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이순식씨(46·경남 거창군)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 “나 같은 사람이 신문에 날 이유가 없다”며 인터뷰를 강하게 거절했다. 몇차례 다시 전화를 걸고 사정사정해서 반승낙을 얻어냈다.수줍어하며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저녁이나 먹자며 잡아끌었다. 이씨와 거창 시내를 걸으면서 많은 사람과 마주쳤다. 구멍가게 할머니, 꼬치 파는 아줌마, 빵집 아저씨, 버스운전사까지 손을 흔들며 이씨를 아는 체 했다.
이씨는 “거창 바닥에서 20년 동안 안 가본 곳 없이 일해 아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녀의 직장은 거창군 보건소. 청소와 빨래일을 하고 있다.
▼버스차장 등 궂은 일 다해봐▼
이씨 삶은 고단했다. 1949년 전북 군산출생.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아홉형제 중 네 형제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목수였던 아버지는 ‘여자가 배워봐야 소용없다’고 등록금을 주지 않았다. 가출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올라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부산. 파출소에 붙잡혀 6개월간 경리일을 도왔다. 이후 이씨의 청춘은 우리네 가난했던 시대의 ‘딸’들이 거쳤던 그대로였다. 그 시절 흔하게 듣던 식순이 공순이 차순이(버스차장)가 그녀의 직업이었다.
스물 여섯 되던 해,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고아나 마찬가지였던 두 사람은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식을 올렸다. 남편 역시 못 배우고 가난했다. 무주에서 머슴을 살다 동네사람 소개로 국수공장으로 옮기면서 거창 생활을 시작했다. 공장 기계에 남편의 팔만 잃지 않았어도 이씨의 삶은 좀 나았을지 모른다.
이씨네는 살길이 막막했다. 보상금을 주겠다는 사장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갑자기 장애인이 된 남편은 의욕을 잃었고 술로 지샜다. 이씨가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젖먹이들을 안고 노점상 행상 등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사람과 세상이 싫어 목도 걸어보고 약도 먹어보았지만 죽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그 즈음 남편을 치료했던 병원에서 이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의사가 거창에서 제법 큰 개인병원 청소부로 이씨를 추천했다. 비로소 출퇴근하는 직장을 얻은 이씨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병원을 쓸고 닦는 일에서부터 해부한 시체의 쓰레기 치우는 일까지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 더 많아▼
세상에 대한 시선이 따뜻함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병원일을 하면서부터였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병원에서 배웠어요.”
돈이 없어 병이 든 아이를 속절없이 보내야 하는 부모, 혼자 죽어 가는 노인들, 죽어가는 부모를 앞에 두고 유산 때문에 싸우는 자식들…. 돈이 있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이씨는 결국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그렇게 10년을 병원에서 일하고 보건소로 옮겼다. 월급 45만원의 박봉이지만 시간이 많아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박봉쪼개 무의탁노인 도와▼
그 중에서 가장 큰 일은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돕는 일. 일이 힘들어도 짬날 때마다 노인들 빨래도 하고 밥도 해드린다. 부모처럼 모시는 분이 6명이나 된다.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예요. 그동안 사람들한테 진 빚을 갚는 거지요.”
‘가진 것 배운 것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으리라’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일이 못 되는데….” 이씨는 인터뷰 내내 머뭇머뭇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간간이 웃음을 보였는데 그녀의 웃음은 동자승의 것처럼 해맑았다.
<거창〓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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