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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남자' 차영회씨의 추석나기 / ‘主夫’10년… 主婦 고통 잘 알죠

발행일: 2006-09-30  /  기고자: 허문명
면종: 사회
 

《“지난해에는 1만 원짜리 한 장으로 김 세트 정도는 살 수 있었는데 올해는 살 만한 게 없더라고요. 콩나물 한 봉지에 2000원이 넘는데 마누라는 아는지 모르는지 돈을 헤프게 쓴다고 바가지만 긁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차영회(46·인천 계양구 작전동) 씨는 “추석 달(月)이 차오르면서 스트레스도 차오른다니까요”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 “명절스트레스 장난 아니던데요”


자칭 타칭 ‘인천댁’인 차 씨는 ‘살림하는 남자’다. 장 담그는 일을 빼 놓고는 모든 일에 자신 있는 10년차 베테랑 주부다.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에 살가운 말투는 아줌마인지 아저씨인지 경계에 선 듯하다.


“주부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우선 돈이 없어 걱정이고, 음식 준비에 시댁 식구 눈치 보랴 고단한 일이 많아 남편이 지원자가 돼 줘야 한다.”

명절이 다가오면 여느 주부처럼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차 씨는 올 추석에는 음식보다는 식구들이 모여 노는 프로그램에 신경을 쓰라고 조언했다.


“주부들이 음식 마련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죠. 주부들을 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게 가족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내는 지름길입니다.”

차 씨가 명절 주부 스트레스를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한 출판사의 편집장을 지내다 30대 중반 창업을 결심하고 직장을 나왔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촉발된 경제난이 발목을 잡았다. ‘한두 달 놀면 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를 믿고 있을 수만 없던 아내가 취업 전선에 나섰다. 아내가 일자리를 찾자 그가 살림을 떠맡으면서 부부의 역할이 바뀌게 됐다.


○ ‘인천댁’별명… “주부가 직업”


“처음에는 ‘남자가 무슨…’이라며 버텼는데 녹초가 돼 퇴근하는 아내를 보니 도저히 놀고먹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세 살. 다섯 살이던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필요했죠. 처음 1, 2년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어 유서까지 써 놓았어요.”

차 씨는 “막상 죽으려니까 ‘집안일 하기 싫어 죽는다’는 게 자살 이유치고는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못할 게 뭐 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돌이키니 집안일이 손에 잡혔다.


여느 주부와 다름없이 ‘가장’을 출근시키고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청소, 빨래, 장보기, 삼시 세 끼 밥 차리는 일에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10년이 훌쩍 흘렀다. 내공이 쌓이다 보니 인터넷으로 주부들과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 정도가 됐다.


차 씨는 주부사이트 미즈(www.miz.co.kr)에 ‘남자가 쓰는 주부일기’를 연재하는 청일점 회원이다. 3년 전부터 여성가족부의 양성평등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으니 이젠 주부가 직업이다.


“집안일이란 게 ‘단순 쌩 노가다’죠. 어제 닦은 데 오늘 닦고, 오늘 닦은 데 내일 닦으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어요. 직장생활 할 때는 가사노동과 아내를 우습게 봤는데 얼마나 반성했는지 몰라요.”


○ 콩나물 값 모르면 정치하지 말라?


주부생활을 하면서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것이 차 씨의 큰 소득이다.


“예전에 아내가 했던 잔소리들을 내가 똑같이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남녀가 하는 일의 차이를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생물학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할의 차이는 없다는 게 10년 주부생활의 결론입니다.”

그는 “나는 ‘여자는 남자보다 한 수 아래’라고 배우고 생각하며 자라 온 평범한 중년 남자였죠. 막상 살림을 해 보니 여자들이야말로 새 시대를 열어 나갈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란 결론을 얻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가사노동은 ‘남을 위한 노동’이라는 점에서 나눔과 베풂, 배려와 헌신이 필요한 미래적 인간형의 덕목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차 씨는 “이제 콩나물 값(이 주는 충격)을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인천=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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