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신경제가 보통사람 잡네

발행일: 2002-05-25  /  기고자: 허문명
면종: 문화
 

◇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리처츠 세넷 지음 조용 옮김/240쪽 9000원 문예출판사


미국의 사회학자인 저자(뉴욕대 NYU 및 런던경제대학 LSE 교수)는 신경제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물결을 한마디로 ‘유연성’(flexibility)’이라고 규정한다.


조직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아래 수시로 개혁을 하고 노동자의 일은 ‘career’보다는 ‘job’의 의미가 강해졌다. 본래 마차가 다니는 길이라는 뜻의 ‘career’는 평생 한 우물만 판다는 의미인데 유연한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짐수레로 실어 나를 수 있는 한 덩어리나 한 조각의 물건의 의미인 ‘job’의 의미가 강해져 노동자들이 갑자기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잦아 졌다는 것이다.


이 유연성은 언뜻 보기에 일의 자유를 더 많이 주는 듯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착각이다. 삶의 자유는 오히려 더 억압받고 있다.


저자는 미국의 보통시민 세 사람의 최근 몇 년 동안의 삶을 추적하는 이른바 ‘휴먼다큐’ 기법으로 신경제의 유연성 속에서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예로 들고 있다.


우선, 금융 컨설턴트 리코다. 그는 언뜻 유연성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이중성 때문에 방황한다. 평생 소득 하위 25%내에 있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소득 상위 5%까지 올라가는 경제적 성공을 거둔다. 그동안 겪었던 전직, 실직, 마침내 독립하기까지의 경험을 ‘삶의 역동성’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한가지 일만 하는 것은 옛날 생각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혼란스럽다. 가장 먼저 충돌하는 곳이 가정이다. 가정만큼은 신경제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카멜레온적 가치 대신에 의무, 신뢰, 헌신, 목적 등과 같은 장기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그렇지 못하다.


자식들은 방과후 길거리를 배회하고 이기적이며 부모와 담을 쌓는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단절이나 이웃들과의 불화도 때로, 견디기 힘들다. 그에게 경제적 성공을 안겨 준 유연한 행동이 사실은, 그의 인간성을 약화시킨 것이다.


두 번째 주인공 로드니 애버츠는 제빵사다. 그는 견습직원에서 20여년만에 현장 메니저까지 되었다. 최근 들어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제빵실에 기계들이 등장하면서 부터다.


땀냄새 나고 숨쉬기 어렵던 사무실 공기는 놀랍도록 신선해졌고 밤을 새며 했던 일들은 기계가 알아서 해 준다. 컴퓨터 아이콘 하나로 모든 종류의 빵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동료들간 연대의식은 약해졌고 후배들은 일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는다.


후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집에 가면 진짜 빵을 굽습니다. 근데 여기서는 버튼만 누릅니다.”

장인 정신이 요구되었던 빵만드는 공정은 오직 기계만이 진정한 주문의 표준이 되어 제빵사들은 일에 대한 애착심을 느끼지 못하고 감정적인 혼란만 겪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주인공은 중년 여성 로즈. 신경제의 유연성이 근로 수명을 단축시켜 중년의 노동력을 얼마나 쓸모없게 만드는 지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술집을 운영하던 그녀는 새로운 일을 위한 모험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주류 광고 대행회사에 들어가지만 1년만에 그만둔다.


젊음과 미모가 없었던 그녀는 죽은 나무 토막 취급을 당했고 축적된 경험은 인정받지 못했다. 회사간부, 동료들은 퇴근 후 술자리에 그녀를 초대하지 않았으며 나이가 너무 많다고 변두리 사람으로 무시했다. 그녀는 현대의 조직 세계에서 자신과 같은 중년층은 서서히 부식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세사람의 경험은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를 표류하게 만드는 이 유연성을 견제할 대안은 무엇인가? 불행히도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추상적이다.


“보다 넓은 공동체 의식, 더 풍부한 감각의 인간성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늘어만 가고 있는 실패할 운명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저자는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외치지만, 그의 목소리는 외로워 보인다. 원제 ‘The Corrosion of Character’(1998).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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