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작년 초다. 회사(K증권)가 쓰러지고 차장급 이상 전원 사직서 제출. 경영기획팀 차장이었던 서기석(徐基錫·43)씨는 그날 저녁 동료들과 포장마차에서 강소주를 마셨다. 눈앞이 깜깜하고 앞날이 막막해서 마흔 넘은 사내들이 울다가 웃다가 했다.다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청춘 13년을 불살랐던 직장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원통하고 분했다. 매일 술을 마셨다. 실업급여 100만원이 한달 수입의 전부였지만 빌려 쓴 부채 때문에 한달에 110만원이 은행 이자로 나갔다. 아내가 미술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작년 여름, 외국계 보험사에 취직했다. 열심히 뛰었다. 건물 로비마다 붙어 있는 ‘보험 모집인 사절’ 팻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버텼다. 샐러리맨 시절보다 수입은 많아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이 허전했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했던 샐러리맨 생활이 그리웠다. 만나는 사람들이 부담 갖는 것도 싫었다. 절친한 친구, 친척들이 ‘도와 줄 형편이 못된다’고 미안해했다.
올 2월 옛 직장 상사가 반도체 조립회사 대표로 가면서 일을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선뜻 달려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법원에 화의신청 들어간 회사이긴 했지만 곧 외자가 도입되면 전망이 밝다는 게 선배의 설명이었다. 급여도 반으로 줄고 지방 근무를 해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정 많은 사람들이 형제처럼 대해줬다. 점심 시간에는 웃옷 벗어제치고 축구를 하고 저녁에는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기막혔다. 그래, 직장이란 게 이런 맛이 있어야지. 옛날 원기가 되살아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외자 유치가 결렬돼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두달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증권가에 발을 디디면서 투자 자문사를 거쳐 지금은 옛 선배들이 모여 만드는 증권사 설립일을 맡아 뛰고 있다.
다시 돌아온 여의도는 딴 세상이다. 썰렁하던 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생활고로 허덕이던 옛 동료들은 하나둘씩 직장을 잡았다. 누구는 억대연봉 받는다는 얘기도 들리고 누구는 주식투자해서 벼락부자 됐단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하는 상실감이 느껴진다.
올해 1년, 무엇보다 아내와 가족을 다시 얻은 게 기쁘다. 그것은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일. 지난 가을엔 성당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여해 2박3일 동안 아내와 편지로만 얘기했다. “남편이 직장을 잃었을 때 나는 남편을 얻었어요” 하던 아내의 말이 생생하다.
바쁠 때, 남편은 하숙생이었다. 남자는 일 속에 묻혀 살고 여자는 애보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게 부부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시절, 묵묵히 지켜봐준 아내. 인생의 동반자라는 말이 지금처럼 가슴에 닿은 적도 없다.
올 봄부터 성당에서 부부 성가대 단장으로 일하는 그는 한달 용돈 2만원 갖고도 부자로 사는 수도사들, 가진 것 없지만 따뜻한 가족애로 성실히 살아가는 이웃들을 가까이 보면서 얻은 게 너무 많다.
그러나 수천만원짜리 모피코트가 빌미가 된 옷로비 사건에다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세상사를 접할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부디 내년에는 우리같은 보통사람이 기(氣) 펴고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보통 사람 서씨의 소박한 내년 소망이다.
〈허문명 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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