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2월 21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조선의 초대 통감(統監)으로 임명된다. 일본은 을사 5조약 제3조에 의거, 주한 일본공사관을 폐하고 외교뿐 아니라 내정까지 간섭하는 통감부를 설치해 통감을 상주시킨다.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겐 ‘원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다. 출간된 전기만 해도 수십 종이고, 2000년 아사히신문이 ‘지난 1000년 일본 정치 지도자들’을 꼽은 조사에서도 10위를 기록했다. 이 같은 인기는 그가 하층 농민의 아들에서 현대 일본의 기틀을 다지는 지도자로 우뚝 선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세 차례나 유학을 다녀오고 세계 최고 문물만을 받아들인 그의 눈에, 통감으로 부임했을 당시 조선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밤낮 서구 열강 중 어디에 붙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조선 정부를 나 같은 선각자가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대 검술의 달인이었던 그는 통감으로 일할 때는 늘 암살에 대비했지만, 정작 통감 직을 그만둔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安重根·1879∼1910)의 총탄은 피하지 못했다. 죽고 난 뒤 하도 재산이 없어 당시 일왕이 체면이라도 유지하라며 돈을 보냈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조국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이런 청렴함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장례(1909년 11월 4일)가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점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순종은 친히 통감부를 방문해 조문하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까지 내렸다. 또 유림을 비롯한 13도 대표들은 암살에 대해 사죄하는 사죄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 열기를 북돋우기도 했지만, 군국적 분위기 속에서 조속한 합방의 계기로도 이용되었다.
특이한 것은 한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접근과 일본에서의 안중근에 대한 접근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본의 대표적 정론지 ‘중앙공론’에 희곡 ‘안중근’ 전이 발표되었으며, 안중근의 모범적 수감생활에 감동한 간수가 그의 전기를 썼을 정도다. 지금도 일본에는 인간 안중근을 추모하고 연구하는 모임이 많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국내의 인식은 차다. 그것은 피해의 역사를 가진 우리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내년은 을사조약 체결 100년이 되는 해다. 이제 우리도 피해나 가해라는 심리적 억압에서 벗어나 보다 풍요로운 역사인식을 가질만도 하지 않은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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