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바시스 /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263쪽 9000원 단국대학교 출판부
◇시오노 나나미 전쟁 3부작 / 각권 268-294쪽 각권 8000~9000원 한길사
▼재미있는 전쟁사
전쟁사(戰爭史)는 재미있다. 2차원 지도 위에서 장기 말처럼 오락가락하는 전투원들을 보며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 ‘저렇게 했으면 어떨까’ 상상에 빠진다.
이런 상상들 속에서 우리는 뭔가 잊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름아닌, 전투원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시오노 나나미)이라고 했던가. 피를 흘리는 전투와 흘리지 않는 전쟁이 섞여 있는 전쟁사에는 인간사가 집약돼 있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전장(戰場)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는 더 집약적이고 다양한 인간 본래 모습들이 오간다.
세계 역사에서 한국만큼 다양한 전쟁의 역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아직도 ‘해전(海戰)’으로 진행형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전사(戰史)가 없다. 이념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념을 걷어 낸 전사(戰史)는 훌륭한 인문서이며 휴먼 드라마다. 승패의 기록이 아닌 인간군상으로 기록한 전사가 후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문지리서, 조직관리서로서의 전쟁사 '아나바시스'
고대 그리스 저술가이며 철학자 크세노폰(Xenophone·BC 430년∼355)이 쓴 이 책은 전쟁사 최고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서양에서는 특히 지휘관, 더 나아가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책은 직업 군인이기도 했던 저자가 실제로 참여한 전쟁기록이다.
때는 BC 401년, 그리스와 페르시아간 냉전이 끝나고 일시적 평화가 지속되던 때였다. 당시 페르시아왕 아르타크 세르크세스의 동생 퀴로스는 형에게 모함을 받은 데 분을 품고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군대를 구성해 침공한다.
퀴로스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서쪽 끝, 리디아(지금 터키) 태수(太守)를 하면서 그리스 용병들을 모집한다. 당시, 전쟁의 참가는 남자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고 오랜 군사경험을 가진 그리스 중무장 보병들은 최고의 군사력이었다.
리디아를 떠나 6개월만에 파죽지세로 페르시아 땅으로 진군한 1만여 대군은 지금의 이라크땅이 된 쿠낙사에서 페르시아 군과 정면 충돌을 하지만, 퀴로스의 죽음으로 졸지에 고립무원이 된다. (‘아나바시스’는 ‘올라가기’란 뜻으로 평원에서 고원으로 이어진 행로를 빗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시적 계약으로 묶인 오합지졸 군대는 ‘항복할 것이냐’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냐’로 분열된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지휘관이 크세노폰이다.
그는 정직함과 당당함, 특유의 언변으로 군사들을 설득해 천신만고 끝에 2년여만인 BC 399년 3월 5000여명의 잔류군대를 끌고 무사 귀환한다.
크세노폰은 이 행군을 꼼꼼히 기록했다. 책에는 군대의 발길이 닿았던 지역의 사람들 삶의 이모저모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 책이 전쟁을 키워드로 한 인문지리서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항구에 가까운 바닷가에서 야영을 했다. 칼페항이라 불리던 이 곳은 아시아 쪽 트라케에 위치하고 있다. 트라케는 흑해입구에서 시작해 배를 타고 흑해로 들어올 경우 오른쪽에 있는 헤르클레이아까지 이른다. 전함을 타고 뷔잔티온에서 이 곳까지 노를 저을 경우 하루는 족히 걸린다.’
‘이 나라는 보리 밀 콩 기장 깨와 양질의 포도주를 제공하는 여러 종류의 포도 송이가 나고, 올리브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이 없다.’
번역자 천병희 교수(단국대 독문학)는 “지금처럼 통신 수단도 없고 구체적인 지역정보가 없었던 시절, 크세노폰이 제공한 다양한 인문지리 정보를 비롯, 행정조직 군조직 등 살아 있는 정보들은 후세에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을 가능케 했다”며 “그래서 흔히 이 책을 ‘역사를 바꾼 책’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이 책은 또 훌륭한 리더쉽 책이기도 하다.
정확한 상황판단과 이를 납득시킬 수 있는 표현능력, 항상 군사들 편에 서서 군대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한 자세가 지휘관들에게 성공을 보장 해 준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역사는 변해도 사람은 변하는 게 없는 것인가. 자기 임무에 묵묵히 충실한 사람, 사(私)를 위해 전체를 배신하는 사람,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사람, 명분을 위해 그릇된 판단을 하는 사람등등 기원전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놀라게 된다.
▼휴먼 드라마로서의 전쟁사
이에 비해,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은 휴먼 드라마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전쟁사다. 30년 넘게 로마사 연구에만 매달려 온 그녀는 서양 고대에서 중세까지 길게 걸쳐 있는 동로마 제국 1000여년 역사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는 과정을 3개의 전투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투르크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을 50일간의 공방전 속에 담고 있으며 ‘로도스섬 공방전’은 동방 제국으로 성장한 오스만 투르크 술래이만 1세가 1522년 1만대군을 거느리고 기독교 세계 전진기지 로도스섬을 침공해 벌어진 6개월간 혈투를 다뤘다. ‘레판토 해전’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후 118년동안 무패신화를 계속한 투르크의 첫 번째 패배인 5시간 동안 해상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전쟁기록의 나열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들이 각자, 어떻게 자기 앞에 놓인 난제에 맞섰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천년 왕국 비잔틴 제국의 단말마적 정경속에서 주역은 누구였고 어떤 조역들이 줄거리를 채워 주었는 지 어제 일처럼 그린다.
찬란했던 역사를 통한하며 제국의 멸망을 지켜봐야 하는 무능하고 불운한 황제, 그 황제에게 충성하는 신하의 고뇌, 기울어 가는 조국(베네치아)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는 외교관, 조국에 대한 충정 하나로 버티는 전투원들….
‘국가의 안정과 영속은 군사력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평가와 외국에 대한 의연한 태도에 의지할 때도 많다.’
‘평화는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사려깊은 무장(武將)은 부하 장병들을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몰아 넣는 반면, 적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싸우지 않게 하는 계책을 강구한다.’
책 곳곳에 녹아 있는 경구들은 지금 들어도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도 이념을 걷어 낸 그럴듯한 전쟁사가 나올 날을 기다려 본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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