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실패한 뒤 더욱 빛나는 칼리 피오리나 ②

발행일: 2008-08-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그녀는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할 때 결혼을 했다. 남편은 장차 교수를 꿈꾸는 학생이었다. 남편이 이탈리아 볼로냐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부동산 회사를 퇴사하고 이탈리아 생활을 시작하면서 살림을 하고 MBA공부도 시작한다.


그녀는 전 과목 A학점으로 졸업했고 AT&T에 입사했다. 그런데 일에서 성공할수록 결혼생활은 불행으로 치달았다. 수입이 남편보다 많아지면서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생활을 이끌어갔을 때는 아무래도 경제권이 남편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칼리가 성공해 동등한 입장이 되면서 남편이 속을 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출장을 간다며 몇 주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주말에도 사무실에 일하러 간다며 외출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결국 거짓말로 밝혀졌다. 칼리가 수입의 대부분을 남편에게 맡긴 게 화근이었다.


남편에게 실망한 뒤 칼리가 겪는 심적 갈등은 이혼을 고민하는 보통 여자들의 그것과 똑같다.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여겼던 사람이, 신뢰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들이 유능하고 성공한 여자에게 얼마나 위협을 느끼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직장에서는 그런 경험을 몇 번이고 해봤지만 결혼생활에서까지 현실로 드러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지금의 나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다’라고 믿으며 성장한 사람이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던 사람이 내 재능에 분개할 수 있을까?”


결혼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시기 칼리는 직장 상사이자 친구인 여성들과 속 깊은 대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고민을 나눴다고 한다. 동료애가 흔들리는 그녀를 다잡은 것이다.


요즘 남자들은 똑똑하고 능력 있는 부인을 이구동성으로 원하지만, 그런 아내를 얻으려면 먼저 자신이 그런 사람을 아내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진정 자신은 아내를 북돋울 수 있는 남자인가 하는 것이다.



칼리의 두 번째 남편은 회사 동료였고 능력 있는 칼리를 사로잡은 것은 유머와 따뜻한 마음, 무엇보다 여자를 북돋우는 자세였다. 여자의 능력을 위협이 아니라 짜릿한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남자만이 새로운 시대에 능력 있는 여자를 얻을 자격이 있다.


두 번째 남편은 딸 둘을 둔 이혼남이었음에도 이런 멋진 덕목으로 칼리와 결혼했다. 칼리는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없었다” (칼리의 말). 그러나 지금의 가족으로도 완전하며 서로를 부부로 발견한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일하는 여성이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성적(性的) 소수자로 겪는 비애나 애환은 그야말로 ‘글로벌’이라는 것을 칼리의 경험에서 추정할 수 있다. 칼리는 그와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를 자서전에 소개하고 있다.


AT&T라는 새 회사에서 동분서주하며 일을 배우고 있던 칼리는 무엇보다 상사의 신뢰와 격려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고객을 만나는 자리에 합석하라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야 내가 팀의 일원이 되는구나” 하는 기쁨도 잠시, 만나기로 예정된 전날 그녀는 상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식당으로 정하다보니 데려갈 수 없다는 것. 그 식당이란 다름 아닌 스트립 바였다. 식사 중 속이 비치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식탁으로 올라가 춤을 추는 그런 식당이었다. 그녀는 상사의 말을 듣고 너무 낙심해 여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필자도 이런 경험 많다!) 곰곰이 생각한다.


‘그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기회를 잃는 것이다. 상사가 안 된다고 한다 해서 그대로 따른다면 나는 그에게 가벼이 보일 수 있다.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일이든 부당한 일이든 문제를 풀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상사의 몫이 아니라 내 몫이다.’


그녀는 퇴근 시간 무렵, 상사 책상으로 가서 이렇게 말한다.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진 않지만, 저도 내일 식사 자리에 가고 싶네요. 그럼 거기서 뵈어요.”


거의 호통 치다시피 말하고 나오긴 했지만 속마음은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가장 보수적(?)인 옷을 골라 입고 서류가방을 방패처럼 들고 거울 앞에 서서 ‘난 커리어 우먼이야’ ‘난 커리어 우먼이야’라고 몇 번 씩 외치며 끊임없는 자기 암시를 하고 집을 나섰다. 클럽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이상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옷차림으로 클럽에 들어서자 모두의 눈이 칼리에게 쏠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예약석을 찾아 앉은 칼리는 오로지 클라이언트만 상대했다. 상대방 회사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고 테이블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시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상사는 ‘예상대로’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진토닉을 들이켜면서 아가씨들을 계속 불러대며 테이블에서 춤추게 했다.


마침내 한 아가씨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이 “죄송해요. (칼리를 눈으로 가리키며) 이 숙녀분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는 춤을 못 추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자리를 뜨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칼리는 댄서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객에게 AT&T 제품을 열심히 홍보한 후 상사를 남겨두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사무실에선 칼리의 무용담이 삽시간에 퍼져 있었다. ‘칼리가 당차게 행동했다’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켜준 덕분에 상사는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는 클럽에서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그녀의 지혜로운 모습이다. 장애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넘을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듯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장애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지혜롭게 넘었다. 자기도 피해를 보지 않고 더구나 상대방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중요한 거래처 임원과의 만남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남자가 계속 칼리의 사생활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직업이 뭔지,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 그 남자는 남자들에게는 전혀 묻지 않은 질문을 칼리에게 계속 해댔다.



처음에는 잘 참아내던 칼리도 결국 냉정을 잃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뒤 주차장에서 혼자 펑펑 울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났다. 바로 집으로 갈까 생각했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거래처 사람은 칼리에게 미적지근하게 사과했다.


