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환경’보다 중요한 건 ‘환경을 해석해내는 능력’
《성공한 여성들은 대부분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휼릿패커드(HP) 최고경영자였던 칼리 피오리나도 그중 하나다. 이는 칼리의 좌우명인 “당당하게 서라. 할 수 있다면 혼자 서라. 자신이 옳다면 승리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에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한계가 아닌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맡은 일에 충실했고, 리더로 일하며 타인의 의견을 경청했다. 여성으로 사랑받기보다 존중받기 위해 노력하는 칼리 피오리나, 그녀의 매력을 짚어본다. 》
지난 4월28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때 실리콘밸리의 여제(女帝)로 불렸던 칼리 피오리나 전 휼릿패커드(HP) 최고경영자가 ‘백악관 경영’을 노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공화당 선거 캠프에서 경제참모 겸 후원금 모금 총책을 담당하는 피오리나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유력한 러닝메이트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피오리나의 근황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2005년 2월 HP에서 갑자기 쫓겨났을 때 공식적으로는 전격 사임이었지만 실제로는 해고였다. 그것은 도전과 변화, 성취의 아이콘이었던 칼리 피오리나의 철저한 패배였다. 세상 인심이란 게 성취에는 관대하지만 실패에는 인색한 법. 그녀는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혔고 그녀의 소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CEO로 재직했던 5년은 사람들 머릿속에 재앙의 기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녀는 대대적인 합병과 대량해고,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체제개편 등을 통해 HP를 지옥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모두 허사로 끝났다. HP의 주가와 실적은 여전히 바닥을 기는 듯했다. 그러나 요즘 구조조정 성과가 서서히 드러나며 수익이 향상되고 있어 명예회복 분위기도 일어난다고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필자는 칼리 피오리나의 성공 스토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녀가 해고되고 난 후 펴낸 자서전 ‘칼리 피오리나, 힘든 선택들’(해냄)을 읽으면서 필자는 그녀의 성공이 아닌 실패 이야기에 매료됐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해고라는 치욕 이후 그녀가 자신의 비참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인생에서 고비와 실패는 누구나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고비와 실패 앞에서 얼마나 담대해질 수 있느냐다.
더구나 해고라는 극단적인 패배를 당할 경우, 많은 사람은 나락으로 빠지기 일쑤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내공’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다. 칼리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
칼리는 삶이라는 여정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치열함과 성실함, 열정과 때로는 뻔뻔스러움까지. 그녀는 직장 생활에서 자신을 분노케 했던 수많은 남자의 실명을 자서전에 적고 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문화적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상대방한테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할 가능성까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놀라운 차분함과 치밀함에 냉기가 느껴질 정도다.
칼리의 삶은 미국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 특히 비즈니스 업계에서 여성으로 성공하는 과정의 지난함을 보여준다. 많은 대목에서 한국의 일하는 여성이 갖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칼리는 여성 이전에 미국 사회 리더가 양성되는 과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선 자원봉사다. 그녀는 고등학교 자원봉사를 통해 만난 정신지체아 소년에게서 타인과 소통하는 기술을 배웠다고 말한다. 고교 시절 ‘케니스’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살 정신지체아 소년을 가르쳤던 그녀는 케니스에게 ‘눈(eye)’과 ’귀(ear)’를 구분해 말하도록 가르치는 데 무려 6주가 걸렸다고 토로한다.
마침내 케니스가 비슷하게나마 두 단어를 말하게 된 순간, 칼리는 케니스를 껴안고 승리감에 도취했다. 그 후 케니스는 칼리를 볼 때마다 운동장에서 “눈! 기!”하고 소리 치곤 했다.
케니스와의 인연은 대학에 입학해서도 내내 이어진다. 대학 시절 크리스마스를 맞아 고향에 갈 때마다 칼리는 케니스를 일부러 찾아가 만났다. 케니스 역시 그녀를 잊지 않고 반가워했다. 비록 제 이름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해도 칼리를 향해 “눈! 기!”를 외쳤다고 하니 두 사람의 색다른 우정은 생각만 해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칼리는 케니스와의 의사소통 경험을 통해 ‘타인이 못한다고 믿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서 삶의 환희와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회고한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마이너리티 집단이다. 필자가 피오리나와 케니스의 만남을 특별히 여기는 것은, 좋은 부모 밑에서 명문대학에 들어가 성실하고 모범적인, 이른바 주류적 삶을 살아온 그녀가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소수자와 소통함으로써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구분을 넘어서는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리더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화합과 포용’의 덕목을 그녀는 이렇게 어릴 적 ‘특별한’ 소통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리더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한마디로 ‘남을 돕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다.
