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촛불시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지난 두 달 동안 글을 쓴다는 게 무력한 일임을 느꼈다. 왜곡과 오역으로 나라를 뒤흔드는 영상매체의 힘 앞에서 인쇄매체 종사자로서 느낀 좌절감도 컸다. 과연 ‘글’은 이 혼돈의 세상에서 얼마나 힘을 가질 수 있는가. “‘문자로 남겨진 글’은 폭탄 이상으로 사람의 정신과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의기소침해 있던 기자에게 2년 전 작고한 이탈리아의 전설적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1929. 6. 29 ~ 2006. 9. 14)의 말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힘을 주었다.》
성난 시위대가 언론사를 공격하고 기자를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시민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이제는 군부독재가 아니라 ‘군중 독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처참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폭력으로 제압하려 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론 자유는 단지 기자나 신문사의 자유가 아니라 민주사회 시민이 누리는 기본권이다.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戰場)은 물론 ‘이념 싸움의 전장’에서 우파 여전사로 살아온 오리아나 팔라치. 그는 싸움에 지치고 지쳐, 70대에 암 투병으로 망가진 노구를 이끌고 뉴욕으로 망명해 여생을 살면서도 ‘지금,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분연히 펜을 들었다.
팔라치는 이슬람에 대한 독설 어린 비판을 한 탓에 생명조차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문자 그대로 ‘세기의 철녀(鐵女)’다. 그는 “인생에서 의견을 밝히는 일이 의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공민(公民)으로서의 의무이자 도덕적으로 당연히 요구되는 지상명령”이라고 선언했다.
싸움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늘 전장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이 대단한 여전사(女戰士)의 삶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192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도시에서 태어난 덕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의 걸작을 매일 접하며 살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들은 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지만 빠듯한 살림에도 탐욕스러울 정도로 책을 사들여 읽었다. 어린 딸 오리아나에게도 독서를 권했다. ‘글’로 먹고살아갈 그의 평생 자산이 이때 쌓였다.
그가 담대한 내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파시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운동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체포당한 후 심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극렬한 레지스탕스 지도자였다. 아버지는 어린 오리아나에게 레지스탕스 교육을 시켰고 총 쏘는 법,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독립심을 키워주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49년 9월25일 토요일. 연합군이 피렌체에 처음으로 폭격을 가해 숱한 오폭의 기록을 남긴 날이다. 연합군은 무기와 병력을 수송하는 독일군 선로(線路)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마을과 광장 유적을 마구 폭격했다. 오리아나는 아버지와 함께 광장에서 300m 떨어진 교회에 있었다. 폭탄이 소나기처럼 퍼부었고 부녀(父女)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건물 안에서 손을 꼭 잡고 “주여 살려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갑자기 오리아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펑펑 운 것도 아니었다. 소녀답지 않게 딸꾹질 같은 소리도 내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는 그런 흐느낌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딸의 모습을 본 아버지의 냉정한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껴안고 다독이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러면서 이렇게 혼냈다.
“여자애는 울 수도 없고 울지도 말아야 해.”
보통 딸 같으면 이런 아버지를 원망할 만도 하건만, 오리아나가 훗날 “나를 엄하게 키운 아버지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걸 보면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인생은 어차피 힘겨운 모험이다. 그 사실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좋다. 나는 약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내 본성과도,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도 약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않으셨다. 난 그때 아버지가 내 뺨을 때린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키스 같았다.’
그렇지만 그날의 경험은 어린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으로 남았다. 그날 이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감정적 불구자’가 된 것이다. 오리아나는 책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에서 “어른이 되어 큰 슬픔을 당해도, 또 베트남전쟁 취재 때 폭탄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때나 멕시코혁명 취재 때 총격을 당해 마치 칼날이 몸 안을 휘젓는 듯한 육체적 고통을 느낄 때도 펑펑 울고 싶었지만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물론 살면서 (어쩌다) 신의 은총(?)으로 두 눈이 촉촉해지고 약간 목이 메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일종의 신경증적 기능장애이거나 생리적 불구라고도 할 만한 증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냉혈한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달라. 슬플 때 마음껏 우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나에겐 더 고통스러운 내면의 울음이 있었다. 내 글이 곧 내 눈물인 경우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와 글을 ‘목 놓아 우는 통곡’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말을 들으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정신이 번쩍 난다. 하기야 그녀는 총탄이 날아드는 전쟁과 혁명 현장이 주 취재영역이었고, 일반 사람에게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인 유명인사들을 인터뷰할 때도 그들의 권위에 대한 냉소를 무기 삼아 뜨거운 불덩이들을 쏟아내듯 펜으로 옮겨 적었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고도 남는다.
