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성석제 지음/312쪽·9000원·창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성석제의 신작 소설집이다. 소설가의 길을 걸은 지 이제 10여 년을 맞는다는 작가는 어떤 고갯마루에 올라선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며 긴 호흡을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구석구석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흥겨운 입심과 날렵한 필치로 ‘성석제 식 문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기왕에 보여주었던 활력 대신 진지함을 택했고, 삶의 해학 대신 페이소스를 택했다. 모처럼 소설 읽다 날밤 새우며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의 재미를 주었던(박완서) 그의 소설이 한마디로 슬퍼졌다고나 할까. 작가의 표현대로 ‘촉촉한 물기’ 같은 게 느껴진다.
실제로 소설 속에는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잃어버린 인간’이라는 작품에는 재당숙모의 부고를 받고 고향을 찾아간 작중 소설가가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척의 실제 모습을 그려내려 애쓰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상가(喪家)의 슬픈 곡소리 묘사가 압권이다. 고전소설 ‘추풍감별곡’을 작품에 끌어들인 표제작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도 전통가락에 담긴 모정과 그리움, 슬픔의 정서가 넘친다.
어느 작품에서나 질펀한 그의 입담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 입담 속에 녹아있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기왕에 그려 온 ‘세상의 공식적인 길에서 한 치 비켜난 예외적인 인물들’, 이를테면 ‘황만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아버지, 어머니, 친구, 아들, 딸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제 비로소, 주변과 중심이 따로 없이 어떤 경계나 틀에서 벗어난 그야말로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하면서도 희로애락으로 범벅이 된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냉정하고 차가운 관찰이 아니라 따뜻한 속살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더 너그러워지고 따뜻해졌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내 고운 벗님’은 이른바 ‘건국 이래 최대 국방사업의 에이전트’로 알려진 거물급 인사(대위)가 군대시절 인연을 맺었던 이 중사와 시골 낚시터에서 만나면서 빚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것이다. 동갑이지만 계급으로 형성된 군대 내 상하관계가 제대 후에도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인간관계의 부딪힘을 통해 이 중사가 대위를 계급이 아닌 ‘인간’으로 보게 되는 과정, 다시 말해 두려움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바뀌는 과정이 펼쳐진다.
‘내 고운 벗님’ 외에도 지방도시에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의 뇌물사건을 다룬 ‘만고강산’이나 부(富)에 대한 허망한 집착을 다룬 ‘인지상정’ 같은 작품에서는 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읽힌다. 하지만 각 작품의 결말까지 읽어보면, 작가의 의도가 비판이나 공격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함, 착잡함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든, 성석제가 달라졌다. 그러나 고갯마루에 올라 선 그가 어떤 길을 택할지 아직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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