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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②

발행일: 2008-10-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평범한 연구자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뒤바뀌었다. 장벽 근처에 살고 있던 그는 장벽이 붕괴되던 날 저녁,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사우나에 있었다. TV로 소식을 듣고 친구와 장벽으로 달려갔다. 당장 함부르크 이모에게 전화하고 싶었지만 공중전화도, 서독 동전도 없었다.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인들은 정치적인 삶을 살았다. 정치가 변하면 곧 삶이 변화하니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싶은 욕망도 솟았다. 메르켈이 어떻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전기 작가 하요 슈마허는 “메르켈은 동독에서의 삶을 통해 국가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일찍부터 배웠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4일 뒤인 13일 메르켈은 폴란드로 출장을 갔는데 그곳 사람들에게서 “곧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상황은 급속도로 진전됐다. 12월 중순 라이프치히 크리스마스 장터에서는 독일 통일을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수만여 명에 달하는 동독 국민은 정부 위협에도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슈타지 물러가라’ ‘집단탈출을 막으려면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평화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숫자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헝가리와 체코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는 사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장벽 붕괴 후 약 6주가 지난 1989년 11월9일 메르켈은 새로 만들어진 야당 ‘민주변혁’의 문을 두드린다. 자신과 말이 통한다고 생각되는 지식인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적 일처리 절차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한다. 수수하고 소녀다웠던 그는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솔선수범해 해결책을 제시, 삽시간에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하루빨리 통일이 되고 화폐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굳힌다.


이듬해 2월 민주변혁당이 선거준비를 하게 되자 연구소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민주변혁당은 볼프강 슈누어 당수가 슈타지의 비공식 직원이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1%도 안 되는 지지율로 참패했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그에게 동독 정부 부대변인 자리에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온다. 바야흐로 공식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항상 약속을 지키고 조용한 성격에 문제의 본질을 포착해내는 능력 덕분에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항상 검정치마와 검정 재킷, 굽이 편평하고 디자인이 단순한 신발을 신고 다녀 ‘제대로 좀 입고 다니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촌스러웠다. 재미있는 것은 메르켈은 이런 요구에 반항이라도 하듯 수년 동안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그 특유의 고집이 묻어난다.



메르켈은 무엇보다 자신이 ‘여성’ 정치인으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스타일링’을 통한 성취나 남자들이 말하는 ‘여자로서의 무기’를 이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남성지배적인 정치계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메르켈은 후에 통독정치의 중앙으로 진입하며 ‘미디어 영향이 지대한 민주주의사회’에서 더 이상 촌스러움이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옷차림에 신경을 쓰긴 했다.


메르켈의 부대변인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맡은 지 5개월 뒤인 8월31일 새벽 동서독 양국이 45개의 조항과 1000여 쪽에 달하는 통일조약에 서명하면서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통일 이후 그의 삶은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연방언론정보기관 참사관을 거쳐 12월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고 한 달 만에 통일독일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돼 세상을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남녀를 통틀어 독일 역사상 최연소(35세) 장관이었다.


메르켈의 발탁에는 헬무트 콜 총리라는 배경이 있었다. 콜 총리는 동독 출신의 젊은 여성 정치인에게 비교적 ‘부드러운’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부서를 맡김으로써 동서독을 아우르는 정치를 하고 싶어했다.


이 때문에 메르켈은 ‘콜의 양녀’로 불리기도 했다. 하긴 그는 신용카드사용법부터 새로 배워야 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빠르게 익혔다. 쉬지 않고 일만 해 직원들로부터는 ‘차갑고 정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정치적 기반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자 1991년 민주변혁이 흡수 통합된 기독민주당 브란덴부르크 지구당위원장에 도전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서독 출신으로 친기업 성향을 띠었던 울프 핑크에게 참패하지만 주류 정치무대 진입을 위한 신고식으로는 제법 괜찮은 도전이었다.


메르켈은 이듬해인 1992년 기민당 부당수 선거에 도전해 86%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엔 콜 내각의 환경부 장관이 된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사안을 다루는 부서를 담당했던 것과는 달리 환경부는 정치적인 쟁점의 중심에 있는 사안들을 다루는 부서로 환경부가 내리는 결정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물리학자였다는 배경을 생각하면 장관 자격은 충분했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과연 일을 잘할지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고 환경보호단체들은 영향력 없는 사람을 앉혔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이런 혹평을 1995년 베를린에서 열린 유엔기후정상회의에서 날려버린다. 당초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온실가스 배출량 축소를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베를린협약’을 2주간의 협상 끝에 채택해낸 것이다.



130개국에서 온 대표단 1000여 명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국제회의에서 조정하고 마침내 모든 참가국이 수용할 만한 결과를 끌어내 짧은 시간 내에 복잡한 기후보호 분야의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했음을 증명했다. 의심의 눈초리는 걷히고 직원들도 그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1998년 독일 총선은 콜 시대의 종식을 가져왔고 메르켈의 8년 장관 생활도 끝났다. 그러나 메르켈은 집권당인 기독민주당(기민당) 새 당수 볼프강 쇼이블레가 그를 사무총장으로 낙점하면서 정치인생을 이어간다. 메르켈이 환경부 장관이던 시절 자문을 하며 맺어온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지만 메르켈의 일처리 능력에 대한 신뢰의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하요 슈마허는 “남자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실패할 때, 실패가 없던 메르켈이 서서히 중앙으로 진입한 것을 알 수 있다”며 “어떻게 성공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냐가 그녀의 삶을 이끌었다”고 분석한다.