“(내 글은)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들에 대한 통곡이나 마찬가지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이란 대통령, 황제 같은 존경받을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물론 타인을 변화시킬 용기를 갖지 못한 자들을 일컫는다.”
오리아나는 열다섯 어린 나이 때 직접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도 했다. 레지스탕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가 발각될까 두려워 씹어 삼키려고 한 적도 있다.
이런 청소년기의 경험들이 오리아나로 하여금 평생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평생 ‘글’을 무기 삼아 독재와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지켰다. 책과 기사를 통해 전쟁 때 겪었던 많은 일을 기억하면서 전쟁반대론을 펼쳤다.
그는 어린 나이에 전체주의적인 정권과 점령군에 맞선 용감한 사람들과 작가 미술가 역사가 교수들을 만나면서 자신도 어른이 되면 ‘양심에 따라 살겠다’고 결심한다. 한편으로는 저항운동을 억압하는 자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지위를 이용하는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으면서 사람을 겉으로 드러난 지위나 직업으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자각한다. 기자가 된 후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의 개인주의에 대한 애정을 단 한 번도 저버리지 않으면서, 부패에 무릎 꿇은 권력자들을 고집스럽게 혐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생계가 안 된다’는 부모의 만류로 피렌체 의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기계적인 암기 위주인 의학공부는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추론과 비판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고민이 깊어갈 무렵, 갑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녀는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자퇴하고 만다. 그리고 과감하게 신문사 문을 두드린다.
열여섯 어린 나이였다. 당시 피렌체의 유력지 ‘나지오네 디 피렌체’를 찾아간다는 게 그만 이름도 없는 ‘일 마티노 델리탈리아 센트랄레’라는 신문사를 찾아갈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시기였다.
그는 ‘열일곱’이라고 나이를 속인 뒤 무작정 편집장을 찾아가 “리포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편집장은 어린 그를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당돌함을 높이 사 기회를 주기로 한다. 새로 문을 연 나이트클럽 취재를 맡기며 12시간 안에 기사를 써내라고 한 것. 처음 들어가본 나이트클럽에서 작성한 기사였건만 그는 천재 저널리스트로서의 싹을 보였다. 간단한 스케치 기사에 전쟁 후 여름을 맞은 이탈리아 사회의 단면을 끼워 넣은 것이다. 결국 그는 경찰과 병원담당(지금말로 하면 사회부 사건팀) 기자로 채용된다.
오리아나는 초창기 남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 풍경을 그 특유의 시선으로 글에 담아 호평을 받았다. 낡은 수녀원 건물에 대한 기사를 쓸 때는 뜰의 벚나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수녀원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했고, 피렌체의 비둘기 기사에서는 한때 번영을 누리다가 몰락한 피렌체의 역사에 비둘기의 운명을 빗댔다. 오리아나 특유의 문학적 저널리즘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의 기사는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었다. 생생한 아이디어, 문화적인 사안에 대한 지적인 논의, 예술성이 살아 숨쉬었다. 그는 한마디로 기사를 소설의 반열로 올린 문학적인 저널리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보고 쓰는 단순한 형태에 그친 게 아니라 운치와 인간미를 더해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글쓰기는 객관적 사실의 요약이 아니라 철저히 주관적 관찰에 의한 글쓰기였다. 기자 초년병 시절,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모습을 묘사한 다음 글에서 잘 묻어난다.
‘세르지오 반지니는 법정 바로 옆 감방에 있었다. 그는 격자무늬 상의와 회색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는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인 긴 의자에는 차(茶)가 가득 담긴 보온병이 있었다. 내가 작은 창가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그는 군인처럼 기다란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신문과 담배를 던져버리고 창살에 얼굴을 갖다댔다. 묘하게 금욕적(禁慾的)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의 뺨은 홀쭉했고 눈은 매우 검었으며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짧은 검은색 턱수염이 귓불이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냥 얼굴이 아니라 아주 긴 쉼표 같았다. 그리고 그 중간부분에 표정이 있었다.’
