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여성’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원동력은 실력과 원칙!
《콘돌리자 라이스는 흑백갈등이 심한 앨라배마에서 자라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내용의 대학 강의를 들으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도리어 실력을 쌓아 “나는 베토벤을 연주할 수 있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고 당차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인종이 아닌 실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장관으로 부시 왼손 역할을 하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뒷심은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철의 목련(steel magnolia)이라 불리는 콘돌리자 라이스(이하 콘디) 미국 국무장관이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 때문에 백악관 회의석상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미국의 전기 작가가 공개했다.’(중앙일보 9월22일자)
콘디가 2004년 2월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일할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내 치안 상황 악화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 재소자 인권 유린으로 거센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디가 정부 내 고위 관료들을 백악관에 소집했는데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부(副)장관을 대리 참석시키는 방식으로 그녀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조지 테닛 당시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아예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콘디의 말에 “개수작(bullshit)”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회의장을 나가버렸고 순간 자제력을 잃은 콘디가 눈물을 쏟아냈다는 것.
‘테러와의 전쟁’을 이끌면서 독재자들과 정면으로 승부한 강철 여인으로 알려진 그녀지만 역시 도처에 존재하는 적(?)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일화다. 콘디를 울린 럼스펠드는 2006년 물러났으니 결국 최후의 승자는 콘디인가.
클린턴의 20여 년 정치참모로 일하며 킹 메이커 역할을 했지만 최근 비판자로 돌변한 미국의 유명한 ‘스핀닥터(Spin Doctor·정치 선거 전략가)’ 딕 모리스는 2008 미 대선에서 만약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공화당 쪽에서는 콘디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냈다. 힐러리가 경선에 패배해 주장이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책 ‘콘디 대 힐러리’(국내 번역본 제목은 ‘나는 이기기 위해 도전한다’)를 통해 콘디의 경쟁력을 이렇게 말한다.
‘콘디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처음부터 위대하게 태어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야심이 큰 것도 아니다. 성공한 현대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력이나 현란한 화술,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공격적인 수사(修辭)도 그에게 없다. 단지 그녀는 자기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자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다’는 것은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타인의 마음에 맞춰 자기를 만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딕 모리스는 콘디가 실력과 함께 내면의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소수자인 분야에서 일해왔지만 그녀의 성취에 여성단체의 집단적 힘이나 인종단체의 후원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삶은 ‘환경, 지역, 인종, 성별 심지어 가난과도 관계없이 개인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미국 공화당의 핵심적인 신념과 맞닿아 있다.
더구나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흑인’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여성이다. 이런 그녀가 그 모든 약점을 장점으로 바꾼 원동력은 ‘교육’과 ‘자기계발’이었다.
콘디는 1954년 11월14일 앨라배마에서 태어났다. 1950~60년대 앨라배마는 미국 남부 지역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인종분리정책이 시행된 곳이다. 흑백갈등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린 미국 현대문학의 걸작 ‘앵무새 죽이기’의 무대도 앨라배마다. 앨라배마 중에서도 콘디의 고향 버밍햄의 인종차별은 특히 심했다.
아직 콘디가 태어나기 전 일이지만 1952년 아버지가 투표 등록을 하러 갔을 때 등록부 직원이 콩이 가득 든 커다란 깡통을 가리키면서 “콩알 수를 알아맞히면 선거용지를 주겠다”고 빈정거릴 정도로 흑인들은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콘디가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통해 밝힌 경험도 몇 가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이다. 어머니와 옷을 사러 백화점 의류매장에 간 콘디가 옷을 골라 탈의실로 향하자 백인인 백화점 점원이 옷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탈의실은 백인 전용”이라며 “정 옷을 입어보고 싶으면 창고로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콘디 모녀가 “여기서 옷을 사지 못한다면 다른 가게에 가서 웃돈을 얹고 사겠다”며 맞서자 결국 점원은 탈의실로 콘디를 안내했다.