‘남자들의 실수’란 기민당과 콜을 뒤흔든 ‘불법자금 스캔들’을 말한다. 이 사건은 콜 정부에서 재정 담당위원을 지낸 사람이 구속되면서 정당 기부금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시작됐다.


궁지에 몰린 콜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수년간 기부금 운영과 관련해 ‘실수’를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정당 기부금법을 거스르며 받은 액수가 ‘150만~200만마르크’라고 실토했지만 제공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 스캔들은 기민당이 1년이나 여당 본연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타격을 입혔다. 이 과정에서 메르켈은 빈틈없이 진상을 밝히겠다는 태도로 일관해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이크 앞에 나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부금 수수 과정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고 공격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을 키워준 콜이었다.


메르켈은 1999년 12월22일자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실명 기고라는 ‘폭탄’을 터뜨린다. “콜의 시대는 영원히 갔다. 당은 이제 (콜 없이도)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부금 제공자를 밝힐 수 없다’는 콜의 말은 신의를 법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합법적인 사안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법에 위배되는 사건에서는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기민당은 발칵 뒤집혔다. 당수인 쇼이블레조차 신문을 통해 알고 펄쩍 뛰었다. 메르켈의 행동은 명백한 배신행위였다. 하지만 당시 콜뿐 아니라 쇼이블레조차 10만마르크 기부금을 불법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라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쇼이블레는 1999년 12월 불법 비자금 사실이 불거져 나오자 부인하다 2000년 1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시인하고야 만다. 기민당은 다시 표류했다.


이 과정에서 메르켈은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덕분에 기민당을 재정비해 새 출발의 시동을 걸 유일한 사람으로 부각됐다. 마침내 2000년 2월 쇼이블레는 사임하고 두 달 뒤 열린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메르켈은 935표 중 897표를 얻어 당수에 선출된다. 메르켈은 입당한 지 10년 만에 당내 최고 권력자가 됐다.


마침내 메르켈은 2005년 11월 처음으로 독일 여성 총리에 올랐다. 기민당이 또 다른 우파정당인 기독사회당과 연합하고, 좌파인 사회민주당을 한데 묶어 대연정을 구축해 정권을 잡은 것이다.


‘로마인이야기’의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인간은 어차피 고생하며 사는 것, 기왕이면 즐겁게 고생하는 길을 제시하는 게 리더의 역할”이라며 “국민을 즐겁게 해주는 낙천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최고”라고 했다. 낙천적 리더십이란 단순히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중장기적인 안목과 역사의식,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 연구소장에 따르면 “시대마다 원하는 리더십의 내용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메르켈은 “당대 독일인이 원하는 안정감 있고 낙천적인 성격과 비전을 갖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게르트 랑구트 독일 본대학 정치학 교수가 인터뷰(책 ‘앙겔라 메르켈’ 중)에서 인생관을 묻자, 메르켈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불평하기보다 해결책을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저는 교육을 통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변화해야 한다고 깊이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변화는 무섭거나 끔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혹은 우리 편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하고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안타깝습니다. (중략) 저는 독일이 누구의 위에도 아래에도 있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딱 맞는 위치를 찾고 다른 나라들의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제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메르켈은 대중을 사로잡는 쇼맨십이나 수려한 용모와 말솜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메르켈이 산전수전 다 겪은 서독의 ‘정치 9단’들을 물리치고 총리에 오른 것에 대해 하요 슈마허는 “남을 믿지 않으며 자기 앞을 가로막는 정적(政敵)은 가차 없이 제거하며, 비판자들을 우군으로 만드는 권력의 십계명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우선은 올바른 비전을 바탕으로,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단호함과 원칙을 지켜가려는 노력이 독일 국민의 마음을 샀다고 보는 게 옳다. 여기에 철저한 노력과 근면함, 과학자다운 치밀함, 적들이 적시에 나가떨어져주는(?) 운(運)도 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무런 정치기반이 없는 동독의 여자 과학자가 총리까지 된 데에는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는 독일 문화에 그 비결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의 전기를 읽다 보면, 그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문제해결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기에 오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합리적인 독일 정치문화가 있지만 말이다. 그는 권력 자체보다 ‘어떤 일을 해야 독일이 더 번영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앙겔라 메르켈의 삶을 보니 분단국가 국민으로서 부러움이 든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통일을 이룬 독일. 사회주의 국가 출신 정치인을 수장으로 자본주의의 꽃을 더 크게 피우는 독일. 독일과 우리는 인연이 많다. 독일은 현재 한국의 네 번째 교역국가로, 과거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종자돈을 벌었던 나라이고, 1964년 차관으로 우리나라 근대화를 도운 나라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우토반을 달린 후 한국에도 고속도로를 놓아야겠다고 해서 시작된 게 경부고속도로이지 않은가.


두 나라 모두 전쟁의 폐허 위에서 동서와 남북으로 분단됐지만 공산화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며 ‘라인 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한국도 독일처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될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 참고도서


현재 국내에는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제목의 평전으로 니콜 슐라이(서경홍 옮김, 문학사상사), 레르트 랑구트(서유리 옮김, 이레)가 각각 쓴 책이 나와 있다. 두 권 모두 시간 순서대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최근 나온 ‘독일을 바꾼 기다림의 리더십’(하요 슈마허 지음, 배인섭 옮김, 아롬미디어)은 메르켈 리더십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먼저 평전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읽으면 정리가 잘 된다.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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