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

[세기의 철녀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 ②

발행일: 2008-09-01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신동아
 

할리우드 스타 인터뷰를 묶어 펴낸 ‘할리우드의 일곱 가지 죄악’이란 책은 공전의 히트를 한다. 이탈리아 독자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 홀린 듯 매료되어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아서 밀러와 커피를 마시거나 제인 폰다와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글을 읽었다.


할리우드 취재를 시작으로 전세계를 무대로 한 그의 본격적인 취재 역정이 시작된다. 1960년 사진기자와 함께 사진기 10대와 타자기 1대를 들고 파키스탄 인도 홍콩 일본 하와이 미국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여성’이었다. 중국과 동남아 여성들을 통해서는 가부장제를 공격했고, 자이푸르의 지도자를 방문했을 때에는 왕 옆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 이야기를 통해 왕실의 풍요를 지탱하는 빈곤한 여성의 삶에 주목했다.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살지만 낙태와 피임을 하면서 성형수술에 광적인 여자들의 삶을 취재했다.


마지막 목적지인 하와이와 뉴욕에 내린 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이 너무 불행하고 우울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남자들에게 경제적 인종적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여자들은 성적인 차별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당시의 기사들도 ‘쓸모없는 성(性)’이란 제목을 단 책으로 묶여 나온다.


그는 물론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나 전통적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페미니즘이야말로 현대 최대의 혁명이다. 하지만 여자를 희생자나 피해자로 전락시키는 페미니스트들은 지긋지긋하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측면에서 독재자나 마찬가지다.” “여자는 특별한 동물이 아니다. 여자들이 왜 별도의 이슈로 취급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여자들을 마치 단성생식으로 태어난 존재처럼 취급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그는 평생 “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가정 대신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뇌리에 뿌리박힌 그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오리아나가 어릴 적부터 바느질을 하고 옷을 빨아 다리고 살림을 하기보다 여행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철이 들어 결혼적령기가 되자 ‘남편’이란 존재를 떠올리면 귀찮고 겁이 났다. 아마도 흐느끼면서 “넌 일을 가져야 해”라고 말하며 내게 옷을 입혀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잠재의식 속에 남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오리아나에게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포기한 탓에 더 자유로운 연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남자를 사랑했으며 그 남자들 각자에게 충실했다고 그의 전기를 쓴 산토 아리코는 전한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그의 연애담 중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며 공개된 것이 있는데, 바로 한 그리스 혁명가와의 사랑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두 사람의 극적인 스토리는 그가 소설 형식을 빌려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알려졌다.



그의 연인은 그리스의 시인이자 반독재 운동의 영웅인 알렉산드로스 파나고울리스다. 첫 만남은 인터뷰에서 시작됐다. 그는 1968년 그리스의 독재자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고문을 당하며 사방 1.5m도 안 되는 무덤 같은 독방에 42개월 동안 감금됐다. 그러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석방탄원을 내 ‘국외 추방’ 조건으로 석방됐다. 오리아나는 세계적 저항인사가 된 그의 석방에 맞춰 인터뷰를 하러 갔다.


1973년 8월 어느 날, 그는 감옥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군사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강인한 파나고울리스의 내면에 압도됐다. 그 후로도 몇 번 다시 만나 그의 시와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정부 기관원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의 연인이 되었다. 파나고울리스는 서너살 연하였다. 연인이 석방된 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함께 살았다. 남자는 망명객 신세였지만 비밀조직을 결성해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1974년 여름, 그리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간정부가 세워지자 파나고울리스는 고향 아테네로 돌아가 국회의원이 된다.


이후에도 그는 새로운 민간정부의 부패를 추적하며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고, 그러던 중 1976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비리 추적의 대상이던 한 장관의 짓이라는 게 분명했지만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사건은 의문사(疑問死)로 묻힌다.


당시 어머니까지 암 투병 중이어서 오리아나는 심적으로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에우로페오지(誌)와의 불화까지 겹치자 돌연 사표를 쓰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히지만 역시 그답게 ‘일’로 극복한다. 반정부 운동의 영웅과 나눴던 은밀한 사랑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기로 한 것이다.


생전의 연인이 겪었던 것과 똑같이 그의 감금 생활을 기억하며 방이 10개가 넘는 자신의 대저택에서 가장 작은 골방을 골라 그 안에서 꼼짝 않고 3년 반을 틀어박혀 작품에 매진한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떤 땐 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 속에 고립되어 계속 글만 썼다.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말이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워대다 보니 식욕도 사라졌다. 죽은 애인을 옆에 두고 그 넋 속을 헤매면서 영혼과 육체가 한덩이가 되어 대화하듯 숨 막히게 써내려갔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사랑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엄청난 기록이며 엄숙한 고발이고 쓰디쓴 체험’(‘한 남자’의 번역자 김범경)이었다.