단순한 묘사를 하더라도 그녀가 말이나 사물에 얼마나 집중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기사다.
그는 기자 일에 자신감이 붙자 당시 이탈리아에서 명성이 가장 높던 시사잡지 ‘에우로페오’에 투고하기도 했고, 1면에 기사가 실리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유명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차츰 ‘인터뷰 전문기자’로서 경력도 쌓아나갔다.
승승장구하던 오리아나는 입사 6년 만이던 1952년 갑작스레 해고를 당한다. 편집장이 어느 날 공산당 지도자가 주최한 정치집회 기사를 쓰라고 지시한 것이다. 편집장은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작성하도록 종용했고, 그는 “거짓 기사를 쓸 수는 없다”고 버텼다.
편집장은 “기자란 급료 값을 해야 하는 글쟁이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짓 기사를 쓰는 것도 해내야 한다” “자기 밥그릇에 침 뱉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 오리아나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 밥그릇은 당신이나 실컷 챙기라” “엉터리 기사를 쓰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노라”고 당돌하게 맞대응을 했다. 물론 즉석에서 해고당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언론계 사람들은 이미 그의 흥미로운 문체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당대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던 삼촌이 경영하는 잡지 ‘에포카’에서 1년 반가량 일한 뒤 마침내 이탈리아 대표 잡지 ‘에우로페오’로 스카웃된다. 첫 작품으로 당시 많은 이탈리아인이 20세기의 엘도라도라고 생각한 할리우드 스타들을 집중 인터뷰하는 기사를 연재하면서 바야흐로 인터뷰 전문기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배우들을 만나며 동류의식을 갖게 된 것이 큰 동인(動因)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겉의 화려함으로 주목받는 게 아니라 내면의 투철한 프로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의 일을 존경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일에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한지, 나는 안다. 그 일에는 작가들과 비슷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버트 랭커스터를 만나고 쓴 기사에서는 브루클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과정이, 킴 노박과의 인터뷰에서는 진지한 성공담이 인기를 끌었다.
마릴린 먼로 기사에서는 ‘실패한 인터뷰’를 기사화해 유명해지기도 했다. 오리아나는 마릴린이 드나드는 식당 12곳, 나이트클럽 18곳, 영화관 8곳, 극장 14곳을 돌아다녔다며 마침내 주소를 알아내 갖은 고생을 해 찾아갔건만 그녀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가버려 결국 만나지 못한 전 과정을 소상히 소개했다.
그녀는 ‘마릴린 인터뷰 기사’가 아닌 ‘마릴린 찾기 기사’를 통해 자신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켜 기사의 주인공을 인터뷰이가 아닌 기자 자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마릴린씨, 언제든 시간이 나면 밀라노로 저를 만나러 와달라”고 말미를 장식한 그의 빈정거림조차 기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우리에게 ‘길’이라는 흑백영화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거장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에 대한 혹평기사가 너무 당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술가적 투철함이 부족하다는 주관적인(?) 견해를 서슴없이 기사에 썼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에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그와의 비극적인 만남(인터뷰) 이후 나는 그를 덜 좋아하게 되었다. … 영광은 힘겨운 짐이며 사람을 죽이는 독(毒)이다. 그 짐을 감당하는 게 예술이지만 그런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쉽게도, 드물다.’
그러나 오리아나의 경쟁력은 이렇게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뉴스를 발굴하는 기자적 능력에서 나왔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그와 이야기하면서 남에게는 말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혔다.
예를 들어 앨프리드 히치콕은 그토록 많은 스릴러 영화를 찍은 것에 대해 뜻밖에도 이런 이유를 댔다.
“예수회에서 3년 동안 공부할 때 때로 그곳의 엄격한 생활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래서 아마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복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리아나는 인터뷰 기사에서 단지 인터뷰 대상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혹은 그녀에게 어떻게 시간 약속을 얻어냈으며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전 과정을 소상히 담았다.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 편견, 결론을 밝혔다.
흔히 기자는 편견이 없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것이 ‘위선’이거나 ‘주제넘은 가정’이라고 반박했다.
‘사람이 누군가의 프로필을 쓸 때 믿을 것이라고는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정직성밖에 없다.’
그는 인터뷰 기사를 쓸 때마다 너무나 정직하게 써서(?) ‘심장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내듯 정화되는 기분이었다’고 (과장)할 정도였다.
②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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