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린 본성의 폭발…‘레밍’▼
합리적 이성과 통제력이란 게 얼마나 허약한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지난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화제가 됐던 영화 ‘레밍’은 철학적 사유를 즐기는 프랑스인들답게 줄거리가 아닌 질문 위주로 영화를 만들어 냈다.
우리가 교과서처럼 받아들이는 이성과 자제력이란 것도 결국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자기 내면의 본성을 죽이는 일이라는 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결국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다분히 관념적인 내용이다 보니 이야기 전개는 좀 황당하다.
주인공 알랭은 유능한 홈 오토메이션 디자이너이지만 어떤 황당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집으로 초대한 사장 부부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깽판을 부려도, 사장 아내가 자신을 유혹하며 갖고 놀아도, 급기야 그녀가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해도,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내가 사장과 놀아나도 그는 그저 나직한 목소리와 절제된 표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말 초연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감정을 표현하고 내뱉는 일에 서툰 사람이었다. 자기보다는 남의 감정에 철저히 길들여졌던 그는 마침내 이성의 강박이라는 사슬을 끊고 본능에 충실한다. 미운 사람을 죽여 버리는 다분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히치콕을 잇는 고전적 서스펜스를 표방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러 면에서 낯설다. 분명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주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으로 스크린에서 제대로 구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보여 준다.
레밍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만 서식한다는 쥐의 이름. 매사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주인공의 사고체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이자 은유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소피 마르소의 추억…‘안소니 짐머’▼
한때 청순미로 대표되었던 소피 마르소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영화적 완성도와 상관없이 오로지 그녀를 통해 문득 흘러온 지난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는 영화다. 아름답던 그녀에게도 시간은 여지없이 흘렀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통해 한때 그녀를 좋아했던 나는 지난 시간 속에서 과연 무엇을 얻고 잃었나 하는 회한에 젖는다.
이처럼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피 마르소’에게 빚지고 있다.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감독은 할리우드와는 다른, 프랑스적인 범죄 스릴러의 원형을 보여 주려 한 것 같은데 결과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프랑스적 스릴러란 한마디로 ‘긴박하진 않지만 여유가 있고 차갑기보다는 따뜻하다’는 것 정도.
돈세탁 등 국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안소니 짐머는 이름, 외모, 사는 곳, 목소리까지 정확히 알려진 적이 없다. 그녀의 옛 애인 키아라(마르소)의 존재만 알려져 있다. 경찰은 그녀를 미끼로 삼아 짐머를 잡으려 하고 이 과정에서 키아라는 경찰과 짐머를 잡으려는 또 다른 범죄조직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반전이 있고 두뇌 게임이 있어 스릴러라고 하지만, 사실은 여자에게 헌신하는 남자들의 낭만에 대한 이야기다.
키아라가 미행자를 따돌리라는 짐머의 지시에 따라 열차 안에서 얼떨결에 유혹한 남자(프랑수아)는 단지 그녀와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녀에 대한 몰입을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를 이긴 프로페셔널 범죄자 짐머도 단지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자기가 이룬 모든 것을 건다. 상영 중. 15세 이상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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