧은 부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100만달러짜리 망원경을 지원해달라고 할 때 나는 망원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 다른 이슈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 우선순위를 갖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어려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하고 또 했다.”


콘디는 당시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말한다. 후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더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매사에 단호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에게 감동이나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원칙을 지켜가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어 교수채용 시 여성이나 흑인, 소수 민족 같은 소수자 우대 정책에 관해서도 ‘소수자 우대는 (흑인인) 나 자신이 제일 수혜자다.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좋다. 그렇다고 해서 당연직으로 정년 보장을 한다든지 하는 혜택을 주는 역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철학을 밀고 나갔다.


1999년 교무처장 퇴임 때 그녀는 역대최고로 유능한 교무처장으로 평가받았다. 균형 예산, 공정한 교수인사, 학교 경쟁력 강화 문제 등 부총장이 했음직한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재임기간 중 스탠퍼드 신입생 지원자는 계속 늘어 콘디가 교무처장으로 재직한 마지막 해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콘디는 교무처장 자리를 사퇴하면서 1년 동안 대학을 떠나 있겠다고 공식 발표하고 후버 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내 조지 W 부시의 2000년 대권 도전 대열에 합류했다. 외교 정책팀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콘디는 1989~91년 국가안보리에서 당시 무너져가던 소련과 동유럽권 담당국장으로 일하면서 부시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아들 부시와의 인연은 1995년 그가 텍사스 주지사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를 발탁한 사람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이다. 조지 슐츠는 콘디를 부시의 외교 가정교사로 채용, 부시의 눈과 귀 역할을 맡겼다.


이후 외교정책에 관한 한 부시 대통령은 콘디가 설명해주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콘디는 보조관인 데도 대통령 가족과 함께 예배를 볼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그녀의 자서전을 펴낸 전기 작가 안토니아 펠릭스는 책 ‘콘돌리자 라이스’에서 “부시와 콘디는 우정과 충성심, 존경이 바탕이 된 사이”라고 전한다. 앞에서 언급한 정치참모 딕 모리스도 “콘디는 단지 보좌관이 아니라 부시의 사고를 깊게 하는 촉매제이고, 부시는 그녀가 제공한 자문을 이해하고 실행하도록 도왔다”고 전한다. 딕 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부시는 즉흥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에 비해 콘디는 냉철하게 근거를 평가하고 공공정책의 분석에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한다. 대선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안 부시가 외교정책에 관한 ‘본능적인 말’을 내뱉으면 콘디가 그 말을 합리적으로 다듬었다.”


부시-콘디의 시너지효과는 9·11테러 대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초기에 즉각적으로 내놓은 대응책은 알 카에다를 쫓는 것이었지만 콘디는 부시로 하여금 테러리즘을 후원하는 국가에도 힘을 집중할 것을 독려했고, 마침내 국정 연설에서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이 나오게 했다.


두 사람의 외교 정책은 ‘윤리적 가치’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전 클린턴 정부와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콘디는 ‘내셔널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미국의 외교 정책에 윤리가 빠져서는 안 되며 미국 국민은 윤리의 부재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인은 ‘윤리’라는 말을 들으면 ‘참 순진하다’고 비웃겠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원칙이 있다.”


 

 


그가 말하는 윤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가는 2005년 12월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콘디의 외교 방식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외교’라고 평한 바 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막을 내린 뒤 유일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영토를 점령하던 옛 제국주의 국가들과 달리 ‘자비로운 패권(benevolent hegemony)’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전파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신념을 담아 외교를 행한다는 것이다.


콘디는 9·11테러 이후 2002년 6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를 보다 쉽게 설명했다.


“9·11테러는 더 큰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을 위축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진정 우리가 맞설 실체를 찾게 했다. 9·11테러는 우리들에게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깨우치게 했다. 우리는 더 나은 미국의 위상과 가치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그러면서 ‘국익에 기반한 외교’를 들고 나왔다. 흔히 미국만의 이기주의적 외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미국의 국가 이익에 대한 명백한 입장 천명이 없다면 편협하게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과 일시적 압력단체에 따라 국익이 쉽게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미국의 국익이란 세계에 자유, 시장경제, 평화를 구축하는 기반이다. ‘인류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클린턴 행정부의 지나친 다자간 해결책이 때로 미국 이익을 배반하는 협정까지 조인하는 실수를 범한 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나온 전략이다.


콘디는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리포트’(김영사)에 실린 ‘국익의 증진’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미국의 가치는 보편적이다. 우리에게는 언론, 종교, 정치의 자유가 있으며 이러한 가치는 국제정치가 이를 공유하는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편성될 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지속적인 번영과 자유를 위해 평화는 최우선적이고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미국은 이런 세계평화와 안정의 유일한 보증수표이기 때문에 미국의 군사력은 중요하며 이를 무시하는 태도는 국제평화유지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 공화당에 면면히 흐르는 대외전략이기도 하다.


‘당신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십시오’


총 한 방 쏘지 않고 소련을 무너뜨린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국가 국민이 누리는 평화와 번영을 공산주의 국가 국민도 누려야 한다는 구원(救援)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재임 시절 온갖 위기를 타파하며 마침내 성공적으로 대외정책을 펴게 한 힘도 이 같은 믿음에서 비롯된다.


콘디 역시 독실한 기독교도다. 그녀가 아직 미혼인 것을 두고 주변에서 ‘결혼 계획’같은 것을 물으면 “신(神)이 배우자를 점지해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그녀는 스물세 살 때 미식축구 선수와 약혼했다가 파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떠들썩하게 모임에 참가하거나 굳이 교회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내면과 대화하는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을 만들었다”면서 “기도를 할 때마다 절대 혼자가 아니며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이라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건 아니다. 그건 나의 종교관이 아니다. 다만 극도의 어려운 상황과 마주쳤을 때 충정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로 인도받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가치를 충족하기 위해서 일한다기보다는 신의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구도자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다.


  <> 참고도서


‘나는 이기기 위해 도전한다’(딕 모리스 지음, 손지애 박소정 옮김, 리더스북)는 저자 자신이 힐러리 대통령을 절대 원치 않는다면서 라이스가 대선에 나올 경우 승산이 있다고 주장한 책이다. 철저하게 라이스 입장에서 힐러리를 비교했다. ‘콘돌리자 라이스’(안토니아 펠릭스 지음, 정승원 옮김, 일송북)는 연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콘디를 소개한 책이다. 



“내가 무슨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나는 기도 속에서 ‘나 자신의 길이 아닌 당신(신)의 길을 걷도록 도와 달라’고 말하려 노력한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내 삶의 계획을 완성할 수 있고 나아가 나 자신이 큰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비교적 종교 갈등 없이 잘 살아온 우리가 때아닌 종교 문제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때여서 그런지 미국 공직자와 정치인들에게서 보는 이런 기독교적 신념의 공적인 확신은 자신과 종교가 같다거나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관 인사를 하는 종교관과 비교해 격(格)과 급(級)이 다르게 느껴진다.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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