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존 헐 지음/강순원 옮김/ 247쪽/8000원/우리교육
◇ 타쉬/사브리예 텐베르켄 지음/엄정순 옮김/125쪽/8500원/샘터
우리의 일상은 너무 빤해서 사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자동차 앞 유리에 금이 간 걸 보고 나서야 유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 듯, 21세기 정보화사회에서 보장된 일상은 어떤 중대한 재난이 닥쳐서야 위기를 느끼게 한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비명을 지르고 추락하면서 지금까지 내 삶이 거짓이 아니었을까 묻는다. 그러면서 이제껏 한번도 보이지 않았고 인식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고 반성하지 못했고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지름길은 없다. 완전히 노출된 채 빙 돌아가야 하는 긴 우회로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포기했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고, 잃었지만 찾았고, 죽음으로써 삶을 깨닫게 되는 그런 우회로말이다.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과 ‘타쉬’는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발을 옮긴 시각 장애인들의 이야기다. ‘손끝으로…’의 주인공은 호주출신의 존 헐 영국 버밍엄대 교수(종교교육과)이며 ‘타쉬’의 주인공은 티베트에 살고 있는 열살배기 어린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비슷한 재난을 경험하지만 놀라울만큼 똑같은 삶의 깨달음을 얻는다. 맹인이든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장애를 가진 존재들이며 그런 한계를 처절하게 느낄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만나고 화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력을 잃음으로써 삶에서 향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진심으로 경건하게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이다 불완전이다, 장애다 비장애다 하는 편견과 오만을 넘어 진정 타인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삶으로 변화했다.’
‘손끝으로…’의 저자 존 헐 교수는 열 세살 무렵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처음 경험한 후 36년간 시각 장애와 맞서 싸우지만 마흔 여덟살에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다.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이제 이 세상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그는 시력을 잃은 1983년부터 녹음 테이프에다 일상을 기록했다. 이 녹음 일기에는 정상인이 ‘시각 장애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꿈의 상실감, 악몽속의 가위눌림,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통찰들이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볼 수 있었던 때의 기억을 의지삼아 조금씩 보이지 않는 세계로 다가간다. 흰지팡이와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 소리로 전달되는 세상의 정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상과의 접점을 찾아낸다. 점점 익숙해질 무렵, 그는 맹인에 대한 정상인들의 오해에도 눈을 뜨게 된다.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확 트인 공간보다 계단이 더 안전하고 눈이 오면 미끄러지는게 문제가 아니라 길을 안내하는 모든 신호가 묻혀 버려서 아예 길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그의 이야기는 정상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체험적 진실이다.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은 곧 나는 무시될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뤄진다는 말이다. 맹인은 곧잘 3인칭으로 대접받는다. 옆에 있는 나는 무시된 채 정상인은 또 다른 정상인에게 묻는다. “당신이 그(맹인)를 엘리베이터에 태워 주시겠습니까?” “그를 사무실에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이럴 때마다 나는 의식의 상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간다는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감정을 관조와 포기를 통한 행복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삶의 의미이다. 시각장애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시력을 잃은 후 우연히 일어난 일도 의미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진정한 기적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손상된 육체를 이해함으로써 과거의 온전한 세계에 대한 기대를 던져 버릴 수 있을 때 일어난다.’
존 헐 교수는 그리하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에 대한 타협이 없이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 부정과 좌절을 겪으며 조각난 세계안에 살 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일기를 맺고 있다.
한편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보고서를 연상시킬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된 그의 일상을 읽고 난 뒤 기자는 우리가 각자 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편견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의 계기를 만났음을 느꼈다.
‘타쉬’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그러나 아름다운 나라 티베트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해발 3000∼5000m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고원의 강한 햇빛으로 인해 시각 장애자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태양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눈이 머는 것을 나쁜 짓 한 데 대한 신의 벌이거나 혹은 귀신이 씌었다고 믿어 시각장애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특히 어린이들은 가족내에서 조차도 격리되거나 구걸을 강요당한다.
그러나 타쉬는 이런 상황에 절망하지 않는다. 비록 다른 친구들처럼 일반 학교에는 가지 못하지만 동물 목에 달린 종소리를 세밀하게 구분해 내 훌륭한 목동 노릇을 하고 소리와 냄새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산과 들판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 마을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오지 나므리 마을 사람들은 매일 밤, 이 눈먼 아티스트 타쉬가 그려주는 그림과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러다 타쉬는 우연히 대도시 라사에 시각장애인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유목민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저자는 타쉬가 절망과 어둠의 늪에서 뛰쳐나와 대도시 라사에 가기까지의 여정을 풍부한 유머와 티베트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려냈다.
이 책은 실화다. 타쉬와 그의 가족, 시각 장애인센터 노돈 선생님과 학생들, 나므리 마을 사람들 모두 현재 티베트에 살고 있다. 이 책을 만든 독일인 작가 사브리에 텐베르켄도 시각 장애인이다. 1998년 라사에 시각장애인센터를 건립한 주인공이다. 사진작가 오라프 슈베르트는 티베트 여행도중 사브리에를 만나 책 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주인공 타쉬를 둘러싼 티베트의 정경을 한편의 기록 영화처럼 담아냈다.
옮긴이 엄정순씨는 서양화가로 1998년부터 한국시각장애인 예술협회를 결성하여 시각장애학교의 미술수업을 돕고 그 아이들의 작품을 기획 전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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