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승려인 내게도 가슴아린 사랑이…

발행일: 2001-12-08  /  기고자: 허문명
면종: 문화
 

◇첫 사랑은 맨 처음 사랑이 아니다/틱낫한 지음/164쪽/7500원/나무심는사람


나는 스물 네 살이었습니다. 수도승이었지만 한참 기운이 뻗치는 예술가이자 시인이었지요. 베트남 원각사에서 불교 강의를 마치고 며칠간 머물 때 그녀를 만났습니다. 스무살 여승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순간, 신선한 미풍이 얼굴 위로 불어 오는 듯 했습니다. 전에도 많은 여승을 만났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지요. 내 사랑은 폭풍같았고 그 사람은 내 폭풍에 사로 잡혔습니다.


우리는 버텨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 수 없었고 결국 받아 들였습니다. 둘다 젊었고, 그래서 바람에 날렸습니다. 참다운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이 서로 간절했지만 말이에요. 나는 1초나 2초 이상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마음은 들끓었습니다. 시를 쓰려 했지만 한줄도 못 썼습니다.…어느날,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목젖이 붓도록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방에 가서 약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약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사흘간 만나지 못했습니다.


새벽 1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아 그녀 방 앞으로 갔습니다. 밤새 서 있으면서 몇 번이고 방문을 두드려 그녀를 불러 내고 싶었지만, 나는 그 충동에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한 모든 것-자비, 사랑, 불교의 사회화, 평화와 화해의 실천-을 한 몸에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별하던 순간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그 사람 역시 깊은 좌절감에 젖어 있는 듯 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두 팔로 껴안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가슴으로 끌어 안더군요. 나도 내 몸을 그 사람 가슴에 그냥 맡겼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경험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접촉이었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절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나는 베트남 승려 틱낫한입니다. 선사(禪師)인 내게도 이렇게 첫사랑이 있었답니다. 이 책은 첫사랑에 대한 고백이지만 단순히 연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속엔 제가 겪은 사랑의 아픔과 거친 감정의 파도, 그리고 사랑을 수행의 바탕으로 삼은 명징한 깨어 있음이 있습니다.


첫사랑은 맨 처음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인생의 흐름에서 나온 ‘그 사람 아닌’ 요소들로 이뤄진 존재입니다. 나의 첫사랑은 이미 거기 있었고 늘 거기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훨씬 더 힘이 있는 어떤 존재로 바뀌었어요. 그 깊은 사랑의 씨앗이 우리 모두에게 있답니다. 흔들리지 않는 선정속에서 꽃을 본다면 태양과 온 우주를 만날 수 있듯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온 우주를 만날 수 있답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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