그날 밤 칼리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잠자리에 누워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다시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울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남이 한 생각이나 말 때문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좁은 마음이나 편견을 짐으로 떠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인생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특히 그렇다.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위축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혼자 다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리라.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만한 이유가 있는 옳은 일에 매진하리라. 내가 선택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혹은 하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다.”



그녀는 일 때문에 만난 클라이언트가 비즈니스에는 관심이 없고 여자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래를 포기했지만 다음날 그 클라이언트가 “칼리와 멋진 잠자리를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질 나쁜 경험까지 있다.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만이 복수”라는 생각으로 일에 몰두했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쟁력이 없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것도 제법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내가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속단했다. 희롱당하고 유혹당한 적도 있다. 그들의 편견을 당사자인 내가 나서서 깨뜨리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에게 존중받지 못한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는 것만이 답이다.”


그녀는 나중에 AT&T 사장이 되어서까지 “늙은 여자들은 너무 감정적이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승진하기 위해 상사와 잠자리를 했다”는 마타도어까지 감수해야 했다. 남성 CEO들이 직원을 해고하면 ‘단호하다’고 칭찬받았을 일을 여성이었기 때문에 ‘보복인사’라는 딱지가 붙는 억울함도 당했다고 한다.


칼리는 이런 산전수전(?)을 겪으며 나름대로 일하는 여성의 전형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건대 “여성의 최대 약점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특히 여성은 상대에게 유쾌하고 붙임성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날이 갈수록 ‘사랑받는 것보다 존중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깨닫게 된다.

 

 



어떤 여자들은 섹시하고 연약한 여성적 매력으로 남성의 환심을 사려고도 한다. 물론 이것은 때로 약(藥)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毒)이다.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원칙을 지키는 여성이라면 사랑보다 존중을 받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회사의 정치는 실제 정치처럼 권력을 기반으로 한다. 누가 권력을 잃느냐, 누가 권력을 원하느냐, 누가 권력을 획득하느냐. 우리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하는 착각 중 하나는 직급과 직위가 그 사람의 인품과 비례한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단코 아니다. 필자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자기만 아는 철저한 에고이스트, 권력을 갖기 위해 인품이나 자존심을 내팽개칠수록 성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 더 맞다.


“어떤 직위에 앉아 있든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상당히 놀랐다. 상사가 언제나 가장 잘 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실로 인해 권한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자라면서 배운 것, 즉 ‘사람의 가치는 직위나 직책이 아니라 됨됨이와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관리자들이 일 잘하는 부하보다 대하기 편한 부하들을 챙기는 데 더 열심인 것은 미국 사회라고 다르지 않다. 언젠가 칼리는, 성과 면에서는 자기가 앞섰는데 인사고과에서 연줄이 뛰어난(물론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동료에게 밀리는 불이익을 당할 뻔한 상황에 놓인다. 상사는 칼리를 있지도 않은 일로 모함해 다른 사람을 두둔한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그녀는 성큼성큼 상사 책상으로 다가가 버티고 서서 이렇게 묻는다.


“제가 매니저 님 밑에서 일할 때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당혹) 아니, 왜 그래?”


“제가 다른 사람의 성과를 가로챘다고 생각하셨나요?”


“아니야.”


“확실합니까?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진작 저한테 말해주셨어야죠.”


“아니라고, 칼리. 정말이야. 자네는 우리 부서 최고의 고객 회계 주임이었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그럼 다시는 다른 말 하지 마세요. 지금부터 제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거든, 내 면전에 대고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일은 그 상사의 윗선인 관리 책임자가 칼리를 찾아와 사과하는 일로 결말이 났다.


직장에서 칼리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란 부지기수다. 이럴 때 과연 공격적으로 투쟁할 것인지, 참을 것인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글쎄, 답은 없다. 어떤 땐 참아야 하고 어떤 땐 싸워야 한다. 다만 칼리의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뒷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협박을 해서는 안 된다. 합리적으로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으름장을 놓을 수밖에 없다면 협박이라도 해서 밀고 나가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말버릇이 험한 사람은 아주 많다. 비즈니스계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성과가 좋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잦다. 모욕적인 행동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예의와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21세기는 누구라도 선도해나갈 수 있는 시대다. 물론 불의와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늘날의 리더십은 지위나 돈,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리더십은 성별이나 피부색과 관계가 없다. 육체적인 재능이나 출신과도 관계가 없다. 적절한 지원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선도할 수 있다. 리더란 다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진 리더십을 알아보고 협동력과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그것을 엮어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칼리는 이렇게 말한다.


“리더가 할 일은 부하 직원들의 가치를 더하는 것이지, 직원들을 지배하거나 공을 가로채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잘 돌아갈 때 직원들은 리더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직접 가서 그들에게 도움 줄 부분을 찾아야 한다. 직원들은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지 못해 결국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리더의 일이란 바로 그 원인을 찾는 일이다. 의사가 증상만 진단하는 게 아니라 질병 자체를 치료하듯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성공한 ‘여성’으로 비치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내가 비즈니스계의 여성이란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저 비즈니스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내가 성공한 여성일 수 있었던 것은 남성들이 나를 묵살하도록 용납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필요하면 그들에게 도전했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했다. 그리고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서 나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여성의 능력에 회의적이던 남자들이 나로 인해 그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나를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여성들을 격려하고 기회를 줬다. 이런 게 진정한 페미니즘의 승리 아닌가?”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편견과 장애,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전진 전진하고 있을 수많은 일하는 여성이여, 힘든 순간이라면 칼리가 힘들 때마다 외쳤다는 좌우명을 되뇌어보자.


“당당하게 서라. 할 수 있다면 혼자 서라. 자신이 옳다면 승리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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