 

무려 네 번이나 고쳐 쓰며 완성했다는 이 책은 ‘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그는 소설 형식을 빌려 권력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진실과 자유를 위해 외롭고도 끈질기게 싸운 한 혁명가의 삶을 복원했다. 독자들은 현대영웅의 초상을 통해 폭정을 고발하면서도 문학적이고 저널리즘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오리아나는 평소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사랑이란 희생자를 집어삼키는 덫이며 불행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연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후 사랑의 힘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지만 집착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가 없는 지금 그는 내 머릿속 유령이 되었다. … 사랑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거기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쓰던 3년 동안 그를 지탱해준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잊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였다.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 대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누비던 그를 무려 3년이나 칩거하게 만든 동기였다.



그가 베트남에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38세 때인 1967년이었다. 사전에 ‘만일 사망해도 뒷말은 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미군 수송기 편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67년과 68년 1년간 현장을 뛰면서 병사들과 인터뷰했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로도 7년간 간헐적으로 베트남을 찾았다.


그는 단순히 여성 종군기자가 아니라 남녀를 통틀어 자기만의 독특한 전쟁보도 스타일을 확립한 기자였다. 병사가 적을 죽일 때의 생각과 느낌을 알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전쟁터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고, 병사들과 함께 순찰을 했으며, 심지어 베트콩들이 있는 곳에 폭격을 퍼붓는 현장에 달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일에 직접 참여하는 보도 스타일에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문학적 장식을 입힌 글 덕분에 독자는 마치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에서 자유로웠다.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베트남의 어린 혁명가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대의를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 미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차츰 바뀌어갔다. 그는 그런 때에도 “혼돈스럽다”고 솔직하게 기사에 썼다.


“판단을 내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가. 내가 베트남 혁명가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게 잘못이었을까?”


협조를 거부한 동족을 무참히 즉결 처형하는 베트콩을 보면서 서서히 변해가던 그는 사이공 전투 중 포로로 잡힌 기자들까지 처형되는 현장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한때 베트콩을 자유의 투사로까지 보았던 자신의 생각이 이상이었음을 깨달으면서 ‘그들(베트콩) 역시 짐승이었다’고 토로한다.


사람들은 그를 ‘줏대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사이공에서 쓴 기사가 나간 후 미국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노이에서 쓴 기사가 보도된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더러 미국을 위해 일하는 반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나는 이 운명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기자는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지난 6월의 ‘촛불시위’를 떠올렸다. 촛불시위 현장을 보면서 기자 역시 생각이 변해갔기 때문이다. 처음 여중고생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기자는 “철없는 학생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정부와 대통령이 계속 말실수와 실책을 하면서 촛불민심은 삽시간에 확산됐고, 급기야 6월10일 100만 인파로 불어났다. 이후 촛불은 광기와 이념투쟁으로 변질됐다.

미국 미시시피 대학 교수인 산토 아리코가 오랜 시간 팔라치를 인터뷰해 평전을 냈다. 


이런 급변하는 상황에서 ‘촛불’을 보는 기자의 눈은 바뀌어갔고, 그때 기자 역시 ‘줏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기자 역시 오리아나 팔라치의 말을 전하고 싶다.



어쨌든, 오리아나는 베트남전쟁 르포로 이탈리아 기자가 아니라 세계적인 기자의 반열에 오른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깝게 생각하지 않은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부상하며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그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쟁하는 숭고한 투사의 이미지를 한번 더 강조한 사건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1968년 9월 말 멕시코올림픽 대회 취재였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수많은 국민이 비참한 가난 속에 허덕이고 있는데 올림픽 준비에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연일 반정부 데모로 저항했다.


오리아나는 멕시코 군대와 경찰이 잔인하게 진압하는 집회현장을 취재하다가 등과 다리에 두 발이나 총상을 입는다. 그는 정신이 들자 병상에서 구술로 ‘내가 부상한 유혈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멕시코는 베트남보다 더했다. 내가 전선(戰線)에서 보아온 어떠한 대량 학살보다도 더 잔인했다. 전쟁은 무장한 인간이 무장한 인간에게 발포한다는 공평한 전제 아래 성립된다. 그러나 대량학살은 상대방을 죽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오리아나 팔라치가 총격을 당했고 병원 침대에 누워서까지 체포된 학생 1500여 명과 사망자 150여 명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는 기사를 썼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멕시코 시민들의 지지는 열화와 같았다. 이탈리아에서도 수백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오리아나의 활약으로 세계인의 관심 밖이었던 멕시코 저항운동은 비로소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펜의 힘과 기자의 힘은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터뷰 전문기자인 그녀는 인터뷰를 섹스에 비유했다. “내가 벗지 않는 한 상대방도 벗길 수 없다”는 것이다.


