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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그후 1년]<4> 리비아 최대격전지 미스라타

발행일: 2012-04-20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시민군 추모관 뒤덮은 영정, 이름도 없이 숨진 날짜만…


벵가지 트리폴리 다음으로 리비아에서 인구가 많은 세 번째 도시 미스라타(45만 명)는 여전히 대부분 건물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고 화염으로 검게 변해 있다. 리비아 내전이 지난해 지구촌의 가장 끔찍한 유혈 전쟁이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수도 트리폴리는 민간시설 피해가 거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미스라타는 아직도 시내 건물의 절반은 깨진 창과 문이 그대로 방치된 빈집이다. 시(市)는 재건 비용만 1조 원이 들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스라타는 북쪽 지중해를 경계로 유럽과 가깝고 가장 큰 항구가 있어 상업, 물류 중심 도시로 꼽힌다. 이곳에서 2대째 해운 물류업을 하며 부(富)를 쌓아온 누리 씨(56)는 1년 전 ‘지하 운동가’로 사선(死線)을 오갔었다. 지난해 2월 17일 벵가지 ‘분노의 날’ 시위가 벌어진 후 이곳에도 20일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대 한 명이 총탄에 맞아 죽으면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3월 8일 카다피군이 투입됐다.


누리 씨는 당시 무기구입비로 약 500억 원의 사재(私財)를 썼다.


“지식인들과 중산층이 많은 이곳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도 카다피에게 다 빼앗긴다는 불만이 팽배했었어요. 그러다 카다피군이 가족 친구 이웃을 죽이고 여자들을 성폭행하자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군인들은 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며 죄 없는 시민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죽였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와 딸을 성폭행하기까지 했다. 시민들은 “죽더라도 싸우다 죽자”며 다시 일어섰다. 이번엔 총을 들었다. 누리 씨 같은 몇몇 부자가 막힌 육로 대신 낚싯배로 바닷길을 이용해 벵가지 등에서 무기를 구해 왔다. 팀당 많게는 1500명, 적게는 50명씩 200여 개 민병대가 자연발생적으로 꾸려졌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지만 시민들은 트리폴리가 시민군에 의해 해방된 8월까지 거의 매일 전투를 벌였고 무려 25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만5000여 명이 부상하는 사투 끝에 승리했다.


리비아 사람들은 혁명의 성지(聖地)로 트리폴리가 아닌 미스라타를 꼽는다. 주 도로인 ‘트리폴리 스트리트’에 마련된 희생자 추모관만 봐도 민주주의란 피로 얻어지는 투쟁의 산물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추모관 3면 벽에는 숨진 시민들 영정 사진이 ‘12/31/2011’ ‘07/06/2011’ 하는 식으로 이름도 없이 숨진 날짜만 적혀 빼곡하다. 갓난아기 얼굴들도 있다. 또 다른 한쪽 면에는 얼굴이 깨지고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나온 부상자들의 끔찍한 사진들로 가득하다. ‘1980년 광주’가 저랬을까, 자유와 해방을 외치다 싸우고 죽은 이들에 대해 국경을 넘은 추모의 마음이 일었다.


추모관 밖에는 트리폴리를 함락시킨 시민군들이 노획해 온 각종 카다피 관저 기념물들 옆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국기가 펄럭인다. 기자는 리비아에 오기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전쟁 개입에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제로 만난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생큐, 나토”라고 했다. 시내에서 대형 쇼핑몰을 운영하는 하이삼 씨(45)는 “전투기와 헬기로 공격하는 카다피군에 우리는 소총으로 맞섰다. 나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리비아의 해방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미스라타에서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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