콘디는 성년이 된 뒤 한 인터뷰에서 “당시 그 점원은 탈의실 밖에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각되면 일자리를 잃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될게 뻔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있던 표정이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콘디는 친구와 보석가게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점찍어둔 물건을 보여달라는 콘디에게 점원이 “흑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며 버틴 것이다. 콘디는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합시다. 당신은 시간당 6달러를 벌기 위해 점원 일을 하고 있고 난 당신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카운터 반대편에서 보석을 보여 달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차별은 사소한 축에 속한다. 당시 버밍햄의 분위기는 극렬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들이 테러를 가할 정도로 흉흉했다. 콘디가 아홉 살인 1963년 집 근처 교회가 흑인신도들이 있다는 이유로 백인 과격파들에 의해 폭파되었고 콘디 친구 두 명도 목숨을 잃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조사를 거부해 콘디 아버지는 소총으로 무장하고 이웃들과 직접 야간 순찰을 돌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은 콘디가 나중에 총기 통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다행히 상황은 점점 좋아졌다. 열 살 때인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 내 모든 공공장소에서 흑백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법이 발표된 날, 콘디 가족은 일부러 백인 전용 식당을 찾아 역사적인 날이라며 자축하는 의식을 가졌다. 일종의 분풀이였던 셈이다. 콘디는 당시 식당을 찾은 가족의 모습에 놀라 음식을 넘기지 못했던 백인들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콘디가 덴버대학에 들어갈 당시 미국에는 윌리엄 쇼클리의 열성학(劣性學)이 번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IQ가 낮은 흑인들 때문에 인류가 퇴보한다’는 것이었다. 흑인 출산율이 백인보다 높아 ‘가까운 미래에 위험한 사태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
대부분 과학자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이론이라고 무시했지만 쇼클리가 트랜지스터의 공동발명자이자 반도체를 개발한 주역으로 노벨상까지 탄 과학자라는 사실 때문에 지지자 또한 많이 있었다.
어느 날, 콘디는 한 교수가 쇼클리의 논문을 인용하며 열변을 토하는 것을 억지로 듣고 있었다. 마침내 ‘서구 문화의 보물인 예술·문학·기술·언어학 이 모든 것이 바로 흑인보다 우수한 백인들의 지적능력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대목이 나오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강의실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다.
“교수님, 저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고 베토벤을 연주합니다. 당신들 백인보다 당신네 문화에 더 능합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육체적·심리적 한계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이와 직면한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분노하는 것이고 하나는 인정하는 것이다.
콘디와 콘디 부모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렇다고 무조건적 순응을 한 게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았다. 무남독녀 외딸이 인종차별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콘디 부모의 전략은 ‘인내심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콘디는 “부모님은 내가 비록 월 워스(옷이나 음식을 팔던 미국의 소매체인)에서 백인들과 햄버거를 함께 사 먹지는 못할지라도 나중에 커서 미국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고 가르쳤다”고 회상한다. 실제로 콘디의 부모는 “사회는 어떤 식의 장벽이든 이것을 넘어서는 개인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딸에게도 “장벽을 개탄하는 대신 뚫고 나가는 방법에 골몰하라”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딸에게 한번도 “우리는 피해자”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콘디가 철이 들어 인종차별에 대해 질문할 때도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게 마련인 흑인 동류집단에 참여하는 것도 신중히 했다. 연좌농성이나 시가행진을 통해 집단의 동질성이 주는 힘과 위로를 거부하는 대신 묵묵히 딸의 실력을 길러줬다.
‘힘’을 바탕으로 한 콘디의 현실주의적 외교관도 사실은 어릴 적부터 받은 이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교육방식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콘디의 집안은 물질적으로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다 해도 부모가 모두 교육자인 중산층이었다. 조부모와 부모는 대학까지 마쳤고 아버지는 목사이자 교수였으며 어머니도 고교 음악교사였다. 모두 험악한 인종차별이라는 고난의 시대를 묵묵히 타파하며 살아온 진정한 투사들이었다.
콘디는 음악, 발레, 외국어, 스포츠 등을 배웠으며 고전도 탐독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비롯해 다양한 악기 연주법도 배웠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글을 깨치기도 전에 악보를 먼저 읽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탈리아어인 콘돌체자(condolcezza·부드럽게 연주하라는 뜻)에서 딸 이름을 빌려온 모친은 다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영특한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고교 교사직까지 휴직했다.
②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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