‘뜨겁고 치열한(?)’ 용어인 섹스를 인터뷰에 비유했다는 것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다. 그만큼 팔라치가 인터뷰 상대에 몰입했다는 뜻이다.


만나는 상대마다 섹스를 하듯,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 상대를 알려면 나부터 벗어던져야 한다는 전략적인, 그러나 전적으로 타당한 생각을 드러낸 말이다. 인터뷰가 섹스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음에 동의한다.


팔라치가 만난 사람들은 중국의 덩샤오핑, 미국의 키신저,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리비아의 카다피, 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인도의 간디, 이란의 호메이니, 서독의 브란트 등 세계 정치를 주름잡았던 명사들이다.


누구에게도 겁내지 않는 그는 인터뷰 때마다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셀라시에를 인터뷰할 때는 ‘가난한 국민들의 참상을 보실 때에는 감상이 어떠시냐’는 질문을 던져 이탈리아 주재 에티오피아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얼마나 당했던지 “그와의 인터뷰는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인터뷰 때는 알리가 수박을 먹으며 트림을 세 번이나 하자 마이크를 그의 얼굴에 던져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리비아 혁명회의 의장인 카다피가 인터뷰 약속 시각을 넘겨 두 시간 만에 나타났을 때에는 읽던 책을 비서에게 내동댕이치는 방식으로 분풀이를 했다.


작위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자기현시욕이 강하고 과장하는 능력도 탁월해서 미끼(?)들을 낚아채는 실력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처럼 공격적인 인터뷰가 가능했던 것은 ‘권력이라는 허울을 벗기고 당신의 내면을 파헤치겠다’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뛰어난 인터뷰어(interviewer)는 독심술사가 될 정도로 상대의 심리를 파고들어야 하지 않는가.


생전의 오리아나 팔라치를 인터뷰하고 그의 전기를 펴낸 산토 아리코는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에서 이렇게 전한다.


“오리아나는 매번 인터뷰 약속이 잡힐 때마다 ‘권좌에 앉아 있거나 혹은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리 운명을 어떻게 결정해버리는지 알아보겠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했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매번 공들여 꼼꼼하게 준비를 한 뒤 상대에게 호된 질문을 퍼부었다.”


팔라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인 삶을 살았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재에 저항했고,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유행할 때에도 이에 대한 저항과 반박의 글을 쓰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색적이고 지적이었으며, 몇 년씩 방안에 틀어박혀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예술가이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불꽃처럼 살았던 이 여전사도 말년에는 ‘암’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암 수술 후 자기 몸속에서 잘라낸 암덩어리를 보여달라고 고집을 피운 ‘특별한’ 환자이기도 했다(암덩어리에다 대고 ‘네가 나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기자가 그의 삶과 글을 따라가보며 깨달은 것은 ‘분노의 미학’ 그리고 ‘독설(毒舌)의 미학’이다. 세상이 거칠고 험해지다 보니 증오와 분노가 팽배해지고 말과 글도 따라 험악해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로워진 현대사회에서는 전투의 영역이 ‘물질의 획득’에서 ‘정신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정신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양심에 기반을 둔 지식인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과 위선, 비(非)과학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거짓이 만연하면 진실과 사실이 ‘충격적’으로 들린다. 참을 말해도 ‘독설’이라는 비난이 날아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와 조국에 대한 사랑, 참과 진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면 그만큼 거짓과 잘못된 생각들에 대한 분노도 커진다.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민중이 거짓에 속으면 안 된다는 강한 휴머니즘이 있다.


그런 분노야말로 가장 큰 연민이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삶과 글은 그런 것들을 가르쳐준다. 그의 독설과 분노가 주는 진정성이 이념 싸움이 한창인 지금 대한민국에 유효한 까닭이다.



<> 참고도서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산토 아리코 지음, 김승욱 옮김, 아테네)=미국 미시시피 대학 교수인 저자가 오랫동안 팔라치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평전이다. 이 글을 쓰는 데 가장 많은 참고를 했으며, 현재 나와 있는 관련 책 중 고인의 삶을 가장 상세하게 보여준다. 중간 중간 팔라치의 작품을 분석하는 대목들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몇 번씩 다시 읽어야 한다.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박범수 옮김, 명상)=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침묵했던 팔라치가 9·11테러를 주도한 이슬람권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하며 내놓은 책이다. 그의 기사를 원문으로 읽어본 적이 없는 필자는 그의 거의 마지막 글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을 읽으며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한 남자’(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범경 옮김, 한벗)=절판되어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지인에게서 얻었다. 연인에 대한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너무 두꺼운데다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어나가기 힘들다.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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