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에 갇히다/제리 닐슨 지음/440쪽/9800원/은행나무
미국 인디애나 대학병원 응급실 전문 여의사였던 제리 닐슨(50). ‘인생이란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그녀는 마흔일곱 되던 해(98년) 남편과 이혼하면서 세 아이와도 작별했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서른을 넘기기 싫어 사귄 지 3개월만에 청혼했던 남자와 못 이긴 척 결혼했었다. 남편은 그러나 편집증적인 질투와 간섭 언어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23년만에 결혼생활을 청산하면서 세 아이도 함께 포기했다. 힘든 법정싸움에서 아이들이 상처받는 것을 도저히 못견뎠기 때문이다.
닐슨은 겉보기에 ‘잘 나가는’ 고소득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내면은 황폐했다. 역류하는 수영 선수처럼 응급실로 빨려 가는 일상속에서 ‘악마를 빤히 쳐다볼 수 있어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살고 있었지만 희망은 사라졌으며 삶은 외로웠다.
덫에 걸린 동물처럼 도피를 꿈꾸다 우연히 ‘미국 남극 과학자 41명을 돌 볼 의사구함’이라는 구인광고를 보았다. 절반으로 깎일 연봉이나 살인적인 추위는 문제될 게 없었다. 꿈에서조차 밟히는 아이들에게서 멀어질 수만 있다면 어디든 달아나고 싶었다. 먼곳이라면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남극은 그녀를 구원했다.
지구 끝자락에서 완전히 격리돼 소수의 사람들과 24시간 부대끼는 삶은 그녀를 변화시켰다. ‘가진 것보다 많이 주고 필요한 것보다 적게 쓰며 사생활없이 생활하고 온전히 내 것은 내 생각 뿐인 남극생활’(80쪽)에서 뜨거운 인간애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뜻대로 안되는 것일까. ‘이제 나를 알 것 같다’고 깨달을 즈음 덮친 병마, 유방암이었다.
25년간 의사로서 다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돌보며 살았던 그녀였지만 막상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암에 관한 자료조차 읽는 게 싫었다. 병을 부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이 억지였음을 깨달았다. ‘난 너희들과 달라’라는 오만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행복’ ‘영혼’ 운운했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동료들이 그녀의 투병을 알게 됐고 남극기지에서는 ‘제리닐슨 구하기’ 작전이 펼쳐진다.
한달 동안 미국 정부뿐 아니라 뉴욕 공군 방위대, 남극 지원 협회, 남극기지 대원들이 하나가 돼 화학요법 치료를 위한 약물과 의료기기를 공중 투하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치료했다. 매일 인터넷과 위성전화로 진단이 이뤄졌다. 마침내 수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수백만 달러의 자금과 군의 정예부대까지 동원돼 그녀는 남극에서 구조됐다.
닐슨은 자신이 일했던 병원에서 99년 10월 수술을 받았다. 집에서 요양하면서 자전에세이 ‘얼음에 갇히다’를 지난해 출간해 미국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부모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그녀는 더 이상 암세포의 전이가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지구상 어디나 인간의 삶은 마찬가지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공경희 옮김, 원제 ‘Ice bound’(2000).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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