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문명 충돌은 없고 광기 충돌은 있다 ´알라 할림´

발행일: 2002-09-14  /  기고자: 허문명
면종: 문화
 

◇ 알라 할림(총3권)/김재기 지음/각권 400여쪽 각권 1만1000원 이론과 실천사


《제목부터 생소한 이 소설은 시대 배경도 낯선 곳 낯선 시간이다. 500년 전의 시간, 중세말 스페인이라는 공간, 이슬람교도인 주인공, 무슨 논문처럼 빽빽한 각주들. 15년 동안 강단에 서 온 철학교수(경성대)가 펴 낸 소설이라는 점도 심상치 않다. 일단, 이 소설은 재미있다. 이야기를 끌어 가는 모티브들은 의문의 살인사건이며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그 사건의 수수께끼를 추적한다. 그러나 사건의 축은 단일하지 않고 여러 줄기가 교차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서기 1499년.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기간이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충돌하고 새로운 지식과 전통적 권위가 갈등을 일으키던 때였다. 공간적 무대인 스페인은 이 변화하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서구 최초로 근대적 절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대외 팽창으로 유럽전체를 이끄는 선도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고전문학, 철학, 과학 기술 등 모든 선진문화의 요람이었고 기독교 이슬람 유태문명까지 혼합돼 문명 융합의 꽃을 피웠던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주인공들은 과거 문명의 주역이었던 무슬림들로서 기독교도들의 이타적이고 배타적인 정복정책으로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고통,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소설은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기독교 수도사 옷을 입은 의문의 시신과 그가 지니고 있던 그리스어 암호서찰이 발견됨으로써 시작된다. 주인공 무슬림 청년(알리)은 우연한 계기로 이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건과 사람들을 만난다.


살인사건의 범인과 사라진 그리스어 암호 서찰의 행방을 뒤쫓던 알리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사를 계속하지만, 곧 또다른 살인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는데….


소설은 기독교 대 이슬람이라는 대결 구도를 십분 활용하고 있지만, 결론은 문명융합이다. 다시 말해 ‘문명의 충돌 같은 것은 없다. 기껏해야 문명내에 존재하는 야만들, 문명의 탈을 쓴 광기들의 충돌이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즉 진정한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교류하고 공존한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또 추리소설이긴 해도 명탐정의 명쾌한 추리 과정과 사건의 해결이 가져다 주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명탐정(절대권력을 상징)없이 지극히 인간적인 사유과정 속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내면의 흐름을 보는 일은 오히려 재미를 더한다.


그들은 자만, 이기심, 탐욕 때문에 때로 불가피한 실수를 하기도 하고 때로 피할 수도 있었던 오류들을 반복한다. 작가는 이런 장치들은 통해 인간의 유한함과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인간이란 늘 사소한 이해관계나 감정에 휩싸여 대사를 그르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에게 ‘어떤 것에 대한 앎’이란 늘 현재 진행형일뿐 완료형이 아니다.


‘도대체 죄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게 다 뭐요? 선은 뭐고 악은 또 뭐요? 모든 게 다 우리들 스스로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춤추는 이름에 불과한 것 아니요? 티끌 한점없는 선을 부르짖는 자들일수록 그걸 지킨다는 명분으로 악을 끌어들이기 마련이고 그 악은 다시 악을 부르니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선을 지켜주는 악이란 말이요.’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했겠지만, 철학교수라는 저자의 직업답게 작품 곳곳에 철학적 메시지들이 숨어있다. 고대 신비주의에서부터 스콜라 학파, 합리주의, 경험주의, 실재론, 유명론, 쾌락주의, 엄숙주의 등 온갖 사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각종 마법은 물론 연금술 점성술등 500년전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사로잡았던 갖가지 요소들이 담겨있다.


4년 여에 걸친 현지 취재를 통해 중세를 현재에 되살린 작가의 땀과 진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대중성과 진지함이 적절하게 뒤섞인, 오랜만에 만나는 귀한 소설이다.


제목 알리 할림은 아랍어로 ‘알라께서 알고 계셨다. 즉 신만이 아시며 우리는 잘 모른다’는 뜻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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