칼리는 언뜻 보면 약점으로 작용했을 상황도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을 통해 장점으로 바꿨다. 어릴 적 이사를 많이 다닌 것도 나중에 리더로서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그런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헌법학자였다. 그것도 미국 헌법이 아니라 다른 나라 헌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돌연 가나공화국 헌법을 공부해야겠다며 가족을 데리고 가나로 이사 가기도 했다. 그리고 가나 헌법의 세계적 권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칼리를 비롯한 형제 3명은 자라는 동안 이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여행에 쫓아다니느라 무려 3개 대륙에서 5개의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칼리는 이런 혹독한(?) 떠돌이 생활을 통해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나는 영원한 아웃사이더였지만 어느 날 그것이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에 사람을 사귀어야 했던 경험은 타인의 심리를 재빨리 파악하는 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칼리의 무기는 ‘질문과 경청’이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것 자체가 상대를 존경하는 것이 됨을 어릴 적부터 터득했다. 그리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음으로써 연대감과 결속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부모의 높은 기대가 자식을 채찍질한다는 것도 피오리나의 성장과정을 통해 배울 만한 대목이다. 어릴 적 그녀에게 모범생이 되고 싶다는 동기를 부여해준 것은 부모님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칼리는 기업 CEO로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이 본래 꿈은 아니었다. 나중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할 때까지 그녀는 ‘비즈니스 우먼’을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학부 전공은 뜻밖에 ‘철학’이다. 언뜻 보면 그녀의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삶에서 대학 때 심취한 철학은 여러 고비마다 큰 힘을 주었다. 그녀가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고교 시절 읽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었다고 한다. 칼리는 “선택의 힘과 중요성, 정체된 것보다는 이뤄가는 움직임,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신에게 주는 선물이다”라는 뫼르소의 말에 밑줄을 치며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누구든지 자신의 처지를 선택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처지에 대한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모나 가정환경은 고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이상이 되겠다고 선택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선택을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다. 살아갈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해석해내는 능력’이다. 우리의 삶이란 제약과 한계 투성이다. 누구에게든 제약과 넘어야 할 장벽이 존재한다. 그 제약과 한계를 자기의 논리로 해석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 인생의 묘미는 바로 그것에 있다고 본다.
칼리는 대학 시절 철학자 중에서도 특히 헤겔에 빠졌다. 헤겔이 주창한 정반합(正反合)의 철학, 다시 말해 어느 순간 맞섰던 것처럼 보이는 생각이나 사상이 나중에 화해한다는 상상력은 탁월하면서도 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나중에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어떤 기준에 의지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헤겔의 정반합 철학을 정신적 모델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경영서의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서슴지 않고 “헤겔”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칼리는 대학에서 헤겔 공부뿐 아니라 윤리학도 공부하는데 이 역시 나중에 소비자 윤리를 생각하는 각종 의사결정과 행동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또 논리학 공부 덕분에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과정을 학습하면서 “좋은 답 못지않게 좋은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공부 방법이다. 흔히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은 훈련이 ‘요약하기’라고 한다. 칼리는 토마스 아퀴나스, 베이컨, 아벨라르 같은 중세 철학자들의 걸작을 매주 한 편씩 읽으며 내용을 축약하는 훈련을 통해 핵심을 이해하고 추려내는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중세사를 전공할 당시 그녀가 가장 좋아한 수업은 종교 서적을 일주일에 몇백 장씩 읽고 A4 용지 두 장으로 요약하는 것이었다. 칼리는 그것을 “생각이라는 몸에서 지방을 정제하고 의미의 본질에 도달하는 작업”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퀴나스 베이컨 아벨라르에 대한 지식은 가끔은 쓸모가 있겠지만 요약작업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재산이 되었다. 피오리나가 후에 유명한 말들을 만들어내며 미국 기업의 대표적인 슬로건 주창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고 한다.
칼리 피오리나 평전을 쓴 미국 기자 조지 앤더스는 “AT&T에서 그녀가 실제로 판매한 것은 전화교환기가 아니라 진보와 희망이었다. 그것은 말(言)의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언어의 마술사와 같았다. 힘 있고 열정적이며 간단하고 쉬운 언어로 그녀는 고객이나 동료들, 상사들과 열정을 나누며 매년 자신과 그들의 삶을 향상시켰다”고 평한다.
