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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대중자본주의’ 전도사 마거릿 대처 ②

발행일: 2008-07-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대처는 하나의 방침이 서면 끝까지 관철했다. 그렇다고 돌격대장식이 아니라 나름의 승산이 있다고 계산될 때 행동했다. 사자처럼 고함만 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능하다고 판단한 후에 움직였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1993년 11월 일본을 방문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정치가에게는 신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TV의 발달로 정치가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정치가는 자기의 철학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중에게 영합하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지도자라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야 하고 그러면 국민은 으레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대처는 그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돌아가시오. 나는 유턴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국회에서 동료들로부터 단순하고 천진하다는 비판을 들을 만큼 늘 진실을 말하려 애썼다.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사실이나 원칙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그의 특기가 ‘불의로부터 정직하며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하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대처는 영국을 다시 일으켜 자신감을 회복하고 국력과 국제적 위신을 되찾는 일에 헌신했고 그 소명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이제 영국병은 완전히 치유됐다. 2006년 통계에 의하면 영국은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미국,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으며 기업자유지수에서도 6위에 올라 있다.


대처 취임 첫해인 1979년 17%이던 인플레이션 율이 집권 마지막 해인 1985년엔 9%로 떨어졌다. 1980년 마이너스 4%를 기록한 국내총생산도 해마다 증가해 1988년에는 5%의 성장을 보였다. 대처가 세 번이나 총리에 연임된 것은 이처럼 눈부신 경제성장 덕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영국의 모든 것을 바꿨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는 대처의 유산(遺産)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노동조합의 세력 약화’를 꼽는다. 노동조합을 여러 이익단체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노동시장이 정부의 간섭이나 통제가 아니라 시장조건에 따라 반응하게 해 고용을 늘린 것이다. 조합원들은 시대변화에 적응해 수준 높은 일자리와 기술을 창출하고자 기업의 성공을 바라게 됐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조합총회가 나라의 국가경쟁력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하면 노조가 기업의 적대세력이 아니라 효율적인 파트너가 될 것인지를 총리와 각료 앞에서 브리핑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2000년 9월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파업을 벌이자 노조가 나서서 총리에게 엄벌을 요구할 정도였다.


대처는 영국을 ‘파업의 나라’에서 ‘비즈니스의 나라로’ 바꾸었다. 실제로 취임 첫해 2125건에 달하던 파업과 2만9474일에 달하던 노동손실일은 1985년 각각 903건, 6402건으로 줄었다. 대처 정권이 발족할 당시 노조원 수는 1200만을 넘었으나 집권 말기에는 800만 수준으로 떨어졌다.


박지향 교수가 꼽은 대처의 두 번째 유산은 관료국가의 독주를 막고 시민사회를 해방시킨 것이다. 국가의 역할을 크게 줄이고 개인의 영역을 확대해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덜 의존토록 하고 교육과 의료보험과 국영산업 분야에 시장경제를 도입해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1970년대 영국 경제는 시장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한국보다 뒤처질 정도였다. 캐나다의 프레이저 연구원이 작성한 경제자유지수에서 1970년 영국 경제의 자유평점은 54개국 가운데 33위였고 한국은 30위였다. 그러나 2006년 조사에서는 영국이 6위, 한국이 36위였다.



대처의 세 번째 유산은 앞서 언급한 대중자본주의다. 그는 노동자들을 중산층으로 만들었다. 국민의 4분의 1이 주식을 갖도록 했다. 대처 집권 이전보다 5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또 국민의 3분의 2가 자기 집을 갖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대처는 세금을 삭감해 사람들에게 금전적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소비와 투자를 활성화하고 경제를 부활시켰다.


대처 정부는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을 택했다. 18~19세기 세계의 공장을 운영했던 영국인들은 금융을 비롯한 서비스업, 컨설팅, 광고, 연예, 레저사업에서 서서히 빛을 발했다. 오랫동안 침체에 빠졌던 경제는 금융 서비스와 첨단기술에 힘입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만 대처 집권기간에 빈부격차와 지역격차는 더 커졌다. 이에 대한 비판에 대처는 이렇게 답했다.


“단지 돈을 아낀다든지 세금을 깎는다든지 하는 게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곤궁한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을 척결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목표 중의 하나는 그 속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개인의 재능이 발휘되는 사회는 인내하고 자신감 있고 통합된 형태의 사회를 목적으로 합니다. 사회를 함께 묶어주는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즉 사회를 단순히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응집력 있게 만들려는 관심의 증대입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국의 부활을 이끈 대처의 생애는 유능한 국가지도자의 힘이 국가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대처’ 하면 떠오르는 ‘철의 여인’ 이미지는 단지 그가 강단 있는 지도자였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자유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있었다. 그런 믿음 아래 자신의 신념을 흔들림 없이 끌고 간 것이다.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일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철학이다. 소모적인 이념논쟁에 휩싸여 국제경쟁의 속도전에서 뒤처진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철학이다.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 참고도서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처 평전은 몇 종 안 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박지향 교수의 ‘중간은 없다’이다. 박 교수는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확고한 이념적 바탕 위에서 대처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비춰 고품격 평전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대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고승제 전 서울대 교수(한국경제학회장 역임)가 쓴 ‘마거릿 대처‘도 읽을 만하다.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로 대처의 삶과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1995년 암으로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병상에서 구술한 원고를 타이핑해 완성한 역작이다.


단국대 박동운 교수가 쓴 ‘대처리즘 :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대처의 성과를 다뤘다. 각종 통계자료와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경제학적 잣대를 통해 영국병의 치유과정을 다뤘다.


‘국가경영’(김승욱 옮김)은 대처가 직접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국제 문제에 대한 시각이 주로 담겨있다. 뒷부분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비판자들’이란 논문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단순한 이론적 지지를 넘어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경험과 지혜가 담겨 있다.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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