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세월이 흘렀지만 사진처럼 선명한 그때 그 순간. 85년 9월23일 아침 고려호텔 로비,그 이별의 순간을 나는 잊지못한다.3일전 내 앞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깊게 파인 주름, 야윈 몸. 손톱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붙은 열 손가락. 3박4일 동안 공식석상 10분 개별상봉 10분 저녁식사 한번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 다시 뵐 때까지 살아계셔야 한다고 50넘은 중년의 이 사내는 그만 엉엉 울었다. 아버지를 업었을 때 나무토막처럼 가벼웠던 그 휑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나는 산 목숨이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온 사흘 뒤 맞은 내 생일날. 자식들이 마련해준 뷔페상 앞에서 밥 한술 넘기지 못하고 통곡했다. 아들은 이렇게 맛난 음식앞에 앉아 있는데 북에 있는 늙은 아버지는 무얼 드시고 계실까. 세상이 미워졌다. 6·25전쟁 발발직후 ‘한달만 피해 있으면 3대독자 네 목숨은 산다’며 열다섯살 어린 나를 남으로 떠나 보내셨던 아버지.
살아남기 위해 부두노동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독학으로 검정고시와 사법고시에 합격, 변호사가 된 것도 성공한 아들을 뿌듯해 하실 부모님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만남은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1년 만에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았다. 백방으로 아버지와 연락이 닿을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나는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2년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몇 년간의 투병생활. 종교의 힘이 아니었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2년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최근에 전해듣고 오히려 맘이 놓였을까. 나뿐만 아니다. 그때 함께 평양에 가 가족을 상봉했던 50명중 5명은 서울로 돌아와 북의 가족을 그리워하다 이내 숨졌고 4명은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이번에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한번 만나고 헤어질 거면 아예 안 만나는 게 낫다. 남북의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지속적인 만남이 어렵다면 최소한 편지교환이라도 하게 해야한다. 국경과 장벽이 없는 이 세계화의 시대에, 제 피붙이의 소식조차 알지 못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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