실제로 칼리는 사내 연설문 담당자들이 작성한 원고를 살펴보고 ‘소심함’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곧바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그녀를 키운 팔할은 ‘교육의 힘’이다. 네 살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해 스물두 살에 대학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녀는 온갖 종류의 지식을 접했다. 학창 시절을 회고할 때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수학과 과학에서는 분석기술을, 음악과 미술에서는 영혼의 양식을, 문학과 철학에서는 정신의 풍요를 얻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녀 인생이 탄탄대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대학생활은 혼란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1년 동안 심한 만성피로 증후군에 걸려 시달렸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목표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었다. 희망하는 직업도 소방관에서부터 댄서까지 종횡무진이었다. 스탠퍼드라는 명문대학에 들어갔지만 졸업 이후 별다른 목표가 없었기에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UCLA 법대에 진학한다.
문제는 그녀가 애당초 법학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와 전례’ 위주의 법 공부 때문에 그녀는 매일 심한 두통과 불면에 시달렸다. 주말 내내 잠으로 시간을 때우고 일어나 일요일 아침 샤워를 하다 느꼈다는 젊은 날의 고민은 이렇다.
‘난 스물두 살이었고 인생의 목적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능력과 재능을 모두 발휘하려면, 나 자신을 가지고 뭔가 이루려 한다면,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야 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지려거든 다른 사람들을 너무 신경 쓰면 안 된다’는 카뮈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퇴를 결심한다. 그녀는 한 학기 만에 로스쿨을 그만두고 취직을 결심한다. 부모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생계가 급했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아무 계획도 없이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구인광고를 보고 첫 직장을 선택했다. 다름 아닌 부동산 중개회사였다. 야심만만한 피오리나로서는 의외의 선택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의 덕목은 이때부터 발휘된다.
‘내가 맡은 업무는 사무실 앞에 앉아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전화를 받아 연결해주고 문건이 넘어오면 타자를 치는 일이었다. 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업무에 능숙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찮은 업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직장이 있는 게 고마웠고 내게는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 게 흥미로웠다. (나는) 또 상사에게 사람을 제대로 뽑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면서 중개사들이 물건을 팔면서 얼마나 흥분하는지, 사람들이 사업을 키우려고 얼마나 헌신하는지 관찰했다. 내가 어떤 태도로 전화를 받는가 하는 간단한 일이 고객들이 우리 회사를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이 작은 중개업소 경험을 통해 성공하는 커리어 우먼이 되기 위한 밑바닥 경험을 쌓은 셈이다. 남이 하찮게 생각하는 일에서도 재미를 구하고 관찰을 하면서 교훈을 찾았던 경험이 그녀를 결국 대기업 CEO에까지 오르도록 이끈 힘이었음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점이 많다.
‘학교공부는 혼자 하는 작업이었지만 처음으로 팀의 일원이 되어 일하는 기분이 마음에 들었다. 일은 학문적이지도 않고 추상적이지도 않았다. 어떤 일을 하면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좋았다. 공동으로 일하고 그들과 담판을 벌이는 게 좋았다. 승리하든 실패하든 함께 하는 동지애가 좋았다. 비즈니스계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은 감정과 자존심보다 사실과 숫자라는 것을 배웠다.’
훗날 그녀는 ‘성공 비결’을 묻는 후배 여성들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이야기한다.
“다음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지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씩은 배울 것이 있답니다.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세요, 일을 맡게 되면 한계가 아닌 가능성에 집중하세요, 그리고 내게 기회를 줄 사람들을 호시탐탐 찾으세요.”
실제로 그녀는 부동산 회사에서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산 상사의 권유에 따라 MBA과정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 최대 통신회사인 AT&T에 입사하는 발판이 된다.
‘상사의 신뢰는 엄청난 동기부여가 된다. 그들이 내게서 잠재력을 보았기에 나도 내 안에서 잠재력을 찾기 시작했다.’
AT&T 관리부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해 맡은 첫 업무도 원주민 부족들에게 장거리 전화 서비스 및 전화장비를 파는 일이었다. 그것은 힘들고 재미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때로는 매일 부엌식탁에서 새벽 3시까지 주간 예산표를 짜는 등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녀는 중개업소에서 일할 때 회사를 알려면 제품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영업부가 일을 시작하기에 적합하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고 그대로 실행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품을 판매할 때는 회사뿐 아니라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또 타인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방법도 익히게 된다.
②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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